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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퉁이극장 Oct 28. 2022

결심은 어떻게 완성되는가?

영화 <헤어질 결심>을 보고 작성한 에세이 입니다.

박주영



* 이 글은 영화 <헤어질 결심>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결심을 한다. 그리고 결심은 보통 결심에서 끝이 난다. 내가 요즘 자주 하는 결심은 '오늘은 꼭 영화를 보러 가야지.’

그리고 피곤하거나 날씨가 좋지 않으면 고민하다 결국 취소를 한다. 그래서 친구들에게 요즘 내 취미는 '영화 취소하기'라는 말을 우스개로 하곤 한다. 하지만 <헤어질 결심>은 그 결심을 행동으로 완성 시켜주었다.


<헤어질 결심>은 믿고 보는 박찬욱 감독님의 작품이기도 하지만 정말 좋아하는 정서경 작가님과 공동 각본으로 집필하셨고, 박찬욱 영화의 미장센을 책임지는 류성희 미술 감독님도 참여하셨기에 개봉하는 날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뚫고 보러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영화는 알프레드 히치콕의 <현기증>이 생각났다. <현기증>의 남자주인공인 경찰(스코티)이 한 여성(매들린)을 미행하며 샌프란시스코의 구불구불한 길을 운전하며 따라가던 장면이 <헤어질 결심>에서 해준이 서래를 운전하며 미행하는 장면과 무척 겹쳐 보였다. 또한 <현기증>에서 녹색은 아주 상징적인 색깔인데, <헤어질 결심>에서 해파리 이야기를 하며 서래가 해준을 재울 때 불이 꺼지고 창밖에서 비치는 빛도 초록색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서래의 모래더미가 바닷물에 잠길 때 생기는 소용돌이도 <현기증>의 나선형 이미지를 생각나게 했다. 집 안에 있는 서래를 훔쳐보는 장면에선 언뜻 히치콕의 <이창>도 생각이 났다. 영화 도처에서 히치콕의 향을 느꼈는데, 정작 감독님은 히치콕의 영화에서 모티프를 가져와 만들지는 않으셨다고 했다. 하지만 박찬욱 감독이 히치콕의 팬이기 때문에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하는 여느 사람들의 생각이 나도 들고, <헤어질 결심>이 현기증의 박찬욱식 변주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 영화에서 누가 헤어질 결심을 하는가. '서래'.

그래서 서래의 헤어질 결심은 어떻게 완성이 되는가.

서래는 해준과 헤어질 결심을 하려고 임호신 같은 남자와 결혼을 한다. 그 결심은 제대로 된 헤어짐을 주진 못했다. 이후 서래는 그의 목소리를 녹음한 음성 파일을 듣다가 마치 '이거였다'는 표정을 지으며 다시 헤어질 결심을 이어 나간다.

'저 폰은 바다에 버려요, 깊은데 빠뜨려서 아무도 못 찾게 해요.'

이 말대로 자신을 바다에 버린다. 깊은데 빠뜨려서 아무도 못 찾게.


마침내.

서래는 헤어질 결심을 완성하고 '해준씨의 미결 사건'이 된다.

이 마지막 장면은 영화에서 가장 인상 깊고 여운 짙던 장면이다.

서래가 택한 마지막 모습은 살면서 조금이라도 상상해 본 적 없는 일이라 충격이기도 했다.


두 번째 관람 때까지는 이 마지막 장면의 해준을 보며 '바로 네 발밑에 있는데! 이 바보야!' 이런 생 각을 하며 관람을 했다. 그런데 세 번째 관람을 했을 때 이 감상은 아주 다르게 바뀌었다.

서래를 찾아 바다로 온 해준은 서래 핸드폰 속의 음성 파일 '붕괴 : 무너지고 깨어짐.'를 듣는다.


그제서야 그는 자신의 사랑을 깨닫는다. 그리고 서래의 마지막 모습을 예상한 듯한 표정을 짓는다. 풀린 신발 끈을 고쳐 신고 외친다. '서래 씨!'

그는 그 음성파일을 듣고 서래의 생각을 읽을 것이다. 그들은 '말씀'말고 '사진'을 선택한 같은 종족이니까.

그래도 그는 마지막까지 서래를 찾는다. 그는 이제 붕괴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영화는 서서히 <안개> 노래 속으로 사라진다.


나는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는 영화를 좋아하는 편이다.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은 여운을 남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먹먹한 이 엔딩 장면이 더욱 맘에 든다. 그들은 절대 한 점에서 만날 수 없으니까.


오랜만에 한국어의 아름다움을, 그리고 내가 한국인인 것에 감사함을 느끼며 본 영화였다. 마침내. 단일한. 오로지. 한국인만 알 수 있는 이 뉘앙스는 과연 어떻게 번역이 됐을까. 내가 좋아하는 외화들의 미묘한 뉘앙스를 놓치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동시에 들어서 약간 슬프기도 하다.


영화의 장면들과 대사가 물에 잉크가 퍼지듯이 서서히 내 가슴에 물들어 지워지지 않는다. 아직 이 영화와 헤어질 결심이 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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