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아이들이 자기 척추로 설 수 있도록
농사를 지으면 어쩔 수 없이 다른 밭의 농작물과 내 농작물이 비교가 되나 보다. 엄마는 밭에 가시면 어떤 날은 우쭐해서 엄마가 키운 작물이 잘 돼서 남들이 부러워한다고 비결이 뭐냐 묻는다고 자랑스러워하신다. 어떤 날은 정반대로 잘 안 자라는 농작물 때문에 걱정하신다. 엄마의 농작물에 대한 관심은 가끔 자식인 나보다 더 큰 것처럼 보인다. 농작물이 안 자라는 듯하면 엄마는 어김없이 영양이 부족한가 고민하시면서 퇴비와 비료를 듬뿍 주신다. 엄마의 깊은 관심과 정성으로 쑥쑥 자란다. 그런데 적당하게 자라야할 이 녀석들이 너무 갑자기 웃자란다.
정말 필요한 만큼, 스스로 설 수 있을 정도로 딱 필요한 만큼의 영양이 필요한데 과하면 웃자라 스스로가 감당이 되지 않아 결국 작은 바람에도 넘어지고 만다.
잔디를 깎기 위해 웃자라서 자꾸 넘어지는 국화를 지지대로 세워두고 잔디를 깍는다. 누워있으면 행여 손상될까봐
아이들을 만나다 보면, 정성스레 자녀를 돌보는 많은 부모님들을 본다. 귀한 자녀들을 애틋하게 섬세하게 돌보는 그 손길로 아이들은 따뜻하게 잘 자란다. 그러다 가끔은 퇴비나 비료가 과한지, 돌보는 정성이 넘치는지 저렇게 자기 척추로 설 수 없는 아이들을 본다.
이럴 때..
부모님께 조심스레 건네본다. 아이 스스로 설 수 있도록 조금만 뒤에서 지켜보자고, 너무 많은 도움은 아이 스스로 혼자 못하는 아이라는 것을 학습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 과한 도움의 손길을 쉬이 내려놓지 못하는 것을 본다. 아이가 가진 것은 무엇인지,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지, 그리고 진짜 아이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 아이들의 성장을 지켜볼 여유가 있으면 좋겠다.
그런데 이 과도한 도움의 레일에 들어서면 아무리 옆에서 뭐라고 해도 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20년 동안 설득해보았지만 소용없다는 것을 학습했기에 소심하게 한마디만 건넨다. '자라면서 아이가 힘들어하면 어릴 적 놀았던 이 모래놀이터로 데리고 오세요.'
내가 해줄 수 있는 방법은 이게 전부다. 조급한 부모님의 마음을 외부에서 내려놓게 하기란 시지프스의 형벌처럼 어렵게 느껴진다.
모두가 이렇게 경쟁 속에 들어있는 이 한국 사회에서 숨쉴틈 없이 힘들어 아이들은 방황한다. 한국학생들의 자살율과 한국 국민의 행복지수가 가장 낮다는 것은 이제 상식이 되어 언급할 필요도 없다.
이 아이들이 행복하게 기억할 수 있는 어릴 적 이 작은 모래놀이터 하나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인 것 같다.
최근 읽은 책으로 중학교 영어교사이면서 자폐성장애 남매를 키우는 이수현선생님의 책에도 이런 내용이 있다. 아이가 장애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부터 치료에 올인하는 경험,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후회되는지에 대해 쓰셨다.
일주일 내내 타이트한 치료스케줄 속에 지친 아이들이 눈빛을 보면서 치료를 줄이면 어떠냐고 조심스레 권해보지만, 그것도 소용없다는 것을 안다.
아이와 따뜻한 눈 한번 마주칠 겨를도 없이 어린아이인데도 학습에 치료에 매달리게 하는 한국 사회를 우리 모두가 더 곤고하게 만들어 가는 것 같아 오늘은 유독 씁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