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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담 Mar 28. 2023

4년 차 농사일지 17화

돌쇠와 마님

 태풍이 지나면 화요일 밤에 농막으로 가기로 의논이 되어 있었다. 남편은 수요일과 목요일 이틀간 농막에서 출근하고, 나는 캐 놓고 온 땅콩을 갈무리하고, 미처 캐지 못한 땅콩은 마저 캐기로 했었다. 그런데 내 마음이 바뀌었다. 남편에게 목요일 저녁에야 가겠다고 선포했다. 마음이 바뀐 이유는 미움받을 용기를 냈기 때문이다.     

 

 화요일 아침이 되자 태풍 재난문자가 요란하게 왔던 것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날씨가 아주 화창하게 개었고, 바람은 적당했다. 가지 않겠다고 어깃장을 놓았으나, 날씨를 확인하자 이거 빨리 가야 하는 거 아닌가, 불안하고 초조했다. 원래는 느긋하게 책이나 읽고 글이나 쓰자고 했는데, 마음이 심란해 글을 읽어도 내용이 들어오지 않았고, 쓰려고 해도 집중이 되지 않았다. 집에 앉아있기가 불편해졌다. 공연히 친구와 지인들에게 전화를 걸어 약속을 연달아 잡고 집 밖으로 뛰쳐나갔다. 

     

 친구와 지인들을 만나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며 수다를 떨었다. 우리 세대는 각자 계산에 익숙하지 않다. 내가 불러내었으니, 당연히 밥값이나 커피값은 내 몫이었다. 아무리 수다를 떨어도 즐겁지 않았고, 밥도 맛있지 않았고, 커피는 달지가 않았다. 집을 나올 때만 해도 “그깟 땅콩 너구리가 먹으면 땡큐고, 안 먹으면 그것도 고마운 일이고.” 하면서 호기롭게 씨부렁대면서 나왔는데, 체한 것처럼 명치께가 답답해 왔다. 머리로는 부인하고 있지만, 마음이 땅콩밭에 가 있어서 그런 것 같았다



   

  농사짓겠다는 남편을 말리자, 남편이 자기는 돌쇠처럼 일할 테니, 나는 나무 그늘에 앉아 안방마님처럼 좋아하는 책이나 읽으며 글 쓰라고 했다. 나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식탁만 한 땅에 상추를 심어도 마누라를 부려먹을 사람이니까. 


 노후 3대 리스크가 자식, 간병, 황혼이혼이라고 한다. 각자 사정에 따라 한두 개씩 추가되겠지만, 우리 집은 거기에 농사를 추가하고 싶다. 나는 정말로 농사짓는 노후를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다. 땅을 사기 전까지는. 


  농사를 지으며 남편은 어떤지 그 속마음을 모르겠으나, 나는 30여 년 결혼생활 최대의 위기를 맞고 있는 느낌이다. 그것은 누가 옳고 그르냐의 문제가 아니라, 다름에서 오는 것들이다. 우리의 다름은 각자의 영역에서 일할 때는 보완적인 관계였다. 그런데 같은 일터에서 일하니 서로 속이 터질 정도다. 앞글에 잡초를 매는 차이를 말한 것처럼 매사 일을 하는 방식이 달랐고, 추구하는 방향이 달랐다.    

  


  남편이 모종을 키웠는데, 양이 좀 많았다. 이웃에게 나눠주어도 남았다. 나는 튼실한 것만 심자고 했다. 그런데 남편은 애써 키운 것이라 버릴 수 없다고 우겼다. 그러면서 간격을 좁게 해서 심었는데, 내가 보기에는 너무 촘촘하게 심은 것 같았다. 그래도 모종이 남자, 내가 반대하는데도 작물 간에 간격을 무시하고 토마토와 참외 수박 호박을 너무 가깝게 심었다. 너무 촘촘하게 심는 것도 마음에 안 들었는데, 영역 다툼하면서 난장판이 될 게 뻔한 것을 하겠다고 하니 은근 부아가 솟구쳤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그렇게 아까우면 당신 머리 위에도 심으시구려!” 하고 쏘아붙였다. 내 말에 화가 난 남편이 그럴 수 있다면 그러고 싶다고 했다. 


 


 기온이 올라가면서 줄기가 뻗어 나가는데, 이건 아주 가관이었다. 토마토 위로 참외 줄기가 올라가 있고, 밑에는 수박 줄기가 뻗어 나갔고, 참외 줄기 위로 또 호박 줄기가 지나갔다. 토마토 위로 세 개 작물이 칭칭 감고 있어서 토마토를 딸 수도, 그렇다고 뽑아버릴 수도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나는 남들이 와서 볼까 봐 창피하다고 했다. 아닌 게 아니라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은 “아니, 농사짓는 땅이 작은 것도 아닌데, 얼마나 먹겠다고 욕심을 부리냐”고 했다.      


   


 

쉬어도 쉬는 것 같지가 않았던 삼일을 허비하고 밭으로 갔더니, 걱정했던 대로 캐어놓았던 땅콩은 통풍이 되지 않아, 상품성이 떨어져 우리나 먹어야 할 것 같았다. 그리고 캐지 않은 땅콩은 너구리 공격을 과하게 받은 티가 팍팍 났다. 나는 남편의 눈치를 살폈다. 모종도 아까워 빽빽하게 심었던 사람인데, 이 난리를 보고 가만히 있을 리 없기 때문이다. 학생주임 앞에 끌려온 문제 학생처럼, 유능한 부장 앞에 불려 나온 신입사원처럼, 불호령을 각오하고 서 있는데, 남편이 한숨을 가볍게 쉬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 뜸을 들인 후 아주 작은 소리로 말했다. “이럴 줄 알았어.” 오히려 작은 목소리라 더 뜨끔했다. 그리고 진심으로 돌쇠에게 미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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