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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경희 Apr 01. 2022

감사의 주고받음

혹실드의 책을 읽고

이제 대학교 2학년이 된 아들인 막내에게 말한다. “○○야, 아빠가 가사노동을 안 하시는데, 우리집이 평화로운 이유가 무얼까?” 막내는 모르겠다고 한다. 내가 말한다. “그건 말이야. 엄마가 겁이 많기 때문이야. 너도 엄마처럼 겁 많은 여자를 만나야 할 텐데.” 그렇게 말을 하고 나서 좀 있다가, 내 생각이 틀렸다고 생각한다. “아들아, 너는 엄마처럼 겁이 많은 여자를 만나지 마라. 용감한 여자를 만나라.”


최근에 혹실드(2001)의 책 ‘돈 잘 버는 여자, 밥 잘하는 남자’(백영미 역. 원저 The Second Shift by Arlie Russell Hochschild, 1989)를 읽었다. 논문 작성을 위해 읽은 책이며, 독일에서 공부한 김선영 박사가 소개해 준 책이다. 나는 이 책을 매우 흥미롭게 읽었다.

그동안 나는 우리 부부의 일상을 소재로 몇 편의 글을 썼다. 남편의 거친 말투, 투사 등의 방어기제, 늘 아내가 문제라는 프레임 등이 내게 어려움을 야기했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돈 잘 버는 여자, 밥 잘하는 남자’를 읽고서, 나는 새로운 관점을 갖게 되었고, 우리 부부의 문제를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가사분담을 둘러싼 부부간의 긴장이 우리 부부 문제의 중요한 부분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깨닫게 되었다.   

   

지연된 혁명(Stalled Revolution)     


혹실드는 변화한 여성과 변하지 않은 남성 및 사회 간의 긴장을 ‘지연된 혁명’이라고 부른다. 혹실드는 경제적 변화와 현재의 정체된 혁명 하에서, 맞벌이 가족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알고 싶어 했다. 맞벌이 가정을 찾아다니면서 연구를 시작했을 때, 집에서 누가 무엇을 하는가 하는 것이 혹실드의 첫 번째 질문이었다. 이런 첫 번째 질문은 남편과 아내의 가사분담에 관한 다양한 심도 깊은 질문들로 발전했다. 이런 질문들을 통해, 혹실드는 가족의 필요, 때때로의 평등에 대한 추구, 그리고 현대 결혼에서의 행복 사이의 복잡한 연결망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혹실드는 맞벌이 가정을 다각도로 비교하고, 가사분담에서 차이가 나는 이유를 탐구한다. 왜 어떤 여성들은 일 년에 한 달 더 일을 하는데 반해 다른 여성들은 그렇지 않은지, 왜 일부 여성은 한 달 더 일하는 데 만족하는 것처럼 보이는 반면 다른 여성은 깊은 불행을 느끼는지, 그리고 왜 어떤 부부는 가사분담을 하고 행복해하는 반면, 다른 부부는 가사분담을 하면서 비참해하는지 그 이유를 탐구한다. 맞벌이 부부에 대한 관찰과 인터뷰를 통해, 혹실드는 순전히 경제적이거나 심리적인 이유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발견한다. 점차적으로, 혹실드는 젠더 이데올로기가 각 남성과 여성 내에서 얼마나 깊은지 탐구해야 할 필요를 느꼈다.     


젠더 이데올로기(gender ideology)     


혹실드에 따르면, 각 개인의 젠더 이데올로기는 개인이 동일시하고 싶은 영역(가정 또는 직장)과 결혼생활에서 얼마나 많은 권력을 갖고 싶은지를(더 적거나 더 많거나 같은 양) 정의한다. 혹실드는 부부 역할에 대한 세 가지 유형의 이데올로기를 찾았는데, 전통적, 과도기적, 평등주의적 유형이 그것이다. 순수한 전통주의 여성은 비록 일을 하더라도, 집에서의 활동과 자신을 동일시하기를 바라며, 남편은 정체성을 일에 기초하기를 바라며, 남편의 힘보다 적은 힘을 원한다. 전통주의 남편도 마찬가지이다. 순수한 평등주의는 남편이 동일시하는 것과 같은 것과 동일시하기를 바라며 결혼에서 같은 양의 힘을 갖기를 원한다. 전통주의와 평등주의 사이에 과도적 유형이 있으며, 이는 전통주의와 평등주의의 다양한 형태의 혼합 중 하나이다. 혹실드에 따르면, 조사한 대부분의 부부는 과도적 유형이라고 한다.

혹실드에 따르면, 부부가 상이한 젠더 이데올로기를 가지는 경우, 이들 상이한 젠더 이데올로기 사이에 긴장이 발생한다. 부부의 상이한 젠더 이데올로기가 충돌하는 경우, 무엇이 ‘희생’인지에 대해 서로 다른 생각을 하게 된다. 젠더 이데올로기는 개인의 정체성에 영향을 미치며, 한 개인이 자신의 정체성을 어떻게 형성하는가 하는 것은 어떤 것이 선물로 보이고 어떤 것은 그렇지 않은지에 영향을 미친다. 부부가 갈등을 겪을 때, 단순하게 누가 무엇을 할지를 두고 싸우는 일은 드물다. 오히려 많은 경우에 감사를 주고받는 일 때문에 부부는 싸운다.     


젠더 전략(gender strategy)     


 전략은 젠더에 대한 문화적 개념 하에서,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시도하는 행동 계획이다. 혹실드에 따르면, 사람들은 자신의 젠더 이데올로기를 실생활에 적용하려 할 때,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젠더 전략을 추구한다. ‘전략’은 한 사람의 행동 계획과 그것을 추구하기 위한 감정적 준비 모두를 가리킨다. 혹실드는 젠더 이데올로기의 균열, 생각과 감정 사이의 갈등, 그리고 내적 필요나 외적 조건이 이상적인 여성상 혹은 남성상에 자신을 맞추는 일을 어렵게 만드는 상황에서 젠더 이상형에 맞추기 위해 필요한 감정적 작업을 파악하려고 애썼다. 혹실드 책에 소개되고 있는 젠더 전략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전통주의 젠더 이데올로기를 갖고 있는 여성이, 남편에게 가사 분담을 요청할 때, 자신이 세금 계산을 할 줄 모르니 도와달라고 함으로써, 자신의 전통적인 여성상을 고수하려는 모습도 일종의 젠더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남편의 가사분담 정도     


혹실드에 따르면, 맞벌이 가정의 남편이 가사를 어느 정도 분담하는가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은, 부부의 젠더 이데올로기, 가정의 경제 형편,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이러한 것들을 일치시키기 위해 이용하는 부부의 젠더 전략 등이다.     


혹실드의 연구를 통해서, 남편과 나 사이의 긴장을 제대로 들여다볼 수 있었다. 혹실드의 이론에 근거해 분석해보면, 우리 부부는 감사의 교환에서 실패했다.

우리 부부의 젠더 이데올로기를 보면, 부부 모두 전통주의와 평등주의를 모두 갖고 있지만, 남편의 젠더 이데올로기는 비교적 전통주의가 강하고, 나의 젠더 이데올로기는 비교적 평등주의가 강하다고 생각된다. 이런 상이한 젠더 이데올로기는 무엇이 ‘선물’이고 무엇이 ‘희생’인지에 대한 상이한 해석을 가져온다. 남편은 아내인 내가 대학원을 다니도록 지원했고, 그 이후 일을 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아내의 학업과 그 이후의 커리어는 남편 입장에서는, 남편이 내게 준 커다란 선물인 것이다. 그리고 남편 입장에서는 남편이 준 그런 선물에 대해 아내인 내가 응당 감사를 표해야 했다. 그리고 아내가 차린 근사한 밥상과 청소가 가장 큰 선물이라고 남편은 생각할 것이다. 그런 남편의 입장에서는 내가 차린 밥상은 빵점이고 실망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청소를 미루는 아내에게 화가 날 것이다.


한편, 평등주의자 아내인 나의 입장에서는, 나의 학업과 커리어에 대한 남편의 지원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니 남편이 기대하는 만큼의 감사를 표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그러니 남편 입장에서는 자신이 마땅히 받아야 하는 감사를 아내로부터 받지 못했고, 서운했겠다. 그리고 남편 입장에서는, 결혼 후 줄곧 직장생활을 충실히 하여 가정 생계를 책임졌다. 남편 입장에서는 역시 아내인 내게 커다란 선물을 준 것이다. 그런데, 아내인 나는 남편의 큰 선물을 받고도 감사를 표하지 않았다. 평등주의 아내인 나의 관점에서는 남편이 가사노동을 함께 해야 하는데, 남편이 가사노동에 소홀한 점이 미웠고, 남편에게 서운함을 느꼈다.

 

한편 나는 세 아이를 낳고 기르면서, 힘겹게 대학원 공부를 하고 박사학위를 받고, 일을 해서 돈을 벌었다. 그러면서 가사노동을 거의 전담하였다. 나는 가사노동을 혼자 해 내면서 가정에 경제적 기여도 하였으니 나는 어느 정도 희생을 한 것이고, 나는 남편에게 선물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내가 준 선물에 대해서 한 번도 감사를 표하지 않는 남편에게 서운함을 느낀다. 그동안 희미하게나마 느끼고 있었지만, 혹실드의 책을 통해서 확실히 알게 되었다. 우리 부부가 각자 나름대로 열심히 살면서도 왜 서로를 원망하고 미워하고 가정에 항상 긴장감이 감돌았는지를. 우리 부부는 감사를 주고받는데 실패했던 것이다.


혹실드의 책에는 남편이 가사분담을 하고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 두 쌍의 부부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다. 그중의 한 부부는, 처음에는 남편과 아내가 공평하게 가사를 분담하지 않았지만, 이후 아내가 2달간의 가출로 가사분담을 요구하고 남편이 이를 받아들임으로써 행복한 생활을 하게 된 사례가 소개되고 있다. 그 사례의 아내는 이혼을 불사하고 자신의 요구를 용감하게 한 것이다. 돌아보면 내게는 그런 용기가 없었다. 남편에게 강하게 가사분담을 주장하지도 못하면서, 가사를 분담하지 않고, 식사 후 숟가락을 싱크대에 갖다 두는 정도의 가사분담도 해주지 않는 남편을 보면서 매일매일 부들부들 떨었다. 나는 순응형이어서, 남편의 생각을 거스르는 말과 행동을 하지 못했지만, 가사를 분담하지 않는 남편에 대해서 끊임없이 마음속으로 분노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저녁식사 후 내가 설거지를 하면서도 나는 속으로는 부글부글 끓고 있었던 것이다.


막내에게 말하고 싶다. 엄마처럼 겁 많은 여자를 만나면, 겉으로는 가정에 평화가 있지만, 속으로는 부글부글 끓는 아내와 아내의 그런 분노를 감지하는 남편의 불안함으로 한시도 평화로울 수 없는 가정을 가지게 될 것이라고.  차라리, 강하게 공평한 가사분담을 요구할 수 있는 용감한 여자를 만나고, 너도 기꺼이 공평하게 가사분담을 해서, 진정으로 행복한 가정을 꾸리라고 말하고 싶다. 또는 남자인 네가 먼저 공평한 가사분담을 실천해서, 굳이 여성이 용기를 발휘해서 가사분담을 요구하지 않아도 되는 행복한 가정을 꾸리라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우리 부부의 문제로 돌아가서, 성공적인 ‘감사의 주고받음’이 필요하다고 하겠다. 남편이 내게 준 선물을 선물로 인정해야겠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 최선을 다해준 남편에게 고마움을 충분히 표해야겠다. 그리고 아내인 나의 학업과 커리어를 위한 배려에 진심으로 감사해야겠다. 그리고 남편이 내게 해 주었으면 하는 일은 공평한 가사분담이다. 그리고 우선적으로 해 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것은, 내가 차린 식탁에서, 내 부족한 점(예를 들면 요리의 맛, 썬 두부의 크기, 썬 파의 크기)을 지적하기 전에, 내가 기울인 노고를 먼저 읽어주고 인정해주고 감사를 표해주면 좋겠다. 혹실드에 따르면, 좋은 소통이 의미하는 것은 가족을 위해 하는 작은 일들에 부부가 감사를 잘 표시하는 것을 의미한다. 혹실드가 본 가장 행복한 맞벌이 부부는 이전의 전업주부-어머니의 역할을 여성에게 떠넘기지 않고 부부가 분담하는 부부라고 한다. 앞으로 우리 부부는 그동안의 실패를 만회할 수 있을까? 최근에 좋은 신호가 있다, 남편이 빨래를 넌다는 것이다. 고마워요.          


<참고문헌>     

혹실드, 알리 러셀(2001). 돈 잘 버는 여자 밥 잘 하는 남자(백영미 역. 원저 The Second Shift by Arlie Russell Hochschild, 1989). 도서출판 아침이슬.

Hochschild, Arlie (1989). The Second Shift. Penguin Boo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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