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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희미 Jun 17. 2021

크루엘라(2021) 리뷰


요즘은 넷플릭스, IPTV 같은 스트리밍 서비스가 활발해져서 집에서 영화 보는 사람이 더 많을 것 같지만 나는 영화관에 가는 걸 참 좋아한다. 영화관이라는 공간이 주는 특유의 느낌이 있고, 한 자리에서 하나의 이야기를 끊김 없이 끝까지 함께하다 보면 몰입과 집중도 더 잘 된다. 영화가 아무리 마음에 안 들어도, 아무리 구려도 화장실이 너무 급해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아닌 이상 영화관에서는 절대 도중에 나오지 않는다.

 

몇 년 전만 해도 한 달에 영화 열 편씩 보고, 봤던 것도 좋으면 여러 번 다시 봤다. 이젠 여러 이유로 그때만큼 자주 영화관을 찾지 못한다. 데믹 이후로 영화관들(특히 소규모 독립영화관들)은 어려운 실정이겠지만, 사실 그 전부터도 부실한 서비스에 비해 야금야금 올라가는 티켓값이 부담스러웠다. 요일, 시간대별 차등 요금제 진짜 아직도 어이가 없다. 대체 금요일에 왜 주말 요금을 받나요…? 아무튼 영화관에 자주 가지 못하는 이 상황이 참 아쉽다.


간만에 영화관 가서 즐겁게 봤던 영화, 디즈니의 <크루엘라>(2021). 두 번 관람했다.


6월 17일 현재 로튼토마토 지수


내 스코어는 7.5/10 가볍게 즐기기 좋은 영화였다. 최근 봤던 디즈니의 실사화 영화들 중에 기억에 남는 수작이 그닥 없었던 것 같은데(충격적으로 노잼이라 기억에 남은 작품은 있음….) 이번 <크루엘라>는 나름 선방한 작품 아닌가 싶다. 리뷰니까 당연하지만 아래부터 시작될 내용에는 스포일러가 다량 포함되어 있다.






*리뷰에 사용된 모든 스틸컷의 출처: Images | DMED Media (disney.com)

디즈니 영화에서 무엇을 기대할 것인가


감상은 주관적이므로, 같은 영화를 봐도 누군가는 재미있게 보고 누군가는 실망할 것이다. 관객 각자의 취향 차이도 있을 거고 특정한 기대 요소들이 있었는데 영화가 그것들을 충족시키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나는 나름 최근에 나온 디즈니 실사화 영화들을 이것저것 챙겨 봤다고 생각는데(당장 떠오르는 것만 해도 신데렐라, 미녀와 야수, 시간의 주름, 말레피센트, 앨리스, 곰돌이 푸, 알라딘, 라이온킹 등등 많다) 영화관에서든 스트리밍을 통해서든 다시 본 영화가 없어서…. 즉, 딱히 아 이건 꼭 다시 봐야지! 라는 생각이 드는 작품이 없고 오히려 아 이건 안 보는 게 나았겠다 싶은 것들이 몇몇 있어서 디즈니 실사화 영화에 별 기대치가 없는 상태였다.


그리고 제작사가 디즈니라는 건 이 영화가 딱히 어른 입맛에 맞춰 제작되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디즈니는 어린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애니메이션 제작사 아닌가. 스크롤을 올려서 위에 첨부한 로튼토마토 지수를 한번 다시 살펴보라. 영화 장르가 코미디/키즈&패밀리로 구분되어 있다. 말 그대로 가족 단위 관객을 타겟팅한 영화니까 다 큰 어른이들이 보기에 다소 유치하고 중2병스럽고 전달하려는 메시지가 지나치게 도식화/이분법화되어 있다고 해도 그러려니 납득하게 되는 것이다.



이 영화의 주인공 크루엘라는 엠마 스톤이 연기했다. 굵직한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아이코닉한 배우다. 저 파격적이고 다크한, 만화에서 그대로 튀어나온 빌런인 듯 강렬한 비주얼(세계를 뒤집어 놓았던 마고 로비의 할리 퀸이 생각난다)이 인상적이긴 하지만 어쨌든 디즈니 영화기 때문에 처음 영화관에 들어갈 때부터 뭐 그렇게까지 극악무도한 캐릭터는 아닐 거라 생각했다.


나는 좀 되바라진 어린아이였기에 디즈니를 유치하다고 생각해서 거의 접하지 않다가 오히려 머리가 좀 크고 나서 자주 봤다. 그래도 디즈니가 워낙 유명하다 보니 101마리 달마시안 이야기를 분명 언젠가 들어본 것 같은데, 원작 애니메이션을 본 적은 없다. 원작에 대한 배경지식 없이 <크루엘라>를 그냥 독립된 하나의 영화로 감상했다는 말이다. 같이 보러 갔던 친구가 말해 주길 크루엘라가 원래는 달마시안의 피부 가죽을 벗겨서 코트를 만드는 무시무시한 악역이었다고 한다.


과거의 작품을 리메이크한다고 할 때, 제작자들은 절대 기존 작품의 단순한 재현을 기획하지 않는다. 리메이크 작품은 항상 그것이 제작되는 시대상을 민감하게 반영한다. 이게 어떻게 보면 원작을 좋아하는 팬들에게 섭섭할 수도 있지만 시대는 날이 갈수록 변하고, 작품을 보는 사람들의 관점도 새로워지니까 제작자들 역시 이전과는 다른 시각으로 작품에 접근하는 게 합리적이고 타당한 일이다. 물론 모든 리메이크가 다 그렇다는 건 아니고 시대착오적인 리메이크작도 많다. 그러면 원작 팬들은 매우 만족할지도 모르지만 원작을 잘 모르는 관객들은 이거 너무 올드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평론가들에게 이럴 거면 리메이크 왜 하냐? 라는 혹평을 받을 수도 있기 때문에 여러모로 제작자는 리메이크작 만들기 전에 고려할 사항이 참 많을 것이다.


“사람들은 빌런의 존재를 믿고 싶어하니까.”


달마시안 가죽 벗겨다 코트 만드는 과거의 크루엘라는 진짜 잔인한 빌런이었겠지만, “저 가죽으로 코트 만들면 죽이겠다”라고 말은 하면서 실행하지 않는 2021년의 크루엘라는 솔직히 빌런보다 안티히어로에 가깝다.


그래서 끝내주는 빌런 영화를 기대하고 이 영화를 본다면 실망할 수 있다. 흑백 파티에 다녀온 밤 이후, 크루엘라는 ‘두 번째 인연’(2nd Time Around) 구제샵에 들러 아티에게 자신의 복수를 도와달라고 부탁한다. 아티는 그녀가 간밤 남작 부인의 흑백 파티를 망친 주범임을 알아보고, 크루엘라는 자신이 에스텔라임을 고백한다. 아티가 “아! 당신이었군요. 세상에. 오늘 정말 멋진데요.” 이렇게 얘기하니까 크루엘라가 약간 멋쩍어하며 “사람들은 빌런의 존재를 믿고 싶어하니까요” 뭐 이런 대사를 한다.


상당히 의미심장한 대사인데, 크루엘라는 사실은 죽은 어머니(캐서린)의 조언대로 착하게 열심히 살아가고 싶었던 에스텔라이며 처음 어머니와 함께 차를 타고 런던으로 갈 때 이제 사고 덜 치고 얌전해지겠다는 약속까지 했었다. 만약 캐서린이 죽지 않았다면, 천재적인 재능을 지닌 에스텔라가 디자이너로서 성공하고 승승장구했다면, 크루엘라라는 또 하나의 에스텔라는 등장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반대로 ‘천사처럼 착한’ 캐서린이 남작 부인의 아기를 맡아서 기르지 않았다면 애초부터 에스텔라라는 나름 착실한 인격은 형성되지 않고 남작 부인처럼 사이코패스에 잔인한 성정을 지닌 크루엘라만 존재했을지도 모른다.

 

에스텔라와 크루엘라라는 두 가지 자아가 공존하게 된 이상, 크루엘라는 완벽하게 선하지도 완벽하게 악하지도 않은 이중적인 인물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크루엘라는 사람들이 믿고 싶어하는 온전한 빌런(인간성과 자비심 없는 순수악)도 아니고 사람들이 마음 편히 응원할 수 있는 선한 주인공도 아니다.


인물의 매력은 바로 그 이중성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나름 착실한 면도 있지만 어쨌든 남의 지갑이나 터는 좀도둑 즉 범죄자고, 온갖 사고를 치지만 누구나 납득할 법한 대의명분(악행에 대한 복수)을 지니고 있다. 흑백이 반씩 섞인 헤어스타일처럼 선한 면과 악한 면을 각각 반씩 지녔기에 캐릭터가 입체적이고 매력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빌런에게 서사를 주지 말라?


이런 말이 어떤 우려에서 나오는지 안다. 빌런은 나쁜 짓을 하니까 빌런이고, 악행에는 응당 처벌이 뒤따라야 하는 법이다. 이런 권선징악적 메시지는 수천 년간 유효했던 클리셰이며 현대에도 여전히 필요하다. 세상에는 나쁜 짓을 하고도 떵떵거리며 사는 사람들이 아주 많다. 심지어는 그걸 자랑스러워하기까지 한다. 미디어는 그게 꼴불견이고 인간으로서 하면 안 되는 행동이라는 걸 똑바로 알려줄 윤리적 책임과 의무가 있다. 우리는 모두 질적 도덕적으로 더 향상된, 더 나은 사회에서 살고 싶지 않은가. 꼴불견들과 안하무인들은 늘 존재하지만 그런 것이 잘못된 행동이라고 짚어 주고 비슷한 부류를 양산해 내지 않도록 하는 건 정말 중요한 일이다. 특히 아이들이 보는 매체에서는 더더욱 작품이 주는 메시지와 방향성을 민감하게 고려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런에게는 서사가 필요하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모든 캐릭터에게는 서사가 필요하다. 아마 어떤 어떤 작법서를 읽든 비슷한 소리를 할 것이다. 사람들을 매혹시키는 이야기에는  치열한 갈등이 존재하고, 그 갈등에서 프로타고니스트(주인공)의 척점에 서 있는 안타고니스트(반동인물)가 강력하면 강력할수록 전개가 흥미진진해진다. 캐릭터를 강력하게 만들려면 당연히 그 캐릭터에게 서사를 부여해야 한다. 캐릭터를 덩그러니 던져 놓고 얘는 엄청 나쁘다! 짱 쎄다! 이렇게 말한들 아무도 납득하지 않는다. 그 캐릭터의 말과 행동, 그 말과 행동을 하게 된 계기와 배경을 서사로 제시해 줘야 한다.


악역, 즉 빌런을 다룰 때 중요한 것은 그렇게 서사를 제시하되 캐릭터의 악행을 미화하지 않는 것이다. 나는 빌런에게 서사를 부여하는 일 자체가 미화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서사의 내용은 중요하다. 예를 들어 어릴 때 개에게 물려 트라우마가 생긴 빌런이 있고, 그 빌런이 트라우마로 인해 개를 학살하는 범죄자가 됐다고 치자. 이때 과거에 개에게 물렸다는 서사는 캐릭터가 왜 그와 같은 악행을 했는지에 대한 개연성을 부여한다. 그러나 개연성이 곧 정당성은 아니다. 그의 개 학살이 작품 내에서 정당화되어서는 안 된단 말이다. 프로 작가가 빌런 서사를 악행 정당화 수단으로 쓰거나/연출한다면 직업 윤리 부재와 역량 부족을 의심해 보자.


크루엘라는 엄마를 비극적으로 잃어버린 후 좀도둑이 된다. 이것은 그녀가 처한 상황에서 생존을 위해 불가피한 선택이었지만, 끊임없이 “엄마(캐서린)는 내가 이렇게 되길 바라지 않았을 것이다” 라는 메시지를 관객에게 전달한다. 도둑질은 악행이고 원래는 하면 안 되는 범죄니까. 반대로 이 영화의 안타고니스트인 남작 부인은 살인을 비롯한 자신의 모든 악행에 아무런 회의감도 느끼지 않는다. 그녀는 극도의 나르시스트로 자기 자신의 행복과 성공만을 바라고, 거기 방해되는 것들은 범죄든 뭐든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치워 버릴 뿐이다. 그래서 남작 부인은 복수를 당해 감옥에 간다. 전통적인 권선징악 클리셰의 실현이다.


“난 말이죠, 탁월하게 태어났고, 날 때부터 나빴고, 좀 돌았어요. 하지만 당신을 사랑해요. 난 그 여자랑 달라요.”


위에서 언급했듯이 만약 캐서린이 크루엘라를 데려다 키우지 않았더라면 크루엘라는 어쩌면 남작 부인과 다름없는 모습으로 자라났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캐서린 덕분에 크루엘라는 자기만 아는 게 아니라 남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으로 자란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이 있듯, 남작 부인의 피를 타고난 크루엘라가 캐서린처럼 착해질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친모와 같은 절대악이 되지는 않았던 것이다. 바꿔 말하면 크루엘라는 캐서린이 바라던 모습도 남작 부인이 바라던 모습도 아닌 제3의 모습, 자기 자신으로 존재한다.


이처럼 나 자신으로 존재하면서 치열하게 삶의 돌파구를 찾으려는 캐릭터라는 속성은 제작진이 크루엘라라는 캐릭터를 리메이크하면서 재해석하고 고민한 결과일 것이다.


이 리젠트 파크 독백씬은 보면서 전율이 느껴졌던 명장면이다. 내가 엠마 스톤 필모그래피를 많이 본 건 아닌데 봤던 영화를 다 통틀어서도 손꼽히게 연기를 잘한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난 <라라랜드>를 참 재밌게 봤지만 미아라는 배역이 엠마 스톤과 그닥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크루엘라는 정말 찰떡같이 잘 어울린다.


“남들은 신경쓰지 마. 내가 남들을 신경썼으면 다른 재능 많은 여자들처럼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진작 죽었겠지.”


사실상 이 영화의 진짜 빌런인 남작 부인은 엠마 톰슨이 연기했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메릴 스트립, 미란다가 생각나는 배역이다. 노련한 배우답게 우아하면서도 카리스마 넘치는 연기가 일품이었다. 에스텔라가 밤새 나방 알을 꿰매 가며 하우스 오브 바로네즈의 새로운 시그니처 드레스를 완성한 뒤, 두 사람은 술집으로 자리를 옮겨 대화를 나눈다. 이때 남작 부인은 에스텔라에게 “너도 네 브랜드를 만들 수 있. 문제는 너에게 킬러 본능이 있느냐이지” 뭐 대략 이렇게 말한다.


내 브랜드를 만드는 것과 소위 ‘킬러 본능’ 사이에 무슨 상관관계가 있을까. 이건 남을 짓밟고 죽여야 내가 살아남는다는 전형적인 빌런식 사고방식인데, 앞의 대사를 통해 이런 식으로 짓밟히고 사장당한 여성이 많았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줌으로써 그런 사고방식을 갖게 된 계기를 자연스럽게 설명해 준다. (물론 이 캐릭터는 병적인 나르시스트이자 사이코패스라는 빌런에 최적화된 설정까지 갖고 있다. 이런 요소들이 겹치면서 시너지를 내는 것이다) 매력적인 캐릭터에게는 이처럼 명백하게 납득가능한 서사가 있다. 빌런들이라고 결코 무조건 헛소리를 내뱉으며 악행을 저지르지 않는단 말이다. 관객 입장에서는 빌런들이 다 맞는 말만 하는 것 같고, 그들의 의견에 동의할 수도 있다.


빌런들은 항상 대략 이런 식으로 사고하고 행동한다: 인간들이 바다를 오염시키니까 인간들을 몰살해야겠다! 인구가 너무 많아서 지구가 아프니까 지구를 구하기 위해 인류를 반으로 줄여야겠다! 여기서 ‘인간들에 의한 바다 오염이 문제가 된다’라는 명제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이건 빌런도 히어로도 평범한 사람도 다 똑같이 느끼는 문제의식이다. 다만 평범한 사람은 해결할 의지나 능력이 없고, 히어로는 적법하고 도의적인 방법으로 해결을 보려고 하고, 빌런은 어떻게 보면 가장 본질적이면서도 가장 과격한 방법으로 해결을 보려고 한다. 평범한 사람이나 히어로가 그 본질적이고 과격한 방법을 몰라서 안 하는 게 아니다. 그렇게 해결하면 안 되는 여러가지 이유들이 있고 그 이유들을 존중하는 것이다. 빌런은 존중하지 않는 것이고.



크루엘라-남작 부인의 대결 구도는 신파를 약간 끼얹은 상투적인 클리셰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만들어진 갈등이며, 이해하기 쉽고 스토리텔링의 원칙에 충실한다. 가족들이 다함께 보는 디즈니 영화인 만큼 이렇게 기본을 지켜 주는 게 안전한 선택이면서 전략적인 선택이었을 것이다. 패션계라는 소재를 십분 활용해서 기본 구조 위에 튼실한 볼거리를 얹어 주었으니 오락 영화로서는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가끔 얼레벌레 넘어가는 설정 구멍도 크게 거슬리진 않는다.


빠지지 않는 가족의 중요성


사실상 크루엘라의 삶 전반을 함께했던 진짜 가족은 좀도둑 동료였던 재스퍼, 호레이스다. 자신을 거둬주고 리버티 백화점에 들어갈 수 있게 도와준 은인이기도 한데 복수에 눈이 먼 크루엘라는 그들을 함부로 대하고 등진다. 그러면 안 돼요, 여러분. 어떤 상황에서든 내 주변에 있는 사람을 소중히 여깁시다. 라는 지극히 디즈니스럽고 교훈적인 메시지는 이번에도 역시나 반복된다.



남작 부인의 재산과 저택을 합법적(?)으로 가로채면서 ‘헬 홀’의 주인이 된 크루엘라 드 빌. 악마가 사는 지옥이라기엔 너무나 호화롭고 찬란하고 반짝반짝한 집에다, 남작 유산도 상속받고, 마크 스트롱 같은 핫한 집사도 있고, 내가 보기엔 천국 같던데…. 어쨌든 과거의 악연과 상실을 뒤로 하고 이제 여기서부터 크루엘라의 미래가 시작됩니다~ 로 마무리되는 기분 좋은 결말이다. 난 마지막에 크루엘라가 엄청 유쾌하게 웃으면서 끝날 줄 알았더니 아니었다. 그냥 옆에서 재스퍼가 이렇게 물어본다. “이제부터 어떻게 할 거야?” 이에 크루엘라는 “나한테 아이디어가 있어”라고 대답한다.


새로운 날, 새로운 인연, 뭐가 됐든 다가올 새로운 사건을 암시하면서 끝맺어지는 크루엘라의 이야기. 현재의 행운과 행복에 안주하며 웃는 대신 근엄 진지한 무표정으로 미래를 계획하는 그녀를 많은 분들이 큰 스크린 속에서 만나 뵙길 바란다. 크루엘라의 두 친구, 입생로랑 닮은 제프리, 아니타 달링, 쿠키의 주인공 로저, 섹시한 집사 존, 재간둥이 아티 등등 조연들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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