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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숙 Jul 16. 2021

강아지 소동


  연수를 마치고 집에 돌아왔다. 도교육청에서 주관한 중등교감 역량강화 연수였다. 연수에 참석하지 않았다면 이 시각 학교에서 방과 후 근무 중일 것이다. 방과 후 근무는 고등학교 교감으로 부임하면서 거의 일상이 되었다. 저녁 10시 무렵에 끝났기 때문에 해거름에 퇴근했던 일이 언제였는지 잠깐 멍한 상태로 돌아보았다. 갑자기 무주공산 같은 마음의 여백이 찾아왔다. 직장과 가족에게서 분리된 예상치 않은 자투리 시간이 생겼다. 홀가분하면서도 뭔가 익숙하지 않은 헛헛함이 교차하였다. 그렇다면 오랜만에‘메롱이와 산책하러 갈까? ’     

  간편한 복장을 갖추고 나갈 준비를 하였다. 영리한 메롱이는 내가 자기와 나갈 것을 벌써 알아차렸다. 밖으로 나가는 것이 매우 신난다는 듯 요란한 퍼포먼스 한판을 벌였다. 거실에서 현관 쪽으로 펄쩍펄쩍 뛰어오르다가 핑그르르 맴을 돌기도 하였다. 꼬리가 끊어질 듯 격렬하게 흔들며 외출을 환영하는 세리머니를 하였다. 하얗고 풍성한 꼬리털이 풍물패의 상모에 붙은 부포가 산들바람에 나부끼는 것 같았다. 그뿐만 아니었다. 성견이 다 되었다는 듯 뱃심 있게 우렁우렁 짖기도 하였다. 평소에는 거의 짖지 않아서 장애가 있나? 하고 의심했던 적도 있었는데 기우였다. 콧바람을 ‘슁슁’ 불며 어서 나가자고 보챘다. 그런가 하면 아주 작은 목소리로 어리광을 부리듯 들떠 “앵앵” 소리를 냈다.     

  겨우 달래듯 진정시켜 목줄을 채우고 집을 나섰다. 엘리베이터 안에서였다. 웬일인지 안아달라는 신호를 보내듯 내 눈을 올려다보았다. 드문 일이었다. 안고 보니 7~8kg은 됨직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컨디션이 좋지 않나 생각했는데 밖으로 나가니까 일없었다는 듯 잘 걸었다. 모처럼 함께 나가니 표현하고 싶은 것들을 다 드러내는 것 같았다. 화단 가 쥐똥나무 울타리 밑에서는 영역 표시 겸 실례도 빼먹지 않았다.      

  우리는 아파트 단지 내를 기분 좋게 걸었다. 메롱이는 무엇이 좋은지 촐랑촐랑 앞서 걷다가 되돌아와서 어서 따라오라는 듯 기다렸다 다시 걸었다. 털들을 몽글게 깎아 몽실몽실한 뒤태가 뒤뚱뒤뚱하거나 씰룩씰룩 걸어갈 때마다 의기양양하였다. 빠르고 경쾌한 비트의 리듬감이 느껴졌다.

  아파트 단지 내 대추나무에는 울툭불툭 대추가 커가고 있었다. 산책하던 주민들이 맛보기로 하나둘씩 따갔는지 나무의 중간 위로만 불긋불긋하였다. 그래도 다가오는 가을을 느끼게 할 만큼 상당수 달려 있었다. 대봉감은 별 재미가 없어 보였다. 올여름의 폭서 때문이었는지 익기도 전에 많이 곯아서 떨어져 버린 것 같았다. 나무 꼭대기 부분에 몇 개씩만 끄트머리가 주황빛으로 익기 시작하고 있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좁은 아파트 단지나마 산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중이었다. 옆 통로에서 물개처럼 생긴 미끈하고 까만 생물체가 출몰하였다. 자세히 보니 다리가 짧고 몸체가 긴 닥스훈트  종의 강아지였다. 아주 다부지고 몸놀림이 민첩해 보였다. 귀는 양옆으로 늘여져 나풀거렸고, 얼핏 보아 6~7kg 정도는 되어 보였다. 매끈하기도 하고 탄탄하게도 보였다. 그 강아지는 아파트 현관을 빠져나와 메롱이를 향해 쏜살같이 돌진하였다. 마치 사냥감을 발견한 매의 돌격이라고 해야 할까? 격한 반가움의 표시인 것 같았는데 메롱이는 자신을 공격하는 것으로 판단했는지 혼비백산하였다. 그리고는 오던 길로 인정사정없이 내달렸다.      

  순식간에 놀라 당황한 나도 메롱이를 따라 필사적으로 뛰면서 목줄을 잡아당겼다. 그러나 허사였다. 조그만 강아지의 어디에서 그런 힘이 났는지 초능력이 일어난 것 같았다. ‘아차’ 하는 순간 목줄을 잡고 있던 내 왼손 두 번째 손가락과 세 번째 손가락 사이에 따가운 통증이 있었다. 불에 댄 것 같기도 했다. 아 이게 아닌데? 줄을 놓아야 하나? 더 당겨야 하나?’ 하고 갈등하는 찰나 어떻게 했는지 메롱이는 목줄 밖으로 머리통을 뺀 후 달아나고 있었다. 그 기름기 느글거리듯 멀쑥한 강아지도 계속 달려 메롱이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미끈한 강아지를 앞세우고 느긋하게 따라 나오던 주인 여자에게 나는 다급하게 소리쳤다. “댁의 강아지 좀 제지 시키세욧!” 하지만 그녀는 태연했다. 남의 강아지가 놀라 줄행랑을 치든 말든 느릿느릿 걸어 나와 손에 든 목줄을 흔들며 말했다. “개는 항문에 대고 냄새를 맡으며 인사한대요. 저 애를 아니까 천천히 온 거예요. 사냥개예요.” 하고 동문서답이었다. “인사하는 것이지 물거나 하지는 않아요.” 묻지도 않은 말까지 한술 더 떴다.

  놀라서 정신 못 차리고 내달리는 강아지의 모습과 목줄에 손가락이 잘릴 뻔한 상황을 보고도 자기 할 말만 하는 사람을 보니 이웃이라기보다 야속했다. 울컥한 마음에 번드르르 잘생긴 개도 밉고 주인 여자는 더욱 꼴사나워 보였다. 하여 뒤에다 대고 괜한 공염불만 흩뿌렸다. “목줄 채워서 데리고 나오세요.”     

  한동안 집 반대 방향으로 마구 내달리던 메롱이가 무슨 깨달음이 있었는지 휙 돌아서 나에게로 달려왔다. 가슴팍으로 뛰어올라 네 발을 사정없이 버둥거려 저으며 어깨 위까지 기어올랐다. 심장이 터질 듯 쿵쾅거렸고 숨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거칠었다. 

  평소에 ‘엄마는 혼자 메롱이 데리고 나가지 마세요.’라고 했던 딸아이 말을 귓전에서 날렸다가 난감하기 이를 데 없는 소동을 경험하였다. 설마 강아지 한 마리 어쩌지 못할까 했는데 절체절명의 순간이라고 판단된 때 발휘되던 괴력은 내 오만했던 행동에 경종을 울렸다.     

  딸아이 덕분에 어쩌다 우리 집에 오게 된 포메라니안 메롱이는 전체적으로 크림색인데 등허리 부분의 황금빛 털이 돋보이는 강아지이다. 사람도 살기 어려운데 강아지까지 데리고 왔다고 딸아이를 나무라기도 했는데 이럭저럭 함께 산 지 벌써 5년이 되었다. 

  어려서부터 사람과 함께 살아서인지 사람에게는 엄청 친화력이 좋다. 그런데 걷다가 길고양이만 봐도 엉덩이를 뒤로 빼고, 비둘기만 내려앉아도 발걸음을 멈추었다. 저보다 작은 강아지가 반갑다고 ‘앙앙’ 대도 네 다리를 땅에 꽂듯이 버티며 절대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 영역의 사회성을 기르지 못한 메롱이에게 사실 검은 슈트 차림의 잘난 이웃은 개 발의 편자이거나 공포의 대상일 뿐이었다.      

  집에 돌아온 메롱이는 평정심을 되찾았는지 잠이 들었다. 엉겁결에 일어난 소동에 민첩하게 대처하지 못하고 역정만 낸 소심한 나를 되돌아본다. 목줄에 패인 손가락이 마음만큼이나 욱신욱신 쓰라리다. 만능 연고라도 찾아보아야겠다. 그런 다음 이웃집 강아지 탓만 하지 말고 메롱이의 삶에 주목해 보아야겠다. 목줄 장비를 안전 장구로 마련하자고 딸아이와 상의해야겠다. 마구 달아나다가 되돌아왔기에 망정이지 자동차 길이든 어디든 뛰어서 달아났다면 어찌 되었을지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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