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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은지 피디 Sep 27. 2024

콘텐츠 제작자가 팬덤을 사로잡아야 하는 이유

<N콘텐츠 매거진> 편은지 PD 칼럼 기고

콘텐츠 제작자가 팬덤을 사로잡아야 하는 이유


요즘 팬은 ‘최애’를 위한 ‘덕질’에 능동적으로 나서며 이를 콘텐츠로 만들어 공유한다. 콘텐츠 창작자들은 이렇게 급변하는 콘텐츠 소비문화에 대응하기 위해 어떻게 노력하고 있을까? 30여 년 동안 덕후 생활을 하고 있는 KBS 편은지 PD의 의견을 들어보았다.

©Shutterstock

교복을 입은 여학생들이 노랑 풍선파와 하얀 풍선파로 나뉘어 서로를 노려본다. 드라마 <응답하라 1997>의 한 장면으로 기억할 수 있겠지만 이 장면은 90년대 말 팬들의 실제 모습이었다. 요즘 팬들의 모습과 다르게 발목까지 내려오는 우비를 입고 우르르 몰려다녔기에 팬 집단이라는 것을 한눈에 식별할 수 있었다. 이들은 왜 마치 군대에서 군복을 통일해서 입듯이 개성보다는 일관성을 택했을까? 그것도 한참 감수성 민감한 중·고등학생들이 말이다.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당시의 대중문화계와 기획사가 대중문화 수용자인 팬들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팬클럽에 유료 가입을 해도 일괄적으로 우비와 회원 카드가 담긴 박스가 배송되는 것으로 끝이었다. 당연히 문화 수용자인 팬들의 패턴과 데이터 수집에는 관심이 없었고, 팬 활동에 관련된 정보를 주려는 시도 또한 하지 않았다. 그 시절 팬들이 받아볼 수 있는 정보는 일방향의 음성 사서함이 전부였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이렇게 수용자로서의 팬은 세세한 정보를 제공받지 못한 채 한정된 자원 속에서 수동적인 팬 활동을 이어갈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최근 상황은 이때와 크게 다르다. 현재 엔터테인먼트사는 물론 아티스트 스스로 유튜브, 인스타그램의 라이브 방송을 이용한 팬들과의 실시간 소통을 중시하는 것은 이제 기본 중의 기본이다. 거기에 버블이나 위버스 같은 플랫폼으로 실시간으로 팬들과 소통하고, 가령 아티스트의 신변에 이상이 생기면 바로 팬들에게 상세한 사유와 대처 안까지 공유해준다. 현재의 팬들은 닿을 수 없는 환상 속의 스타보다 일상에서 ‘함께’ 숨 쉬며 ‘함께’ 성장하는 아티스트를 원하기 때문이다.

H.O.T.와 젝스키스 팬덤의 대립을 묘사한 드라마 <응답하라 1997>의 장면 ⓒtvN


팬덤, 무보수 열정 크리에이터가 되다


팬들은 이제 더 이상 1차원적인 단순 소비에 머무르지 않고 직접 영향력을 행사하며 적극적인 ‘의미 소비’를 하는 집단으로 변모했다. 심지어 오늘날의 팬들은 모니터 앞에 앉아서 수동적으로 콘텐츠를 보는 것을 넘어 자발적으로 콘텐츠 생산에도 나선다. 이런 팬덤의 모습을 한 증권가의 보고서에서는 ‘무보수 크리에이터 집단’이라고 명명하기도 했다. 실제로 온라인상에서 특정 아이돌의 콘텐츠를 찾아보면 기획사, 방송국에서 제작한 것 외에는 전부 팬들이 창작한 콘텐츠다. 콘텐츠의 개수도 압도적으로 많다. 각 방송사의 프로그램이나 뮤직비디오를 구간별로 자르고 재편집한 2차적 창작물도 있고, 본인들이 직접 촬영부터 편집까지 담당한 온전한 팬 창작물도 많다.
이처럼 다양한 니즈를 가진 팬들을 충족시키기 위해 현재 지상파 음악 방송 역시 본무대 영상 외에 멤버별 직캠은 물론, 컷 편집 없이 한 번에 찍은 원테이크 4K 영상 등을 방송 직후에 제공한다. 이 역시 팬들에게는 창의적으로 재가공할 만한 좋은 소스다. 물론 자발적으로 임했을 뿐, 콘텐츠 재가공을 요청한 이들은 없기에 대가나 보수 또한 없다. 팬들이 ‘무보수’ 열정 크리에이터인 이유다. 그럼에도 팬들은 자발적으로 콘텐츠를 업로드하고 피드백을 받으며 내 ‘최애’의 가치를 다시 한번 세상에 알린다.
이렇게 팬들의 다변화된 니즈에 맞춘 콘텐츠 중 하나가 유튜브 채널 1theK(원더케이)의 ‘내돌의 온도차’다. ‘내돌의 온도차’는 팬들이 열광하는 요소 중 하나인 ‘갭모에’(‘갭(gap)’은 영어로 ‘차이’. ‘모에’는 일본어 ‘모에루(萌える)’에서 온 ‘싹이 튼다’라는 의미다. 반전 매력을 통해 긍정적인 감정의 싹이 트는 것을 ‘갭모에’라고 한다)를 기반으로 한 교차 편집 영상이다. 다양한 착장과 그에 맞는 무드의 스타를 보고 싶어 하는 팬들의 니즈를 정확히 간파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 영상에서 스타는 강렬한 가죽 의상부터 농부 패션, 직장인 스타일의 정장까지 전혀 다른 느낌의 의상을 착용한다. 이렇게 다른 무드의 의상을 갖춰 입고 한 안무가 2초 간격으로 교차 편집된다. 보통 한 곡을 한 가지 의상으로 전체 무대를 하는 게 기본 공식이지만 이 영상에서는 3분 안에 열 벌 이상의 다른 의상을 입은 스타를 볼 수 있기에 팬들이 환호한 것이다. ‘내돌의 온도차는 ‘갭모에’에 반응하는 팬들의 니즈를 정확히 읽고 기민하게 대처한 콘텐츠인 것이다.

한 곡 안에서 계속 다른 의상을 입고 등장하는 스타를 보여주는 ‘내돌의 온도차’ ⓒ1theK

팬이 직접 참여해 변화를 만든다, 바이미 신드롬


이외에도 콘텐츠 제작자들은 자체적으로 막대한 파급력과 영향력을 가진 팬덤을 콘텐츠 구성에 담으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오디션 프로그램의 팬 참여다. ‘국민 문자 투표’가 대표적 사례다. 시청자를 대상으로 팬덤 참여 기반의 이른바 인기 투표를 시작한 것이다. 이에 전국의 중장년 팬들이 사돈의 팔촌까지 연락을 돌려 ‘7번 임영웅’을 찍으라고 적극적으로 투표 독려에 나서게 되었고, 이는 엄청난 위력을 발휘했다. 실제로 임영웅은 <미스터 트롯>에서 문자 투표에서만 무려 130만 표 이상을 받아 압도적인 1위로 최종 우승했다. 얼른 임영웅을 찍으라고 시청자이자 팬덤이 나섰던 것이 임영웅을 국민 트로트 영웅으로 만든 것이다.
이때 느꼈던 팬들의 성취와 희열감은 엄청났을 것이다. 내 엄지손가락으로 인해 큰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이를 바이미(By-me) 신드롬이라고 한다. 소비자들이 제품에 대한 의견을 내는 수준을 넘어 바이미(By-me) 즉, 나에 의해, 나의 참여로 인해 브랜드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즐기는 현상을 말한다. 자식을 다 키우고 취미가 부재하기 쉬운 중장년층에게 내 손가락 하나로 국민 영웅을 만든다는 건 엄청나게 유의미한 경험이자 사건이었다. 그들에겐 수십 년 만에 자기 효능감마저 자극되는 역사적인 일이었을 것이다. 단순히 시청자로서의 유희만 만족시키는 것이 아닌 직접 참여를 이끌어 성취감을 맛보게 하는 것까지가 현재 콘텐츠 제작자가 정교하게 기획에 담아야만 하는 것이다.

임영웅의 팬들은 자기 손으로 임영웅을 트로트 영웅으로 만들었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 ⓒTV조선

‘최애’의 지금을 기록하고 공유하는 즐거움

팬들이 진심으로 환호할 거리를 찾아내는 것도 제작자의 임무다. 실제로 팬을 대상으로 한 〈팬심 자랑 대회–주접이 풍년〉이라는 프로그램을 선보였을 때 가장 반응이 뜨거웠던 건 따로 있었다. 바로 녹화장을 찾은 방청객에게 자유롭게 사진 촬영 및 업로드를 허용한 것이다. 보통 대부분 프로그램의 방송 녹화 때는 질서 유지나 방송 내용 유출 방지 등을 이유로 방청객의 사진 촬영과 사전 업로드를 금지한다. 그러나 나는 PD이기에 앞서 ‘팬의 팬’을 자처하는 사람으로서 팬들에게 잊지 못할 경험을 선물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이례적으로 사진 촬영은 물론 본방송 전에 SNS 어디든 업로드하는 것을 허용했다. 스포일러 금지는커녕 스포일러마저 자유롭게 하라는 주문이었다. 비용이 들어가는 일이 아니었지만, 이례적인 촬영 허용에 팬들은 환호했다. 실제로 녹화 이후에 각종 SNS에 방청 후기 등이 올라왔다. 이를 또 다른 팬이 퍼 나르면서 부수적인 바이럴 마케팅에까지 긍정적인 영향을 미쳐 파일럿이었던 이 프로그램은 정규 편성의 영예를 안을 수 있었다. 큰 비결은 없었다. 팬들에게 손에 잡히는 무언가를 쥐어주기보다 지금이 아니면 다시 돌아오지 않은 순간을 몸소 느끼고 기록하고 공유하게 해주었을 뿐이다.

<살림하는 남자들 2>는 ‘살림돌’ 인스타그램까지 만들며 팬들과의 접점을 늘렸다

이제 팬덤을 사로잡는 것은 콘텐츠 제작자의 의무


현재 연출 중인 <살림하는 남자들 2>에서 아이돌을 주제로 한 ‘살림돌’의 경우 기획 단계부터 다르게 접근하고 있다. 단순히 출연자를 섭외해 방송에 내보내는 것은 수십 년간 모든 연출자가 해왔던 방식이다. 이것으로는 다변화된 팬들의 니즈를 충족시킬 수 없기에 방송 콘텐츠 외에 유튜브용 선공개 영상, 안무 연습 영상 등을 방송 전후에 제공하고 따로 살림돌 인스타그램을 만들고 비하인드 사진 등을 올려 팬들과 소통한다. 모두 팬들의 참여를 늘리고 거리를 좁히고자 하는 노력들이다. 그러나 사실 이런 콘텐츠는 시청률과도 무관한 행동이고, 사실은 방송국이 아닌 기획사에서 해야 할 일처럼 보이기도 한다. 실제로 살림돌 1호인 강다니엘의 팬들은 이러한 살림남 제작진을 일컬어 ‘제2의 소속사’라는 별칭으로 화답하기도 했다.
팬들에게 유형의 선물을 건네지도 않았지만, 애정을 기반으로 한 아기자기한 기획들에 팬들은 반응했고, 이는 2049 세대의 시청률 향상으로도 이어졌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이런 다양한 시도들은 팬덤화된 시청자들을 잡기 위한 연출자로서의 필수적인 고민의 영역이었다고 생각한다.
팬은 이제 직접 영향력을 행사하며 ‘의미 소비’를 통해 성취감을 느끼는 집단으로 변모했다. 이들은 콘텐츠 산업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콘텐츠 제작자들은 스타와 함께 숨 쉬고 함께 성장하고 싶어 하는 능동적인 팬들의 니즈를 충족시키기 위해 콘텐츠를 더욱 정교하게 기획해야 할 때다.

글. 편은지(KBS <살림하는 남자들 2> PD)


전체 원문 링크 하단 참조

KOCCA N contents magaz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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