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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만든 감옥에 사는 나에게

20년 전 만든 감옥에 다시 가본 소감

by 편은지 피디

그저께 퇴근 길에 16km를 걸어서 모교인 고등학교에 가보았다.

누구에게나 그랬겠지만 학창시절은 맹목적으로 공부만 했던 시절, 내 인생에서 가장 치열하고 처절하게 살았던 시절이다.


월드컵에서 한국팀이 진출한 날도, 크리스마스도, 내 생일도 매일 새벽2시에 관리인이 환기를 시키고 '이제 그만 나가라'라는 신호를 보낼 때까지 매일 내 자리를 지켰다.


늦은 새벽 독서실에서 자습을 마치면 혼자 묵묵히 걸어 어두운 두 개의 단지를 거쳐지나 와야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세상은 혹은 어른들은(이제 나도 어른이지만) 너무도 간편하게 대상을 구분 짓는다.

당시 내가 살았던 동네는 10평대의 임대아파트와 20평대의 내가 사는 아파트가 퐁당퐁당 지어져 있는 곳이었다.


초등학교 때는 A:임대아파트 B:내가 사는 20평대 아파트 이렇게 딱 두 군데에서만 진학을 해서

학교에서는 모두가 자연스럽게 A에 사는 친구, B에 사는 친구 이렇게 두 부류로 나눠서 인식하게 되었다.


당연하지만 임대의 개념도 작은 평수의 개념도 정확하지 않았던 시절이라

임대 아파트에 사는 친구와도 격 없이 지냈고,


거기 사는 친구의 아버지가 엄청 유명한 의사라는 친구의 말에도 전혀 의심 없이 믿으며,

오히려 집에 와서 엄마한테 자랑을 했다.

"엄마 엄마, 새롬이 아빠 의사래. 대단하지?"라고.


엄마는 부정도 긍정도 아닌 애매한 표정을 지었던 것 같다.

그리고 아주 나중에 알았다. 그 친구의 아버지가 택시 운전을 하신다는 걸 말이다. 우리도 형편이 그렇게 넉넉하지도 않았기에 그냥 그런가 보다 했다. 오히려 다른 포인트로 친구가 외동이라는 게 그저 부러울 뿐이었다.


조금 더 자라자, 어른들은 그 단지에 갈 때는 행동을 조심하라고 했다.

담배 피우는 불량 학생도 많고 변태도 많다고 했다.


하필 어린 시절 내내 주의를 들었던 '그 단지 길'이 고등학생이 된 내가 매일 새벽 2시가 넘어서 혼자 걸어와야 하는 길이었다.


한창 예민했던 시절이라 오히려 어린 시절에는 신경조차 쓰이지 않았던 어른들의 겁주는 말들이 속속들이 떠올랐다.


한 번은 그런 적도 있었다.

매번 공포에 질려 CD 플레이어 볼륨을 최대로 하고 빠른 걸음으로 걸어오곤 했는데,

사실 새벽 2시간 넘은 시간쯤이면 사람이 아예 없어야 맞는 시간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10미터쯤 밖에서 나를 겨누는 총구가 보이는 것이었다.

거기에 번쩍 하는 스파크까지 보여서 누군가 나한테 총을 쏜다고 확신하고 정말 그 자리에 주저앉을 뻔했다.

"아...대학도 못가보고 죽는구나..."하고 말이다.


그런데 그건 그냥 새벽에 담배 한 대 피우러 나온 중년 남성의 담배 라이터 불이었을 뿐이었다.

내가 너무 기절할 듯이 놀라서 오히려 민망하고 죄송할 정도였다.


그 정도로 경계하며 3년을 숨죽여 걸어 다니던 길.

그 길을 20여 년이 가까이 된 지금 다시 걸어가봤다.


여전히 어두운 밤 길이었지만, 때 이르게 크리스마스 전구를 달아놓은 가구들이 보였다.

오히려 지금 내가 사는 곳보다 예쁘고 소박하고 포근하기만 했다.


학창 시절 당장 사건이라도 생길 듯 가시를 세워 걸었던 그 길은 민망하리만큼 너무도 짧았다.

노래 한 곡을 채 다 듣기도 애매한 거리였다.


아마 당시에 부모님들은 조심하라는 뜻에서 좀 더 과장해서 10대인 나에게 주의를 주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그런 상상에 상상을 더해 더 큰 공포로 채워진 감옥을 만들었다.


그곳을 지나오면서 이런 식으로 내가 만든 감옥은 몇 개가, 아니 몇 십 개가 더 있을까 생각했다.


어쩌면 내가 답이 없다고, 답답하다고 느끼는 것도

전부 내가 셀프로, 내 손으로 나도 모르게 뚝딱뚝딱 만들어낸 감옥이 아닌가 하고 말이다.


당시에 가장 처절하게 열심히 공부했지만, 행복했던 기억이 분명 있었음에도 학창 시절을 떠올리면 저 무서웠던 길과 총 맞을 뻔(?)한 기억이 왜 1번으로 떠오르는지 말이다.


학창 시절 살이 찐 주 요인이자 행복의 근원이기도 했던,

친구 혜인이와 매일 사 먹던 호떡과 어묵 국물.

정말 둘 다 아무 말도 없이 루틴처럼 당연하게 매일 먹던 음식.


설마 그 호떡집이 아직도 있을까? 해서 가봤다.

멀찍이서 보니 포장마차 특유의 노란 불빛이 안 보여서 '그렇지 뭐...' 하면서 일부러 챙겨 온 현금 3천 원을 괜히 만지작 거리며 가까이 갔는데 이게 웬걸.


침침한 형광등 불빛 밑에서 누군가 어묵을 드시고 있었고 호떡집 주인 아주머니도 계셨다.

반가운 마음에 20년 전에도 계셨었냐고 묻고 싶었지만, 수줍어서 질문조차 못했다.


호떡 1500원 어묵 700원.

현금을 드리려 하니 그냥 2천 원만 받으시겠다고 어묵은 5백 원에 먹으라고 하셨다.


그렇게 한 손엔 호떡 한 손엔 어묵국물을 받아 들고 있으려니 이런 햇빛 같은 순간도 많았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초등학교 때 친구랑 학원 가방을 두고 놓고 간지도 모르고 신나게 놀던 놀이터에 앉아서 그것들을 천천히 먹었다.


그래서였을까 한참을 걸어서 집에 오는 길이 전혀 힘들지 않았다.


현실을 바로 본다는 변명과 자기 위안으로

감옥을 우선적으로 바라보고 우위에 두고 살아오진 않았는지


앞으로도 그럴 건지 괜히 스스로 캐묻고 싶은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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