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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재원 Mar 05. 2023

<스즈메의 문단속>이 실망스러웠던 이유(2)

스포 有

1편에서는 '로드무비'와 '작화주의'를 언급하며 <스즈메의 문단속>을 대차게 깠다. (링크: https://brunch.co.kr/@ippnny052324um/37)


2편에서는 이 작품에서 선보인 또다른 새로운 시도와, 영화의 주변적인 부분들을 살펴볼 것이다.


<스즈메의 문단속>이 도입한 두번째 시도는 바로 그로테스크한 연출이다.

거대해진 미미즈

미미즈의 형상은 영화의 아름다운 작화와 대비되어 그 기괴함과 불쾌함이 배가 되도록 만든다. 항상 예쁜 것만을 그리려 노력하던 신카이 마코토의 영화에서 이러한 존재가 등장하니 꽤나 충격적이고 신선했다. 다만 그 신선함 이상의 것은 아니었고 괜찮은 시도 정도로 평가할 수 있겠다. 아무래도 <스즈메의 문단속>에서 스즈메 일행이 막아내고자 애쓰는 '재난'이라는 대상이 추상적이기도 하고 다소 진부하기도 한 소재이므로 관객들에게 직접적인 공포심을 조성하려 꺼낸 듯하다.


이 외에도 2.35:1의 시네마스코프 비율을 채택한 것도 용감한 도전이었다. 요즘엔 아이맥스다 뭐다 하면서 화면의 상하길이를 늘리는 데에만 급급하고, 데미안 샤젤같은 고전영화빠돌이를 제외하면 시네마스코프를 잘 사용하지 않는데 <스즈메의 문단속>이 극단적인 화면비의 포맷을 채택한 것은 그 결단만으로도 흥미로웠다.

실제 영화 화면비. 가로가 정말 길다... 폰으로 보면 좀 답답할듯.

다만 시네마스코프를 잘 활용했는지는 의문이다. 극단적으로 긴 가로비율 탓에 시네마스코프 영화는 인물들의 수평이동을 적극 활용해야 한다. <올드보이>의 롱테이크 장도리씬은 아주 훌륭한 예시다. 데미안 샤젤의 <라라랜드>도 이를 참 잘 활용한다. 하지만 신카이 마코토는 이들에 미치지 못한 것 같다. 배경작화, 특히 드넓은 하늘이 시네마스코프때문에 갇혀있는 인상을 줬다.


다음으로 작품의 주제의식 이야기를 해보자면, 이 부분에서도 깔게 많다. 내 생각에 신카이 마코토는 작품에서 트롤리 딜레마 문제를 그만 끄집어와야 한다.


신카이 마코토의 최근 작품들은 세상의 문제와 개인의 문제를 동시에 다룬다. <너의 이름은.>에서는 타키가 미츠하를 구하는 것이 곧 세상을 구하는 일이었다(아오모리 마을이 세상보단 훨씬 작지만 이는 요점이 아니지 넘어가자). <날씨의 아이>에서는 날씨의 무녀는 날씨와 양자택일적인 관계에 있었다. 따라서 호다카는 세상을 위한 선택 대신 히나를 살리기로 결정한다. <너의 이름은.> 때보다는 윤리적 복잡성이 커진 셈이다.


<스즈메의 문단속>은 어떤가. 도쿄 문단속에서 스즈메가 내려야하는 결단은 소타를 요석으로 사용해야 하는지 여부이다. <날씨의 아이>에서 히나를 제물로 바치는 것과 도식적으로는 같지만 바치지 않을 경우에 발생되는 파급력의 크기가 다르다. <날씨의 아이>에서 호다카가 저지른 이기적인 선택의 대가는 궂은 날씨와 수몰된 도쿄 따위의 '감내할만한 것'이었다. 반면 <스즈메의 문단속>은 일본인의 PTSD 그 자체인 대규모 지진이라는 테마를 가져오며 스즈메가 도저히 이기적인 선택을 내릴 수 없게끔 제한한다.   


조금의 변주는 있지만 이상의 영화들에서 등장인물이 내릴 수 있는 판단은 뻔했고 주인공이 겪는 심리적 갈등 역시 같은 차원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날씨의 아이> 때까지만 해도 흡입력이 있었던 주인공의 문제상황은 <스즈메의 문단속>에 이르러 '또 저울질하는 문제네'하는 피로감을 줬다.


또한 그 결단의 무게감조차 너무 가벼웠다. 미친 날씨라는 책임을 군말없이 받아들인 호다카와는 달리, 스즈메에게는 소타를 되살릴 수 있는 길이 너무 간단하게 제시됐다. 분명 몇십분 전까지만 해도 소타를 희생시키며 울고 불고 짜고 했던걸 무의미하게 만든 셈이다. 그리고 소타를 부활시키는 제물은 역시나 영화 내내 도구적으로 쓰던 고양이 다이진이었다. 이 고양이는 초반 빌런같은 행세를 해놓고는 주인공 스즈메가 위기에 빠지자 사기템처럼 나타나 희생을 자처한다. 이때 잠시동안 미안한척 하는 스즈메와 얼렁뚱땅 넘어가는 연출이 압권이다(...) 소타나 다이진이나 윤리적 위상은 동일하지만 다이진보단 소타가 스즈메에게 더 소중하니 다이진을 희생시키자~ 하는 이기적 선택을 영화는 애써 포장해서 넘어간다. 마지막으로 다이진이 '사실 초반에 빌런짓한게 아니라.. 다 너희들이 문 찾으라고 그런거였어...' 하는 클리셰까지 화룡점정.


대지진 테마를 끄집어오며 영화가 재난의 희생자들에게 조의를 표하는 방식도 영화의 전개와 이질적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특히 지금은 폐허가 된 공간들에서 과거의 인물들을 소환하는 것이나 후반부 여러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려주는 씬은 영화 전반과 전혀 조화롭지 않았다. 물론 어머니를 잃고 실의에 빠진 어린 스즈메를 다 큰 스즈메가 위로해주는 장면은 의도치 않은 사고의 희생자가 된 일본인들에게 힘을 불어넣어주는 측면이 있었다.


되려 신카이가 그려낸 일본 사회에서 내가 인상깊게 본 것은 일본인들에 대한 대조적 묘사였다. 히치하이킹을 하고 있음에도 스즈메를 지나치는 차들과, 어린 스즈메가 엄마를 찾자 그녀를 도와주지는 않으면서 '저런, 저런..' 따위의 쓸모없는 말이나 내뱉는 사람들을 통해 일본 사회의 비간섭성을 제대로 꼬집었다. 반면 그 와중에도 버스 정류장에 앉아있는 스즈메를 차에 태워준 니노미야 루미나, 치카가 흘린 귤을 막아주는 스즈메 일행 등은 하나의 이상향으로서 희망적 가능성을 제시했다. 전반적으로 이전의 신카이 영화에선 볼 수 없었던 사회 전반의 문제를 이번 작품을 통해 대대적으로 다루는 느낌이었고 앞으로의 영화에서도 관련된 내용이 확대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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