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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땅콩 Jul 02. 2022

크세노폰이 쓴 《소크라테스 회상록》

지난번 플라톤의 언어로 소크라테스를 읽었다면 소크라테스의 또 다른 제자 크세노폰은 그를 어떻게 옮겼는지 비교하면서 읽어볼게요. 크세노폰이 말하는 스승 소크라테스 현실적이고 인간적인 면에 초점을 맞추어서 실제 소크라테스에 가깝다는 평을 받기도 합니다. 플라톤의 글보다 쉽고 더 보편적인 주제를 소크라테스의 '산파법'을 살려 옮겨놓았습니다. 소크라테스에 대한 일화와 플라톤 저서와 같은 제목의 향연, 변론등이 함께 묶여 있어요. 


크세노폰 <소크라테스 회상록> 337쪽 (도서출판 숲,.2018) 천병희 옮김

분위기가 공자의 논어랑 약간 비슷해요. 하지만 논어처럼 졸리지않고(공자님 죄송해요) 구체적인 예를 들면서 훨씬 잘 읽히네요. 크세노폰의 글은 정치적인 목적보다 소크라테스를 추종하는 자의 어록모음 같아 소크라테스의 실제 가치관들이 얼핏얼핏 보입니다. 


1. 아테네는 민주정, 왕과 통치자

(p.209) “하지만 자네는 민주정체 국가의 수장이 될 준비를 하는 만큼 민주정체가 무엇인지는 분명히 알걸세.”
“네, 잘 알고 있어요."
(p.37) “자네는 '민중(demos)'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서 민주정체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물론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해요."
"자네는 민중이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시민 가운데 빈민층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면 자네는 빈민층도 알겠구먼?"
"왜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자네는 부유층도 알겠구먼?"
“네, 압니다. 빈민층 못지않게 말입니다."
“자네는 어떤 사람들을 빈민층이라 부르고, 어떤 사람들을 부유층이라 부르는가?"
"생각건대 빈민층이란 생필품을 구매할 만큼 충분히 소유하지 못
한 사람들이고, 부유층이란 충분하고도 남을 만큼 소유한 사람들입니다."


통치자에 대한 정의에서 대중에게 선출된 자도 아니고 통치를 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하는 부분이 눈에 띄어요. 결국 통치를 받아야 할 민중은 빈민층이고 그들을 통치하는데 민중이 통치자를 선출하도록 맡길수 없다는 얘기로 들리네요. 민주정에 대한 정의와 민중에 대한 정의를 보면 소크라테스에게 선민의식이 보여요.  이쯤 되니깐 플라톤이 국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국가》도 읽어보고 싶어요.  


2.향연

그래도 향연을 읽으니까 자신의 이상을 몸소 실천하며 살았던 스승을 필두로 공동체를 꾸리며 배우고 누렸던 그들이 부럽습니다. 인간 소크라테스 자체로는 저라도 졸졸 따라다니며 멘토로 삼았을 것 같아요. 일단 그는 차근차근 예를 들어가며 자신이 동의하는 것을 상대도 동의하는지 물어가며 토론하고 자신의 의견을 이야기하는 겸손한 태도가 맘에 들어요.

라파엘로의 걸작 '아테네학당'. (가운데) 오른손을 치켜든 플라톤이 오른손으로 땅을 가리키는아리스토텔레스와 함께 있는 모습

특히 향연에서는 한사람도 빠지지 않고 두루 토론에 참석하게 하여 자신의 자랑거리를 이야기하게 하고 그것이 왜 자신에게 위안을 주는지 다정하고 유러머스하게 묻는 그의 모습에서 제자들을 향한 따뜻함이 묻어났습니다. 크세노폰이 의도했건 안했건 이런 디테일은 일부러 만들기도 힘든 것이니까요. 다만 인간의 쓸모가 특정 목적을 위해 유익하게 사용될 때 아름답다는 소크라테스의 합리주의보다는 쓸모없음에 대한 쓸모에 대해서도 피력한 장자의 사상이 더 와닿네요....하지만...그의 공동체안에서의 향연은 또 부럽고요.


3. 변론

소크라테스 자신의 외모나 나이에 상관없이 자존감이 강하고 스스로에게 만족하는 모습이 보기좋았지만 그의 인기를 샘내하는 사람들에겐 잘난척이 좀 심하다고 느낄 수 있었겠어요. 마지막 변론 꼭지를 보니 안그래도 잘난체하는 태도에 대한 크세노폰의 지적이 나오네요. 

소크라테스가 법정 줄두 명령을 받았을 때 자신의 변론과 삶의 종말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느냐 하는 것도 내 생각에는 회고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것 같다. 이에 관해서는 다른 사람들도 글을 썼는데, 그들은 모두 그의 잘난 체하는 말투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그로 미루어 소크라테스는 실제로 그런 투로 말했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들이 밝히지 않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그가 이미 자신에게는 삶보다 죽음이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것을 밝히지 않으면 그의 잘난 체하는 말투는 어리석어 보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는 변론 당시 현장에 있지 않고 나중에 헤르모게네스에 전해듣는데요. 그래서 플라톤의 변명보다는 훨씬 짧아요.  늙은 나이에 삶보다는 죽음이 낫겠다고 감형하려 하지 않은 잘난척이 의도적인 행위였다고는 하나...배심원들이나 민중들은 의도적이건 아니건 그의 그런 태도를 고깝게 느끼지 않았을까. 자신이 완벽하다고 하는 말 속에는 자신을 고발하거나 심판하는 사람들에 대한 멸시가 깔려있는 것이니까요. 

자크 루이 다비드의 ‘소크라테스의 죽음’

좋은 인간, 좋은 삶에 대해 소크라테스에게 조언을 얻을 수도 있겠지만 시대감각에 맞지 않게 정치적으로 (민중을 현혹시키고 수월하게 통치하기 위해) 소크라테스의 텍스트가 오역되거나 악용되는 것은 좋지 않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나중에 소크라테스에 대한 플라톤의 파이돈과 크리톤도 읽어보고 싶네요.  크세노폰의 <소크라테스 회상록>아주 흥미롭게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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