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 졸라 <인간 짐승> (문학동네, 2014) 이철의 옮김
(p.72)객차 구르는 소리, 기관차 기적 소리, 전신 장치 소리, 신호기 타종 소리 등이 얽힌 와중에 군중, 또 군중, 끊임없는 군중! 그것은 하나의 거대한 몸뚱어리 같았다. 머리는 파리에 두고 등뼈는 선로 위에 죽 늘어뜨렸으며 다리와 팔들은 르아브르와 여타의 정거장이 있는 도시들에 둔 상태로 지선들을 따라 사지를 활짝 벌린 채 대지를 가로 질러 누워 있는 하나의 거인. 그것이 지나간다. 그것이 지나간다. 기계가, 의기양양하게, 수학적인 정밀성으로 무장하고서, 선로 양옆에 감춰져 있지만 항상 생생하게 꿈틀거리는 인간적인 것들은 불멸의 정념과 불멸의 범죄는 의도적으로 무시하고서, 미래를 향해 달려간다
(p.486) 그는 돈 찾을 궁리를 하느라 자기 두뇌에 단일 분의 휴식 시간도 줄 수 없었다. 그의 두뇌는 문제의 돈이 묻혔을 법한 곳을 찾느라 작동하고 또 작동했다. 가능성이 높은 장소들은 재차 확인하고 이미 뒤졌던 장소들은 하나하나 지워나갔으며, 새로운 장소가 떠오르면 즉시 후끈 흥분이 되고 조급증에 몸이 달아 만사를 제쳐두고 황급히 달려가지만 다시 한번 허탕 치는 일이 되풀이되었다. 시계의 초침 소리처럼 압박해오는 강박에 사로잡혀 본의 아니게 아둔한 머리를 굴려야해서 두뇌가 잠들지 못하고 늘 각성상태인 것은 그에게 가혹한 형벌, 응징의 고문이었다.
(p.490) "떠난다는 우리의 꿈, 저멀리 미국에 가서 부자가 되고 행복해지겠다는 그 희망, 온전히 자기한테 달려 있는 그 지극한 행복이 이젠 불가능해졌잖아, 자기가 하지 못했으니까……… 오! 자기를 탓 하는 게 아냐. 일이 벌어지지 않은 게 차라리 더 잘된 건지도 몰라. 하지만 자기한테 이 사실만큼은 알려주고 싶어, 자기와 함께 있으면 이제 기대할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 말이야. 내일도 어제와 같을 거야,늘 똑같은 권태, 늘 똑같은 고통......”
해설에 인상깊은 이런 말이 있어요.
(p.579) 이 시기에 범죄에 대한 작가와 독자 대중의 뜨거운 관심은 새로운 불안감, 다시 말해 부르주아 사회가 해결하지 못했고 실제로 해결할 수도 없는, 생물학적인 충동과 사회적인 제약 간의 모순에서 비롯된 불안감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범죄에 대한 이전의 관심이 자연과 비이성적인 사회질서 사이의 모순에서 사회질서 쪽에 책임을 묻는 양상으로 표명되었다면, 이제 범죄는 자연과 이성을 표방하는 부르주아 사회질서 간의 모순에서 순치해야 할 자연과 수호해야 할 사회질서라는 관점에서 다루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