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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서울 Sep 08. 2023

부평역에서

열차가 한번 크게 덜컹거렸는지 어쨌는지, 덩달아 고개를 위아래로 크게 털면서 화들짝 선잠에서 깼다.


시청역에서 올라탈 때는 지하철이었던 쇳덩어리가, 눈을 떴을때는 어느새 지상구간을 달리고 있었다. 비가 오려는지 아직 늦은 오후임에도 창밖이 어둑해져있다.


뿌연 시야가 서서히 명료해진다. 눈길이 닿은 창문에는 [약냉방칸]이라는 딱지가 심드렁하게 붙어있다.


'염병, 그러고보니 덥구나.'


잠결에도 왼쪽 옆자리에 앉은 남자의 다리가 자꾸 내 다리에 닿아서, 그 열감에 불쾌했었다는 것이 기억났다. 비오는 토요일 오후 서울 한복판에서 인천으로 향하는 지하철에 이렇게 사람이 많을 이유가 무엇이 있을지를 다시 한번 곰곰히 생각해본다. 한 시간쯤 전 열차에 갓 올라탔을 때도 한참 해봤던 생각이다. 그러나 그때도 지금 마땅한 이유가 떠오르지 않는다.


오른쪽에 앉은 중년의 여자는 큰 목소리 통화를 하며 허공에 손짓 발짓을 내지르고 있었다. 덥고 습한 와중에 여자의 쨍한 목소리마저 귓구멍을 파고들자 짜증이 불쑥 올라왔다.


맞은 편에는 흰 드레스를 입은 대여섯살 여자아이가 마찬가지로 흰 블라우스에 흰 치마를 입은 엄마의 무릎 위에 앉아있었다. 아이는 엄마엄마 부르며 뭐라뭐라 물어보고 있었고, 엄마는 피곤한 얼굴에 죽은 생선같은 눈을 하고있으면서도, 입으로만큼은 명랑한 말투로 대답을 해주고 있었다. 그 설핏 우스운 부조화가 기실은 한 평범한 인간이 극한의 피곤 속에서도 기어이 보이는 위대한 모성일테다.

나는 문득 무릎에 앉은 여자가 무릎을 내어준 여자의 30년 전 과거가 아닐까 하는 엉뚱한 상상을 한다. 어른인 내가 과거로 돌아가 아이인 나를 양육한다는 패러독스를 만들어보거나, 우디 앨런의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 주인공을 과거와 현재로 데려다주는 마차의 역할을 지금 이 지하철이 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한참을 골몰해본다. 뭐 이러저러한 망상을 떠나서라도, 저기 무릎을 내준 이도 한때는 자신을 꼭 닮은 어떤 이의 무릎 위에 앉아서 세상에 대한 멈출 줄 모르는 호기심을 재잘거렸을터라는 것은 분명하다. 저 아이도 자기 엄마 나이가 되면 저렇게 죽은 눈을 하고 있을까? 공연히 '세대'라는 단어를 입 속으로 곱씹어본다.


모녀를 향한 시선을 거두고서는 속으로 한숨을 푹 쉰다. 앞으로도 한 시간은 더 이 쇳덩어리 속에서 지루함을 견뎌내야겠구나.

무릎 위에는 빛바랜 백팩과 그 위에 김승옥의 <무진기행> 책 한권이 놓여있었다. 마저 읽을 것 같지가 않아서 가방에 책을 집어넣었다. 그러고는 덜 깬 잠을 마저 깨보려고 상체를 길게 늘이고선 눈을 두어번 꿈뻑꿈뻑해본다.

당초에는 이대로 종점인 인천역까지 가서 수인선으로 갈아탈 작정이었다. 그 편이 퍽 돌아서 가는 길이긴 하지만, 대신 내내 앉아서 갈 수 있기 때문이다. 돌아서 가지 않는 가장 빠른 길은, 중간에 부평역에서 한번 내려서 인천 1호선으로 갈아타고, 다시 원인재역에서 한번 더 수인선으로 갈아타는 것이었다. 그러려면 긴 환승로를 두번씩 걸어야하고, 갈아탄 열차 내에서는 앉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더 이상 앉아있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이 쇳덩어리 밖으로 나가 습한 공기라도 좀 들이마시고 싶었다. 잠이 깨면서 생각이 명료해졌다. '그래, 내리자.'


이러한 이유로 나는 수년만에 처음으로 부평역에 서 있게 된 것이었다.



부평역 내부는 복잡하고 환승로도 구불구불 길다. 그러나 아무런 표지판도 보지 않고 발길 닿는대로 터벅터벅 내지른대도 나는 인천 1호선 플랫폼을 향해 한치의 어긋남없이 가고있다. 뜬금없이 진한 권태와 익숙함 사이 어딘가에 있는 듯한 미묘한 감정을 느낀다. 익숙함이란 보통 편안하고 안정적이고 반가운 감정일진데, 어떤 익숙함은 찐득하고 불쾌하다. 게다가 내가 기대한 것 이상으로 너무 과하게 익숙하다는 사실이 주는 생경함도 있다. 이 아이러니를 마땅히 담아낼 단어가 없음을 아쉬워한다.


길고 침침한 통로를 하염없이 걷다보면 내가 열일곱살 무렵에 매번 길을 잃곤 했던 넓은 지하공간이 나온다. 환승을 하려면 꼭 지날 수 밖에 없는, 여러 계단과 에스컬레이터가 복잡하게 모여있는 광장이다. 열여덟살 때 한번은 이 자리에 서서 온몸에 문신과 피어싱이 가득한 남자와 중고거래를 한 적이 있다. 약속장소에 대한 사소한 시비가 있었고, 그 남자가 껄렁한 말투로 뭐라 쏘아붙이며 나를 죽일 듯이 노려봤었는데, 속으로는 살 떨리도록 무서웠지만 애써 주먹 쥐고 눈 똑바로 치켜뜨고 기싸움을 벌였다.

구석에선 여전히 오뎅과 튀김과 김밥과 샌드위치를 팔고 있다. 그 가게들 옆으로 비스듬히 지나가면 인천 1호선 플랫폼으로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가 나온다. 에스컬레이터에 멍하니 서니 눈앞에 커다란 전광판에서 인천 홍보 영상이 나오고 있다. 아주 잘생긴 남자와 아주 예쁜 여자가 각기 어딘가를 헤매다가 높은 전망대 위에 올라간다. 그들의 눈이 우연히 마주치고, 두 인물 너머의 인천 앞바다의 야경을 크게 비추면서 하얀 글씨가 뜬다. '나는 인천입니다.'

나는 약간의 조소를 섞어서 스스로에게 질문해본다. '나도 인천이었지, 근데 내가 인천인가?'

내가 과연 언제까지 인천이었는지를 인천 1호선 플랫폼에 서서 생각해본다.



부평역에 처음 와본 것은 열일곱살 때였다. 햇수로 13년 전이다.

중학생 때까지만 해도 부평이란 곳을 갈 이유가 전혀 없었다. 인천에서도 조금은 구석진 동네에 살던 나로서는 그 동네 노래방이나 당구장을 다니면서도 충분히 놀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전 인천 학생들이 모이는 어느 고등학교에 입학하고서는 상황이 달라졌다. 부평구니 계양구니 서구니 하는 곳에 사는 친구들이 생겼고, 그 친구들은 으레 '부평'(부평은 구 이름이지만, 대체로는 부평 역 근처 번화가를 뜻한다)에서 만나서 놀았다. 내가 부평을 한 번도 안 가봤다는 말에 그 애들은 "야 이 찐따새끼 부평 안 가봤대"하며 낄낄댔고, 나는 영문을 모르면서도 일단 '이런, 이놈들이 이렇게까지 비웃는 것을 보아하니 부평을 안 가봤다는 것은 부끄러운것이구나' 싶었다.

그래서 어느 주말에 그 애들과 부평역에서 만나기로 했다. 나는 그날 친구들이 시키는대로 부평역 지하상가에 가, 그 당시에 유행하던 스타일대로 버건디색의 딱붙는 카라티를 한장 샀다. 친구들은 카라깃을 세워놓고 있으라고 들볶았지만, 나는 영 어색하고 불편해서 계속 카라를 접어내렸다. 그런 내 모습을 보고 또 친구들은 놀려댔고 나는 애써 기분 상하지 않은 척하려고 표정 관리를 했다.

그 날 저녁 집에 돌아와서는 엄마에게 부평에 갔다왔다고 말했다. 티가 아마 안 났을테지만, 그 말을 할 때 나는 사실 내가 그만큼 어른이 됐다는 자랑을 내심 담았었다. 나에게 부평은 이때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더 넓고 험한 세상, 말하자면 일종의 '큰 물'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에게도 부평이 조금씩 익숙한 공간이 되었다. 싸구려 왁스를 주접스럽게 떡칠하고, 지하상가에서 무서운 형들이 우악스럽게 들이미는 보세 옷들을 샀다. 지금 생각하면 부끄럽기 짝이 없는, 그러나 당시에는 유행이었던 바보같은 옷차림을 하고선, 어색하게 험궂은 표정과 건들거리는 걸음걸이로 부평역의 기세에 맞서보려했다. 어떤 장소는 우아함과 고급스러움으로 사람을 기죽이고, 어떤 장소는 하이 테크놀로지로로 사람을 압도하지만, 부평역이 가진 기세란 것은 문신과 담배연기, 가래침, 벌거벗은 여자 사진이 인쇄된 유흥업소 찌라시, 동공으로 무자비하게 내려꽂히는 네온사인의 불빛들 따위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 무렵 처음으로 여자친구가 생겼다. 같은 학교의 옆반 애였다. 부평구에 사는 애였던지라 주말에 만날때면 역시나 부평역에서 만났다. 그 애를 만날 때는 '부평역 분수대'(인천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만남의 장소이다) 앞 화장실에서 서투른 솜씨로 머리를 만지곤 했다. 서너달 쯤 만나다가, 의대에 가고싶다며 좀 더 여건이 괜찮은 학교로 전학을 가면서 헤어졌다. 사실 그냥 호기심에 해본 연애였지 그다지 좋아하지도 않았건만, 그 때는 나이가 나이인지라 석달짜리 정을 못이겨 학교 화장실에서 혼자 청승맞게 울기도 했더랬다. 그 애는 끝내 의대에는 가지 못했다. 얼마 전 결혼했다고 들었다.


그 후에도 부평은 나에게 조금씩 스며들었다. 역사 2층 피어싱 가게 앞에서 나도 귀를 뚫어볼까 하고 우물쭈물거렸다. 돈 없는 애들끼리 '왕가네'에 모여 1인분에 6천원짜리 돼지갈비를 숯불에 지져먹었다. 가판에서 팔던 호떡을 먹고 인생 처음으로 장염에 걸렸다. 처음으로 진탕 술을 마시고 골목 어귀에 토악질을 해댔다. 수십 수백번을 들락거렸을 공간인데 대단한 추억이나 사건이 없다. 기억나는 것이라곤 골목 사이를 하염없이 걷던 기억, 양아치들의 옷차림이나 지나가는 예쁜 여자를 훔쳐보던 기억, 사지도 않을 옷들을 뒤집어 가격표를 찾던 기억 따위의, 자질구레하고 시시껄렁한 시간들이었다.


그제야 내가 이 플랫폼에 서서 익숙함과 생경함이란 상반된 감정을 동시에 겪는 이유를 깨닫는다. 이 잿빛의 공간이 내게 불러일으키는 심상은 온통 촌스러운 열일곱살 소년의 조바심인데, 스크린도어에 비친 나는 서울시 종로구민 서른살 회사원인 것이다. 이제 나는 왁스 한번 안 바르고도 머리를 능숙하게 만들고, 세계 대도시시들을 두 발로 걸어다녀보고 왔고, 더 이상 지하상가에서 싸구려 옷을 사지 않는다. 열일곱살에 상상했던 것과 아주 거리가 먼 직업을 가졌고 동년배에 비해 적지않은 수입을 안정적으로 벌고 있다. 지금의 나는 불안함보다는 지겨움을 더 자주 느낀다. 이 곳에 선 나는 옛날의 나의 어설픔과 주저함을 그리워하는지도 모르겠다.



갈아탄 열차가 움직인다. 지나가는 역 하나하나에 나의 열일곱에서 스무살까지가 고스란히 녹여있다. 처음 어른들 몰래 맥주를 마셨던 곳, 수능을 망치고선 역시 수능을 망친 친구와 만나 하릴없이 배회하던 곳, 처음 양복을 맞췄던 곳, 외로움에 무작정 걸어다니던 곳.

그들을 지나 원인재역에 이르면, 나는 다시 수인선으로 갈아타야 한다. 수인선 인천구간은 사업성이 받쳐주지 않아 지상철로 만들어져 있다. 그러니까 좋은 사업성이란, 차있는 사람들이 볕드는 땅 위를 다니는 동안 차 없는 사람들두더지처럼 땅 밑을 헤맨다는 것을 의미한다. 공장도 아파트도 많은 이 동네의 사업성이 그렇게 부족할 이유가 무엇인지를, 아까처럼 곰곰히 생각해본다. 역시 마땅한 이유는 결국 찾지 못했다. 어쨌건 이 동네의 사업성 부족 덕분에 내가 비로소 지상으로 나온다.

땅 위로 나오자 두시간전 처음 지하철을 탔을때와는 완전히 다른 세상에 있었다. 먹먹한 안개가 사방을 둘러싸고 있었고 비릿한 비냄새가 공기중에 짙게 배어있다. 내가 내릴 곳 소래포구와 그 앞바다가 여기서 멀지 않았음을 새삼 느낀다. 그리고 깨닫는다. '무진이다. 여기는 나의 무진이구나'

나의 어설픔. 나의 권태. 나의 불안. 나의 폭력. 나의 경솔함.

이 눅진한 도시는 그런 것들을 떠올리게 한다. 습하고 불쾌한, 그러나 알 수 없는 내 성정으로 하여금 나를 기어코 도로 기어들어오게 만드는, 이곳은 나의 무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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