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서울 May 04. 2023

비오는 명동에서 김창완을 만났다

가랑비가 부슬부슬 오는 일요일 아침의 명동  

그날따라 볼일이 있어서 이른 시간부터 나왔다.


한때 조선은행이었던 화폐박물관 쪽에서 출발해서, 

한때 미츠코시 백화점이었던 신세계 백화점 쪽을 바라보며, 

한때 메이지쵸였던 명동거리를 왼쪽에 끼고 걸어가던 중이었다.     


그 쪽 인도에는 으레 파룬궁 수련자들이 중국 공산당 정부의 폭압을 성토하는 피켓을 들고 있곤 하는, 살짝 넓은 공간이 있다. 그날은 한참 홍콩 민주화 시위가 뜨겁던 때였는데, 그래서 그런지 파룬궁보다는 홍콩 민주화에 대한 피켓을 든 외국인 청년 몇이 서있었다.


나 역시 당시 한창 언론과 인터넷을 달구던 홍콩 민주화운동의 사진과 영상 등을 보면서 가슴이 뜨거워져있던 차였다. 그래서 그 시위자들과 눈이 마주쳤을 때, 나도 모르게 주먹을 쥐고 들어보이며 짐짓 굳센 눈빛을 보냈다. 연대와 지지를 담은 진심 같은 것을 전달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러고서 곧바로 왠지 조금 민망해졌던 나는 급히 발걸음을 재촉하려고, 다시 향하던 길 쪽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그 홱 돌린 눈길이 닿은 곳에는 어떤 남자가 서있었다. 


그는 지하쇼핑몰 센터로 내려가는 계단 입구 앞에 서서 우산을 든 채, 내가 바라보고 있던 시위대의 피켓 속 글을 유심히 보고 있었다.

자유분방함과 후줄근함 사이 어딘가에서 애매하게 늘어난 흰 티를 입고 있었고

잘 맞는 듯 하면서도 헐렁해보이기도 한 바지를 입고 있었으며,

머리는 안 감은 것 같기도 하면서도 나름 손질한 것 같기도 했다.

말하자면 그는 매우 훌륭히 연출된 빈티지룩을 하고 있었거나,

아니면 아무거나 주워입고 나왔음에도 묘하게 자유롭고 자연스러운 멋을 풍겼던 것 같다. 

그것이 내가 그를 보자마자 느낀 찰나의 인상이다


그는 밴드 '산울림'의 김창완이었다.


나는 내 눈 앞에 서 있는 저 아저씨가 

대한민국 대중음악계에 한 획을 그은 천재 뮤지션이자

어릴적 보던 어린이 드라마 <요정 컴미>의 명태아빠라는 것

그 두가지 이질적인 요소를 한 몸에 갖고 있는 묘한 인물이라는 것을 

그 순간에는 인지하지도 못했다.


그냥 우두망찰해서는 발걸음을 탁 멈췄다.

내가 자신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지으며 발길을 멈췄으니, 김창완도 나를 알아챘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아저씨는...? 맞죠?"

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곧바로 다음에 벌어진 장면은 내가 인생에 두고두고 기억할 한 장면이다.


김창완은 그 미치도록 환한 미소를 지었다. 

저렇게 활짝 웃는 것이 가능하기나 할까 싶을 정도로 진하고 환한 미소였다. 

그리고 아무말 없이 고개를 부드럽게 끄덕였다. 마치 "그래요 그 사람 맞아요"라는 듯 했다.

그러면서 두 팔을 머리 위로 들어, 자신이 만들 수 있는 가장 큰 하트를 그려보였다.


사진 : SBS


가랑비 맑게 내리는 명동의 아침 거리에서

추레한 차림을 한 어느 위대한 예술가가 

빗방울 수십개를 사이에 두고 서서 나에게 보낸 그 환한 미소와 하트를

나는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아주 짧은 그 순간만으로도 나는 이 사람이 얼마나 맑고 깨끗한 동심을 가졌는지와

이 사람이 얼마나 건강하고 풍성한 에너지를 가졌는지를 알 수 있었다. 

낯선 사람에게 건네는 즉흥적인 인사가 그렇게도 환한 미소와 사랑 가득한 하트라니.

그것이 타고난 본능이었든 삶 속에서 키운 습관이었든, 어느쪽이었어도 참 놀라운 것이 아닌가.

그 순간까지 수십년을 달려왔을 그의 삶이 무엇이었는지 나는 아는 바가 없으나, 

굳이 알아보기도 전에 이미 그 삶을 맹목적으로 긍정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한편 시간이 좀 지난 나중에야 김창완이 '아저씨'가 아니라

거진 70세를 바라보고 있는 노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나는 아무리 내 기억을 더듬고 이성을 발휘하여도

그곳에 서 있었던 사내는 누가뭐래도 세상에서 가장 푸른 청년이었다


나는 사람이 늙지않을 수 있는 법을 그날 배웠다. 그것은 아주 쉽지만 아주 어렵다.

세상을 밝힐듯 환하게 웃는 미소와

처음보는 행인에게 두팔 크게 하트를 그려보이는 마음

그 두가지만 있으면 누구든 영원히 청년일 수 있다.




김창완이 진행하는 라디오에서 어느 사연자에게 보낸 편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