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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뷰하는리타 Oct 20. 2021

명불허전 아이템의 존재 이유 : 1865

모든 덕질에는 내리사랑이 있다


덕후는 뉴비를 좋아해


세상에는 크게 두 부류의 사람이 있다. 세계를 깊고 좁게 사는 사람과 얕고 넓게 사는 사람. 대인관계, 일, 취미 등 다방면에서 대부분의 사람은 둘 중 하나의 전략을 택한다. 탁월한 에너지를 자랑하는 사람은 깊고 넓게를 지향할 수도 있겠지만 나처럼 적은 에너지를 타고난 사람에겐 해당 사항이 아니다. 전략은 분야마다 달라지기도 한다. 나는 대인관계에 있어서는 아주 좁고 깊은 편이지만 취미나 관심사에 있어서는 매우 얕고 넓다. 나의 독서생활은 읽은 책을 다시 읽는 시간보다 새 책을 알아보고 읽는 시간이 압도적으로 높은 비율을 차지한다. 음주생활에서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새로운 술에 도전하기를 선호한다. 낯선 분야에 쉽게 호기심을 느껴 몇 날 며칠 관련 책이며 문서를 탐독하고 영상을 찾아다니다가도 적당히 알게 되면 시들해진다. 이를 반복한 결과 전문적으로 잘 아는 건 없지만 잡학 다식한 사람이 되었다.


이런 나에게도 몇 번쯤 평소보다 깊게 빠져든 분야가 있었다. 몇 가지 있지만 세 가지만 추려보자면 게임, 건담, 스노보드다. 게임은 수년에 걸쳐 치명적으로 빠져들었다. 고3 때도 놓지 못했고, 한참 쉬다가 백수일 때 손가락 관절마다 건초염이 걸리도록 매진했고, 회사를 다니면서 비로소 멀어졌다. (하던 게임에서 멀어진 후 내가 재미에 쉽게 중독되는 사람임을 절실히 깨닫고 다시는 RPG 게임에 손대지 않았다.) 대학시절 1000P짜리 퍼즐을 몇 번 맞추며 '손맛'이라는 느낌을 알게 되었는데, 그보다 훨씬 짜릿한 손맛이 있다는 말에 시작하게 된 게 건담이다. 확실히 종이를 맞추는 느낌과 플라스틱을 맞추는 느낌은 천차만별이었다. 건담에 관해 아무것도 모르지만 클수록 손맛이 좋아지는 경험을 하고서는 PG등급까지 섭렵했다. 스노보드는 몸 쓰는 일에 마이너스 재능을 가진 내가 처음 시도한 몸 쓰는 취미였는데, 친구 따라 얼결에 동호회에 들어가면서 시작했다.


몇 번의 처음을 거치면서 모든 분야의 덕후들이 뉴비에게 하나라도 더 알려주고 쥐어주려는 내리사랑 마인드를 장착하고 있다는 공통점을 발견했다. 게임의 세계에서는 네임드라고 불리는 고수가 존재하는데 자신이 알고 있는 꿀팁을 지나가다가도 던져준다던가, 본인에겐 흔해 빠졌지만 뉴비에겐 소중한 아이템을 뿌리는 방식으로 초보를 도와주곤 했다. 보스를 못 잡아서 던전을 클리어하지 못해 던전 입구에서 절규를 하고 있으면 '도와드릴까요?'라는 친근한 채팅을 보는 게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건담 프라모델은 자체적으로 등급을 매겨놓고 있지만 같은 등급이라도 모델에 따라 손맛이나 난이도가 조금씩 다르다. 건프라 덕후들은 뉴비를 위해 입문할 때 해보면 좋은 모델부터 손맛이 좋은 모델, 디테일이 좋은 모델, 동일 등급 중에서 추천할 만한 모델 등을 못 알려줘서 안달이었다. 스노보드 동호회에서는 다들 일이 있는 직장인이라 본인 타기 바빴을 텐데도 불구하고 이 몸치를 붙들고 낙엽 타기부터 알려주는 선생님들이 다수 있었다.


나만 알기 아까운 '이 좋은 것'


어떤 분야든 중급자를 넘어 고급자 수준에 도달한 사람들은 입구에서 기웃거리며 관심을 보이는 사람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것 같다. 고급자는 그 분야에 지속적으로 매력을 느껴 안목이나 실력, 경험 등을 시간이나 비용을 투자해 키워왔을 것이다. 그리고 많은 고급자가 뒤따라 오는 이들을 위해 자신의 경험을 공유해준다. 게임이라면 고수의 공략법이 있고, 건프라의 세계에는 등급별 추천 모델이나 당장은 아니더라도 한 번쯤은 해봐야 할 대표 모델, 입문자 추천 모델 또는 비추 모델 리스트가 아주 많이 공유되어 있다. 직접 몸을 써서 일정 수준에 도달해야 하는 취미는 역시 경험이 최고인데, 돈 받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자신의 취미 시간을 빼앗는 일을 기꺼이 나서서 해주는 중·고급자들을 생각보다 쉽게 만날 수 있다. 이건 모두 입문자의 시행착오 과정을 줄여주고 더 빠르고 깊숙이 이 세계에 들어오길 기대하는 고수들의 친절하고도 응큼한 시도다.


유튜브로 아이돌 영상만 봐도 한 명의 머글이라도 더 입덕 시키려는 덕후들의 시도가 보인다. 해당 영상 외에 '입덕 3대 영상'이나 'ㅇㅇ 3대 무대' 등을 골라 링크까지 달아둔다. 작은 관심을 가지고 있던 사람도 유난히 멋지게 치른 몇 가지 무대의 영상을 보면 호감이 커질 수밖에 없다는 계산과 희망이 담겨있다. 덕질을 하는 사람들은 내가 지금 빠져있는 것을 더 많은 사람이 알게 되길 바라는 마음이 있다. 대단한 맛집을 알게 되면 소문을 내고, 친구를 데려가고, 같은 반응을 기대하는 마음과 다를 바 없다. 덕후에게 내가 덕질하는 분야란, 그 분야의 덕후들 사이에서도 소문이 자자한 아이템이란 나만 알기에는 너무도 아까운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뉴비 시절을 떠올리며 이 분야에 더 빠르고 효율적으로 빠져들게 만들 법한 명불허전 아이템을 추린다. 그리고 이 아이템 또는 리스트가 덕후를 넘어 입문자를 비롯한 대중의 인정을 받게 될수록 명불허전의 지위는 더욱 공고해진다. 


1865 : 청개구리의 명불허전 경험담 


명불허전 아이템에는 다 이유가 있다는 말에 공감하면서도 굳이 참고하지 않고 고집을 부린 분야가 있다면 바로 와인이다. 입맛에 맞지 않아도 어떻게든 와인의 바닥을 보긴 볼 테고, 그냥 다음에 안 사면 되고, 찾아보기가 더 귀찮다는 이유였다. 더구나 와인을 구매하기 위해 자주 찾는 롯데마트에서는 와인별 정보를 꽤 상세하게 기록해둔다. 제조 국가, 탄닌감의 정도, 당도, 추천요리까지 표기한다(모든 와인에 있는 건 아니지만). 이 정보만 대충 살펴보고 구입해도 큰 실패를 하지 않았다. 오히려 특정 포도 품종으로 만든 와인을 몇 가지 먹어본 뒤 마음에 들어서 고른 동일 품종의 다른 와인에 실망한 적이 많았다. 나는 별로 와인맛에 까다롭지 않구나 싶어 그 후에도 대충 고르고 적당히 만족하며 마셨다. 적당히 3~4만 원 대의 달지 않은 와인을 고르면 얼추 취향에 맞았다. 


그러던 중 롯데마트에서 1865가 전체적으로 세일하는 걸 보았다. 와알못이라도 이름은 들어보고 병 모양은 안다는 명불허전 아이템 아닌가. 1865는 마케팅의 성공으로 특히 한국에서 인지도와 매출이 모두 높다고 한다. 특히 골프와 관련된 행운의 메시지인 '18홀을 65타에 치라'는 의미를 부여하면서 골프백 패키지까지 나오는 등 전략적 브랜딩이 제대로 먹힌 와인이다. 대중적인 마케팅으로 성공한 뒤 대중적인 와인의 지위를 기대로 유지한다는 의미는 맛 역시 대중적이라는 뜻도 된다. 다른 와인에 비해 유난히 독특하거나 호불호를 타는 맛을 가졌다면 이렇게 지금의 명성을 유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집들이나 파티 선물로도 가장 많이 추천하는 와인이다. 덕후들의 평도 대단한 맛이라기보다는 무난한 맛이라고들 한다. (하지만 가끔은 무난한 게 어려운 법이지.) 가격대가 원래 먹던 수준과 비슷한데 어떻게 한 번을 안 마셔봤을까? 그냥 반골이라서 그랬겠지만 지금 세일을 한다면? 세일 가격이 2만 원 대 후반이라면? 기회는 지금이다.


한 병은 아쉬우니 피노 누아 1병과 까베르네 소비뇽 1병을 구입했다. 1865 중에서도 가장 많이 추천하는 건 까베르네 소비뇽인데, 궁금하기도 하고 덜 유명하다고 하니 괜히 피노 누아까지 1병 사본 것이다. 그리고 결과는 역시나. 명불허전 아이템에는 이유가 있다. 덕후들이 추천하는 리스트는 집단 지성의 산물이다. 각각 다른 날 마셨는데, 피노 누아는 '뭔가 맑네, 근데 맛있다.' 정도의 감상에서 그친 반면 까베르네 소비뇽은 '아니! 1865 다음에 또 사자'가 되었다. 그렇게 갖가지 와인을 마셔놓고도 다음을 기약하기는커녕 제대로 이름을 기억하는 와인도 손에 꼽는 내가! 그동안 마셨던 와인도 좋았고, 다시 마시고 싶은 와인도 있었지만 1865를 마신 뒤의 감회는 색달랐다. 앞으로는 덕후들의 진심을 믿자, 뉴비에게 뭐 하나라도 더 괜찮고 좋은 걸 경험하게 해 주려는 마음 하나만큼은 제대로다, 뭐 이런 신앙 같은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고나 할까.


날이 쌀쌀해지니 굴과 방어를 떠올리며 입맛을 다시게 된다. 방어에는 소주만 한 술이 없지만, 이번 겨울에는 굴과 그렇게 찰떡궁합이라는 샤블리를 구해서 꼭 같이 먹어보려 한다. 샤블리는 과거에 바다였던 토양에서 자란 포도로 만든 탓에 돌맛이 나기로 유명한 와인이다. 뉴스고 SNS고 나눌 것 없이 굴 철이 되면 굴을 안주 삼아 마시라고 입을 모아 추천하는 와인이기도 하다. 작년에는 '아무리 추천해봐라, 나 마시고 싶은 거 사지'하며 콧방귀를 뀌었지만 올해는 아니다. 앞서 경험한 모든 경험치를 어떻게든 건네주려고 하는 덕후들의 내리사랑을 이제는 나도 진심으로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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