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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뷰하는리타 Dec 31. 2021

2021 술독 연말 정산 : 술 편

연말 정산은 부랴부랴 해야 제맛 2


열심히 마셨다. 그 누구보다 열심히 마셨다고 자부할 수 있을 정도로 열심히 마셨다. 종이면 종, 양이면 양, 어느 하나 빠지지 않는 한 해를 보냈다. 덕분에 12월에 건강을 다소 그르쳤다. 어쩐지. 운동을 열심히 해서 살을 빼지는 못했지만 건강한 돼지가 되어가고 있다고 믿었다. 술 마시고 다음 날 등산하고 하산하면 또 한 잔을 시작해도 꽤 괜찮았으니까. 하지만 몸은 하나라는 걸 잊어선 안 된다. 몸이 한 번 두 번 참아준다고 해서 영원히 참아주리라 기대해서도 안 된다. 그러다 크게 퍼지고 나면 건강함의 최대치가 줄어들고 만다. 최고로 건강한 상태가 예전에는 100이었다면 한 번 크게 아플 때마다 98, 94, 90..으로 줄어드는 느낌이다. 내년에 허황된 음주 목표 따위 세우지 말라는 육신의 경고로 받아들였다. 반성하는 마음으로 정리하는 2021년.


올해의 술 : 진로이즈백


생각해보니 제일 많이 마시고 있는데 따로 다룬 적이 없다. 특유의 알코올 냄새 올라오는 뒷맛이 적기로 소문난 소주. 내 기준으로 참이슬 > 처음처럼 > 진로이즈백 순으로 알코올 냄새가 강하다. 진로이즈백 없던 시절에는 처음처럼을 마셨다. 한참 소주 없는 세월을 살다가 진로이즈백이 출시되면서 내 인생에 다시 소주가 등장했다. 그 후 맥주로는 채워지지 않던 술과 안주의 기가 막히는 궁합을 다시 누리며 살고 있다. 진로이즈백을 얼떨결에 맛보았던 그날이 없었다면, 아마 아직도 맥주로 버티는 삶을 살고 있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2019년의 술도, 2020년의 술도, 2021년의 술도 진로이즈백이 되는 게 맞겠다. 회도 맥주와 먹으며 버텼던 날들을 생각하니 아득하다. 다시 돌아가지 않으려면 역시 술은 적당히.


올해의 발견 : 섀클턴(위스키)



정말 오랜만에 동반자의 단골 바를 찾았다. 그날 있었던 여러 가지 에피소드는 기억에 너무나 즐겁게 간직하고 있어서 따로 풀어낼 예정이다. 내가 위스키랑 서먹한 사이라는 건 지난 여러 편의 글에서 밝힌 적이 있다. 위스키를 대표하는 향인 오크향, 피트향이 여전히 불호이기 때문. 그럼에도 그 두 향을 걷고 나서 느껴지는 다양한 향이 매력적이라 아직 기웃거리는 중이다. 이런 사정을 듣던 바의 사장님이 입문자한테 추천한다며 맛 보여주신 위스키가 섀클턴이다.


섀클턴에는 기승전결이 완벽한 탄생비화 스토리도 있다. 내 꼭 글을 쓰리라 다짐했는데 어째 연말정산 글을 먼저 쓰게 되어 자세히 다룰 수 없는 애매한 상황이 되어버렸다. 시그넷 이후로 마음에 드는 위스키는 난생 두 번째다. 섀클턴에서는 아주 포근한 맛과 향이 난다. (술을 표현하려면 온갖 심상이며 공감각을 최대치로 발휘해야 한다) 이 포근함이 독주 특유의 날카로움을 잠재워져서 거부감이 덜 한 것 같다. 지체 없이 바틀로 사두었다. 바틀을 열어서 좀 세밀하게 맛을 보면 할 말이 더 많아질지도?


올해의 술맛 나는 안주 : 삼길포 은고을수산 대방어



서산 끄트머리 삼길포에는 동반자와 내가 환장하는 횟집이 있다. 식당은 아니고 삼길포 수산물 직매장 건물 안에 있는 가게 중 하나다. 작년부터 다니기 시작했는데 한 번도 실망한 적이 없다. 나를 만나 방어를 처음 먹어본 동반자는 은고을수산 이후로 나보다 더 격렬하게 겨울의 대방어를 사랑하게 되었다. 은고을수산의 사장님 부부를 뵐 때마다 합이 좋은 한쌍 같다는 생각을 한다. 의외로 섬세한 면이 많을 듯 한 사장님이 회를 뜨시고, 스스럼없으면서도 친근한 사모님이 손님을 맞는다. 얼룩이나 핏자국 하나 찾아볼 수 없게 정돈된 도마와 행주도 인상적이다.


한창 대방어가 제철인 시기라 너무 흔한 픽으로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은고을수산의 대방어는 다르다. 사장님이 예전에 일식을 하셨나?라는 합리적 의심을 할 만큼 손질의 레벨이 다르게 느껴진다. 한껏 지방이 오른 대방어는 숙성도 잘 되어서 혀에 집요하게 달라붙으며 뜨끈한 체온에 사르륵 녹아내린다. 생선의 표면이며 단면이며 울퉁불퉁한 부분 하나 없이 매끄럽게 썰려있는데 먹기 전에 펼쳐놓으면 영롱하다는 말 밖에 안 나온다. 방어가 없을 때에는 우럭이나 오징어회를 떴는데, 역시나 유난스럽게 맛있다. 동반자와 나는 사장님의 칼솜씨가 은고을수산의 맛을 만든다는 잠정적 결론을 내렸다. 올 겨울에는 아직 2번 밖에 못 먹었다. 겨울이 가기 전에 부지런히 먹어둘 계획이다.


올해의 술맛 나는 장소 : 목포 달밤



8월 말에 동반자와 목포에서 변산반도까지 긴 여행을 했다. 처음에는 내가 서산으로 이동한 다음 날에 출발하기로 했다. 동반자와 서산에서 만나 커피를 마시며 날씨를 살피는데 여행 기간 내내 비가 오고 태풍이 올 거라는 예보가 있었다. 동반자는 당장 떠나자고 부추겼고 나도 혹했다. 그렇게 서쪽으로 해가 지는 풍경을 구경하며 내달린 끝에 늦은 저녁이 되어서야 목포에 도착했다. 운전과 공복으로 지친 동반자를 데리고 그래도 신나는 저녁을 먹어보겠다고 유달해수욕장을 어기적대며 걸어갔다. 8월 말이라 반드시 야장을 하고 싶었는데, 가게마다 어찌나 사람이 많은지.


더 이상 못 가겠다 싶은 지점에 있는 가게에서 조개구이를 팔았다. 평소라면 해변가의 조개구이는 반드시 눈탱이를 맞게 되는 선택이라며 피했을 것이다. 그날은 지치기도 손님 수를 보니 중간은 하겠지 대충하는 마음으로 들어갔다. 숯불은 뜨겁고 날은 아직 덥고 술기운에 얼굴은 금방 달아올랐지만 술맛이 제대로 났다. 바로 앞에 화려한 조명이 들어온 목포대교가 있었고, 아래를 내려다보니 철썩이는 파도가 있었다. 조개구이보다 풍경이 술맛에 불을 지폈다. 안주도 술도 조금 부족할 때 시간도 부족했다(코로나 시대의 통금). 아쉬운 대로 메인 안주 대신 사이드인 해물라면을 시켰는데 이게 또 그렇게 별미였다. 신나게 소주 3병을 비우고 들어갈 때와는 전혀 다른 텐션으로 나왔다.


올해의 한(恨) : (참지 못한) 투다리 김치우동


사이좋게 은행 하나씩 빼먹고 아 맞다 한 뒤에 찍은 사진


술병이 나면 꼭 드는 생각이 있다. 마지막에 그거 하나만 참을 걸, 하는 부질없는 후회. 아직 선명한 후회가 바로 투다리 김치우동이다. 투다리는 꼬치와 기타 등등이 메인이지만 사실 아는 사람은 다 아는 김치우동 맛집이다. 서산 투다리도 마찬가지라서 종종 2차로 간다. 삼겹살 먹고 냉면을 참는 대신 투다리에 가서 김치우동을 먹는 코스를 애정 한다. 얼마 전 고깃집에서 반주를 시작했다가 결국 고기를 안주로 변질시켜버렸다. 쌀쌀한 날씨에 코앞의 투다리를 그냥 지나치기란 어렵다. 신이 나서 투다리에서 2차를 하며 김치우동을 신나게 먹었다.


그다음은 예견된 수순이었다. 이틀 뒤 위장에 구멍이 뚫린 듯 앓았고 동반자와 나는 같이 반성하며 주범으로 투다리의 김치우동을 지목했다. 걔만 참았으면 이렇게까지 탈이 나진 않았을 텐데. 아니 그래도 김치우동은 못 참지. 그래도 딱 고깃집까지만 했으면... 의 무한 굴레. 올해 슬개골 부상, 코로나19 확진, 위장 대참사 등 많은 일을 겪었다. 사실 여기저기 잘 다치는 편이라 2021년이 유난했다고 하긴 어렵다. 그래도 2021년의 마지막을 크나큰 교훈으로 장식하게 만들어준 김치우동은 박제해야 마땅하다. 어차피 내년에도 먹으러 가겠지만, 조금 덜 나대겠다는 얄팍한 다짐 정도는 해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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