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섀클턴이 이 섀클턴이었어?
2021 술독 연말 정산 : 술 편 에서 올해의 발견으로 선정된 섀클턴은 흔한 블렌디드 몰트 위스키이지만 맛을 잊게 하는 히스토리가 있는 술이다. 내가 섀클턴을 만나게 된 과정도 꽤 범상치 않다. 2021년이 저물어가던 무렵 동반자의 단골 바를 거의 2년 만에 찾았다. 어디까지나 동반자의 단골 바이지 '우리'의 단골 바가 아니었던 탓에 사장님은 우리를 기억하지 못했다. 다만 동반자를 보고 '낯이 익은데?'라며 기억을 한참 더듬었다. 내가 지난 방문의 에피소드를 몇 가지 털어놓아도 사장님의 떠난 기억은 돌아오지 않았으나, 주문하지 않은 온갖 술이 나오기 시작했다. 한산 소곡주를 도수별로 내어주셨다가, 독주에 취약한 내가 이목구비를 얼굴 가운데로 모아 보이면 칵테일이 나왔다가, 위스키와 영 친해지지 못하고 있다는 말에는 위스키가 줄줄이 나오기까지. '정말 글렌피딕 12년에서는 서양배 맛이 나는가'를 논하기 위해 '서양배 맛은 무엇인가'부터 알아야 한다며 배맛 앱솔루트를 꺼내 글렌피딕 12년과 전격 비교하기도. (글렌피딕 12년에서 서양배 맛은 못 찾겠지만 글렌피딕 12년이 꽤 괜찮음을 알게 된 게 성과다.)
이렇게 술이 술을 부르는 술판에서 갑작스럽게 술꾼의 가슴에 낭만을 지핀 술이 바로 섀클턴이다. 사장님이 위스키 입문자에게 추천한다며 맛 보여준 섀클턴은 처음에 병에 적힌 이름조차 제대로 읽지 못했다. (동반자는 '스켈레톤?'이라며 또 활자를 마음대로 읽었다.) 모름지기 바텐더라면 술의 맛은 물론이고 역사에도 빠삭해야 손님과의 대화가 마 뜨지 않는 법. 사장님은 섀클턴의 탄생 비화를 아주 간략하게 설명했다. 남극에서 잠자고 있던 위스키를 나중에(100년 만에) 꺼내와서 재탄생시킨 위스키라고. 알딸딸한 와중에도 이 간략한 설명 속 세세한 사정이 궁금했다. 왜 남극에서 위스키가 잠을 잤지? 어떻게 꺼내왔지? 그리고 위스키를 재탄생시키는 건 어떻게 하는 거지? 물론 궁금증을 해소할 수 있었던 건 다음 날이다.
사장님의 간략한 이야기에 디테일을 더하면 섀클턴의 탄생 비화는 보다 극적으로 변한다. 어니스트 섀클턴은 로알 아문센, 로버트 스콧과 비견되는 남극점 정복이 치열하던 시기의 탐험가다. 1901년, 1907년 2번에 걸쳐 남극점 탐험에 도전하지만 실패한다. 결국 로알 아문센에게 최초 타이틀을 빼앗기고 시간이 흐른 1914년에 남극 횡단을 목표로 탐험대를 꾸려 다시 모험을 떠난다. 이 모험은 섀클턴의 가장 유명한 탐험이자 인류 역사 상 가장 위대한 실패로 회자된다. 남극이라는 극한의 환경과 온갖 악조건을 다 갖춘 상황에서도 3년을 버텨 사망자 없이 모든 구성원이 생환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 결과는 모든 구성원의 생존을 최우선 과제로 삼은 섀클턴의 리더십 덕분이기도 하다. 이쯤 하면 위스키 섀클턴은 탐험가 어니스트 섀클턴의 이름에서 따왔다는 사실을 추측할 수 있다. 섀클턴은 왜 위스키를 남극에 재워놓았을까?
당연히 일부러 그런 건 아니다. 섀클턴의 두 번째 남극 탐험이었던 1907년, 탐험대의 배인 님로드 호에는 당시 맥킨레이 사의 스카치위스키가 25 상자(!) 실려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섀클턴이 남긴 기록에서 5 상자를 베이스캠프에 묻어두었다는 내용이 발견됐다. 남극점에서 고작 156km 떨어진 지점을 마지막으로 남극점 정복에 실패하는 바람에 탐험대는 베이스캠프로 돌아가지 못하고 철수했으니, 묻어놓은 위스키는 그 상태 그대로 얌전히 있으리라는 결론이 나온다. 제조사인 맥킨레이가 계속 위스키를 만들어 팔았다면 아무 문제가 없었겠지만, 2번에 걸친 세계대전과 금주법을 거치는 난리통에 제조법이 소실됐다. 맥킨레이를 인수한 화이트 앤 맥케이는 탐사 100주년이 되는 2007년에 남극으로 전용기를 보내 100년에 걸쳐 남극의 차가운 빙하 속에서 천천히 숙성되었을 원본 제품을 찾는 데 성공한다. 세계적인 마스터 블렌더들에게 이 100년 묵은 위스키를 보내 제조 레시피를 복구한 끝에 탄생한 위스키가 바로 탐험대의 대장 어니스트 섀클턴의 이름을 딴, '섀클턴'이다.
내 책장에는 이 어니스트 섀클턴의 마지막 탐험이었던 남극 횡단의 이야기를 담은 <인듀어런스: 어니스트 섀클턴의 위대한 실패>가 10년 넘게 꽂혀 있었다. 넘쳐나는 책을 정리해야겠다고 분연히 떨치고 일어난 작년 어느 날, 10년 넘게 읽지 않았으니 폐기해야겠다 싶어 책장에서 뽑아버린 게 함정이지만. 위스키 섀클턴의 탄생 비화에 감동한 나는 그제야 <인듀어런스>를 읽고 싶어졌다. 무엇 하나 함부로 버리지 못하는 엄마 덕분에, 작년에 숙청당한 책 중 중고 서점에 팔아버린 60권 외 대부분의 책은 여전히 창고에 쌓여있었다. 폐품 뭉치와 무거운 책 더미를 한참 이리저리 들춰가며 찾았지만 <인듀어런스>는 감쪽같이 사라져 있었다. 남극에서 100년 잠자던 위스키도 찾아내는데, 나는 치운 지 1년 남짓인 낡은 책을 창고에서 찾는 것도 못하나. 그 섀클턴이 이 섀클턴이라는 걸 1년만 일찍 알았더라면! 신나게 책을 읽고 책장 한편에 (아마 평생) 자리를 마련해주었을 텐데. 원통하다.
술맛이 마음에 들었는지, 드라마틱한 탄생 설화가 마음에 들었는지 확실치 않지만 나는 기꺼이 섀클턴을 바틀로 샀다. 섀클턴을 머금고 혀로 액체를 톡톡 건드리면 묘하게 포근한 느낌이 혀와 몸을 감싼다. 촉감이 좋고 가벼운 털이불 같기도 하고 적당한 거리에서 적당한 온도로 빛을 내어주는 모닥불 같기도 하다. 잠이 오지 않는 날 섀클턴을 두 잔 정도 마시면 잠이 솔솔 온다는 사장님의 경험담은 안 겪어보고도 공감이 가능하다. 세상에서 가장 추운 세계로 탐험을 떠나는 사람들이 왜 이 위스키를 여행의 동반자로 삼았는지 이해하고도 남는다. 섀클턴이 낸 탐험대 모집공고 그대로의 환경, 즉 혹한의 추위에 일은 어렵고 보수조차 적은데 귀환 가능성조차 보장되지 않는 환경에서 위스키 한 모금이 주는 찰나의 포근함은 얼마나 귀했을까.
이렇게 맛도 나름의 특색이 있지만 사실 재탄생한 섀클턴은 어쩔 수 없이 '맛은 둘째 치고'인 위스키다. 술을 마시려는 목적 하나로 날씨, 기분, 경조사, 나라꼴, 주변인의 신상까지 신경 쓰며 이유를 만드는 술꾼들의 마음을 제대로 저격하는 히스토리를 가진 술이니까. 섀클턴을 마시는 사람은 남극의 빙하를 상상하게 하는 연한 하늘색의 바틀과 지구본을 생각나게 하는 디자인을 보면서, 실온에서 니트로 마시는 게 최고라는 위스키의 상식을 거스르고 굳이 차갑게 마시면서 이 술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추운 날이면 세상에서 가장 추운 땅에서 100년 간 버틴 술이라며 한 잔. 더운 날이면 이 술은 다른 위스키와는 달리 차갑게 먹어야 제맛인 술이니까 한 잔. 시답지 않은 지루한 날에는 역사 상 가장 위대한 탐험가의 정신을 기리며 한 잔.
그럼, 이렇게 이유 갖다 붙이기 좋은 술이라면 맛은 두 번째가 될 수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