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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뷰하는리타 Jan 19. 2022

술 가지고 장난치지 마 : 바밤바밤

술이 장난이야? 장난이냐고? (정색)

마트 주류 코너에 가면


마트에 장을 보러 가면 주류 코너에서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낸다. 구매할 술이 정해져 있어도 매번 구경하느라 바쁘다. 새로 나오거나 새로 들어온 술이 있는지, 어떤 술을 할인하고 있는지, 색다른 기획전을 하는지 살펴본다. 이제는 꼭 눈으로 봐야 아는 세상이 아니건만, 온라인에서 펼쳐지는 치열한 마케팅은 트렌드에 무심한 나에게까지 도달하지 못한다. 새로운 술이 나오면 미리 소식을 들어서 아는 경우보다 직접 판매처에 가서 보고 아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 마트에 갈 때마다 새로운 무엇을 발견하고 놀라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마트 진열장은 한정된 장소를 차지하려는 숱한 브랜드의 각축장이기에 우리가 느끼는 것보다 역동적으로 바뀐다. 몇 가지 소주나 맥주를 제외하면 은근히 위치가 변하는데, 그걸 살피는 재미도 쏠쏠하다.


이전에는 본체만체하던 막걸리 진열대에서도 요즘은 한참을 머무른다. 등산을 다니게 되면서 마시게 된 막걸리가 반주로 얼마나 적합한 술인지 최근에 깨달았다. 과음을 피하면서 간단히 반주를 하고 싶다면 막걸리처럼 좋은 술이 없다. 배가 불러서 많이 마시지 못하고, 나와 잘 안 맞는 술이라 얼굴이 금방 달아오른다. 식사를 마칠 때쯤이면 술을 더 마시고 싶은 욕구가 사라진다. 술이 술을 부르는 대부분의 주종과는 사뭇 다른 양상이다. 많아야 두 병에서 끝나므로 그 어느 때보다 신중하게 오늘의 막걸리를 고른다. 너무 신중한 나머지 아무리 눈이 마주쳐도 외면하던 막걸리가 몇 있다. 지평생막걸리는 너무 흔해서 여러 번 외면하다 마셨다. 장수막걸리는 아는 맛이라 아직도 외면한다. 국순당의 바밤바밤은 패키지와 이름에 시선을 무척 자주 빼앗겼지만 오래, 격하게 저항했다. '술 가지고 장난치는 건 무조건 질색이야.'라며 내 안의 아재가 고개를 저었다. 


괴식의 시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내 기억으로는 처음처럼 순하리가 잘못했다. 시작은 유자맛이었다. 12도의 낮은 도수에 달달한 유자의 맛과 향이 가미된 소주. 도수가 낮으니 평소보다 여러 병을 마실 수 있어 순하리 소주병을 줄 세운 사진도 SNS에서 여럿 봤다. 당시는 소주를 한창 잘 마실 때였는데, 하도 소문이 시끄럽길래 친구 커플과 순하리 한 병을 시켜 마셨다. 셋 다 반응은 똑같이 불호였다. 미지의 무엇을 경험하고 짓는 '도대체 이게 뭐지?'라는 표정이 세 얼굴에 일제히 떠올랐다. 얼른 시킨 병을 비우고 일반 소주로 돌아갔다. 소주는 이미 충분히 달다. 거기에 지나치게 들척지근한 것을 끼얹으니 술이 너무 장난 같다는 반감이 들었다. 왜, 이럴 거면 음료수를 마시지?라는 흔한 멘트가 절로 나오는 맛이랄까.


먹을 게 귀한 유년기를 보낸 부모님 세대까지만 하더라도 음식으로 장난을 치는 건 죄악이었다. 세상 모든 것으로 장난을 치던 어린 시절은 숨 쉬듯이 혼나는 게 일상이지만 그중에서도 먹는 걸로 장난을 쳤을 때 제일 크게 혼났다. 이런 가르침을 받고 자란 우리 역시 먹을 걸로 장난치는 상황에 즉각적인 분노 반응을 보인다. 가공식품을 만드는 기업에서 재료를 속이거나 공정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면 '다른 것도 아니고 음식에 장난을 쳐!'라며 순식간에 여론이 들고일어난다. 건강, 나아가 죽음과도 직결되는 문제라 본능적인 혐오감과 분노를 보이는 것이기도 하겠지만. 그런데 음식의 영역에서 취향, 문화, 장난 사이에 낯선 영역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바로 괴식이라는 오묘한 지대다.


괴식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예를 들어 보자면 콩국수에 무얼 넣어먹느냐가 있다. 콩국수에 소금을 넣는 사람은 설탕을 넣는 사람의 취향을 괴식으로 보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콩국물에 어울리는 맛을 다르게 판단하는 취향과, 자란 지역의 문화 차이(콩국수에 설탕을 넣어 먹는 대표 지역은 전라도)가 선호도를 만든다. 그리고 확연히 다른 취향을 보았을 때 좋게 말하면 신기함을, 나쁘게 말하면 괴이함을 느낀다. 그래도 콩국수에 설탕이냐 소금이냐는 점차 취향의 영역으로 존중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빵에 김치는? 밥에 콜라는? 여기까지도 취향이라고 치자. 근데 번데기 볶음밥은? 삼겹살 팥빙수는? 여기서부터 장난이 끼어드는 느낌이다. 반민초파인 나는 좋은데이 민트초코 소주를 봤을 때 이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고, '아 진짜 술로 장난치지 므르..'를 읊조렸다.


괴식이 트렌드로 자리 잡은 지는 몇 년 흐른 듯하다. 왜 유튜브에서 많이 보이는 괴식들 있지 않나, 신호등 치킨이라든지 라떼 치킨이라든지 라임맛 라면이라든지. 괴식 신상품이 족족 출시된다고 '음식으로 장난을 쳐?'라며 이를 앙 다문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유난히 민초맛 소주는 나를 자극했다. 내가 술에 너무 진심이라서가 아닐까. (민초를 싫어하는 마음도 못지않게 진심이고.) 식품으로써 문제만 없다면 음식에 이런저런 시도를 해보는 '장난'은 상관없다는 입장이지만 술에게만은 그럴 수가 없었다. 아, 이게 바로 음식으로 장난치는 꼴을 못 보는 부모님 세대의 마음인가.


하지만 술로 치는 장난은 이제 시작이었다. 곧 콜라보 맥주가 돌풍을 일으켰다. 말표, 백양, 금성 맥주처럼 레트로 느낌을 주는 브랜드와 협업한 맥주는 문제 될 게 없었다. 말표 맥주에 말표 구두약을 넣었다거나, 속옷 우린 물을 백양 맥주에 넣은 건 아니니까. 곰표 맥주도, 진 라거도 괜찮다. 밀맥주는 원래 있었고 진 라거에 진라면 스프를 녹인 것도 아니니까. 하지만 쥬시후레쉬 맥주는 진짜 선 넘었지. 민트에 초코도 힘든데 거기에 소주를 끼얹어? 메로나에 이슬은 또 웬 말이야? 대체 아이셔는 소주에 왜 타서 먹지? 여러 가지 술을 맛보기 좋아하는 술꾼은 마트 진열대에서 새로운 술을 찾을 때마다 좌우상하로 지진이 나는 동공을 진정시켜야 했다.


추억이 이렇게 무섭습니다


쓰고 보니 절규에 가깝게 느껴지지만 뭐, 사실 그리 심각하진 않았다. 나에게 이런 술은 당연히 불호일 테니 피해 가면 되는 일이었으므로. 나에게는 불호지만 누군가에게는 열광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모르는 바도 아니다. 하지만 이런 자신만만함 또한 함정이었다. 그동안의 콜라보 주류는 기본적으로 내가 좋아하는 것(술)에 내가 싫어하거나 관심 없는 것(콜라보 대상)을 섞은 모양새였다. 당연히 쉽게 피할 수밖에. 민트초코와 메로나, 온갖 과일향 시럽은 싫어하고 쥬시후레쉬, 아이셔에는 썩 관심이 없다. 그러나 최근 흔한 80년대생의 취향과 추억이 발목을 잡았다. 국순당의 바밤바밤 막걸리와 처음처럼 빠삐코를 사고야 만 것이다. 제대로 걸려들었다는 게 이럴 때 쓰는 말인가.


장고 끝에 집어 든 바밤바밤은 구입한 바로 그날 마셨다. 결과는, 예상은 했지만 역시 불호였다. 바밤바는 아이스크림 속 밤 페이스트의 맛과 중간중간 씹히는 밤 알갱이가 매력적이다. 반면 막걸리 바밤바밤은 밤 냄새보다 아주 강렬하게 단내를 풍기는 바닐라 향이 압도적이다. 첫맛은 니글니글한 바밤바 녹인 맛이 나고, 막걸리 특유의 탄산 쏘는 맛이 뒤에 남는다. 내 기준으로는 전혀 어우러지지 않는 느낌. 의기소침해진 나는 같이 사온 처음처럼 빠삐코는 열어보지도 않았다. 하루에 추억의 맛을 두 번이나 더럽힐 수는 없는 법이다.


앞으로도 (내 기준) 장난 같은 온갖 술이 한참 나오겠지만 그렇다면 부디. 차라리 단호히 돌아설 수 있는 조합이길 바라본다. 하리보 소주라거나, 당근 맥주라거나. 분명 좋아하는 사람... 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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