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어린 시절은 어땠을까? 생각이 나기 전에는 엄마의 이야기가
인생 2막을 어떻게 살아야 하나?
수많은 사람들이 고민을 하고 있다.
필자 또한 고민을 많이 했고,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지 알아보고 무언가에 도전을 많이 해왔다.
그래서 책을 써보자고 작가가 되어보자!
나의 어린 시절
글을 적으려 회상하다 보니 잠깐씩 생각이 스쳐 지나는 일들이 떠올라 옮겨 본다. 내 기억에 없는 것은 엄마가 들려주었던 이야기를 적었다.
우리 집 대청마루가 당시에는 높아 보였고, 디딤돌을 밟고 오르내리기 했는데 일은 해야 되고, 애기가 마루에서 떨어질까 봐 발목을 묶어서 삼층장 다리에 매어 놓고 일하러 다녔다고 한다. 아장아장 걸을 때는 도장(농기계 넣어 두는 창고)에 들어가서 양잿물을 입에 넣어서 입이 퉁퉁 부어 당나발이 되어 쌀뜨물로 씻어냈다고 한다. 아무거나 입으로 가져가는지라 땅에 떨어져 있는 닭똥도 손으로 조물조물해서 입에 넣었다는데 어이 더러워. 세 살 때는 장에 나가 빨간 원피스를 사다가 입혀놓으니까 동네 어르신들이 천사 같네라고 말했다며 커오는 동안 몇 번을 말해주었다.
죽을 뻔한 고비를 넘긴 일이 많다며 하느님이 그때부터 도와주신 거 같다고 한다.
동네 뒷산과 마을 전체가 놀이터였다. 뒷산에는 계곡이 있었다. 바위로 물이 흘려내렸는데 여름엔 그곳에서 미끄럼 타고 멱감으며 놀았던 것이 생각이 난다.
우리 집엔 머슴이 있었다. 할머니의 친정 조카였던 아저씨. 농사일이 많다 보니 남자의 손이 필요했기에 우리 집에서 기거를 하며 농사일을 돕는 분이다. 농번기에는 일을 마치면 심부름으로 막걸리 받아 오라고 한다. 다섯 살 아이가 무슨 힘이 있다고 시켰는지. 주전자를 들고 동네 어귀로 가서 막걸리 주세요. 한 주전자 담아 주면 집까지 오다가 반은 질질 쏟았고, 무슨 맛일까 먹어보기도 했다. 너무 일찍 막걸리 맛을 봤나?
증조할머니가 허리가 굽어서 할머니 등에 올라타고 말타기하면 할머닌 내가 떨어질까 봐 점점 더 허리를 구부리며 힘들어하셨다. 우리 예쁜 증조할머니 흰머리를 비녀를 질러 평생을 사셨고, 아흔이 넘어서 돌아가셨는데 사시는 동안 우리 집에서 사셨다. 할머니랑 사이가 안 좋아지면 작은할아버지 댁으로 가셔서 계시다가 오시곤 했다. 어릴 땐 왜 저러시지? 이해를 못 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참 안 됐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할머닌 청상과부로 나이 스물일곱에 혼자되었다. 시부모님과 같이 살아야 했던 그때 증조할아버지가 워낙이 엄하셔서 며느리를 혼내고, 화날 땐 매질까지 했다고 한다. 증조할아버지 환갑이 지나 돌아가시고, 증조할머니 혼자 남으시니 증조할아버지께 당했던 설움을 증조할머니에로 쏟아 냈던 것이다. 온순하기만 했던 증조할머니 며느리인 할머니에게 말도 제대로 못하고 사셨던 것은 기억이 난다. 내가 중학교 졸업할 즈음에 돌아가셨으니 말이다.
다섯 살 때 논 옆에 있는 웅덩이에 빠져서 허우적대다가 풀을 잡고 겨우 나온 기억도 있다. 일곱 살 때는 집 앞에 통시(화장실)가 있는데 급한 나머지 들어갔다가 통나무가 굴러서 똥통에 빠져 겨우 나왔다. 당시에는 농사를 지으면 인분으로 밭에 뿌려 거름을 했기에 안에는 제대로 만들어져 있지만 밖에는 수시로 퍼서 밭에 뿌려야 하기에 통나무를 걸쳐 놓았던 것이다. 울던 나를 보며 할머니가 뛰어나와 샘터에서 씻겨주며 구시렁대던 말도 귓전에 들리는 듯하다. 빠진 통시에 가서 개떡을 먹어야 안 죽고 오래 산다며 쑥으로 개떡을 만들어 주며 들고 통시에 가서 우웩 하며 먹었던 일도 생각이 난다.
초여름 비 오는 날은 대청마루에 앉았다가 우물가에 서 있던 개살구 나무에서 살구가 떨어지면 쪼르르 달려가서 주워 먹었는데 그땐 그렇게 맛있었지만 지금은 신 것을 먹을 수 없다.
일곱 살 초등학교에 입학했는데 엄마는 구미에 따로 살림 나서 단칸방에 가게 있는 방 얻어서 나가서 살았다. 킹양화점이라고 원평동에서 했는데 엄마는 먹고살려고 별 걸 다했다. 계절에 나오는 과일은 과수원에서 가져다 팔기도 했고. 동생을 임신해서 배가 부른데도 머리에 이고 다니며 열심히 살았다.
학교에서 운동회를 했는데 엄마는 분홍색 한복을 입고 학교에 왔다. 학교에는 통시가 아래가 깊어서 무서워서 억지로 들어갔다. 이모랑 친구들이 이야기해 주는데 파란 종이 줄까? 빨간 종이 줄까? 하며 귀신이 나온다고 해서 그 생각 때문에 들어갈 때면 아주 곤욕이었다. 특히 여름에는 냄새가 고약하고 구더기가 바닥을 기어 다녀서 피해서 발을 놓느라 아주 힘들었다.
불주사 놓는 날 알코올에 불 켜놓고 주사 끝을 대었다가 내 눈에만 그렇게 보였을까? 안 맞으려고 울면서 도망 다니고 선생님이 안아서 억지로 맞히는데 피하다가 주삿바늘이 살을 그어 상처가 아직도 있다는 거다.
마을 어귀에 돌 할 방이 있었는데 얼마나 커 보였는지 지나다닐 때마다 내가 얼마나 컸나 키를 재어보기도 하고, 효열비각이 저수지 근처에 있었는데 귀신 나온다며 피해서 돌아다니기도 했었다. 대구 사시는 작은 집 아버지가 엽총을 들고 가끔 우리 집에 꿩사냥하러 왔다. 꿩을 “내가 봤는데 저기 산이요” 하며 가르쳐 주기도 했고, 꿩알이 움직일 수 있긴 하나? 봤다고 거짓말해서 산을 뒤지기도 했다. 산어귀에는 상엿집이 있어서 귀신 나온다며 가까이 가지도 못했다.
동네 아이들이랑 (전부 촌수가 높아 아재고, 할아버지 뻘이 되는 일가친척들) 복숭아 밭에 서리하러 가서 망보고 있다가 풋복숭아를 따서 나눠주면 옷에 받아가지고 왔다가 옷에 슥슥 닦아 먹고는 몸이 가려워서 혼났던 일들도 떠오른다.
우리 집에는 큰 개를 키웠는데 어느 날 개가 죽었다. 쥐를 잡으려고 약을 묻혀서 둔 무언가를 먹어서 그런가 보다. 친구처럼 잘 지냈던 개였는데 그렇게 보내고 나서는 개가 무서웠다. 마당 넓은 집 주변에는 땡감나무, 살구나무, 대추나무가 있었다. 마당 한편에는 우물이 있었는데 동네 사람들이 우리 집으로 물을 길으러 왔다. 우물 속을 내려다보면 얼굴이 비치기도 했다. 우물 안에 보이는 내 얼굴을 보며 두레박질을 하며 자랐던 촌아이다.
강산이 바뀌기를 몇 번 촌동네는 어디로 사라지고 아파트가 빼곡히 들어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