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미로 이사 나와서 생각나는 이야기
오 남매의 맏이로 어렵게 살던 시절에 부모님의 일하는 것을 도우며 동생들을 보살펴가며 학업을 했기에 힘들게 살아왔다.
일 학년 일 학기를 마친 여름방학 엄마가 사는 구미로 옮겨갔다. 동생 둘은 할머니와 시골에 남아 있었다.
방학이 끝났는데 다시 학교에 가지 않았다.
다음 해에 구미초등학교로 다시 입학을 했다.
우리 가게 옆에는 구미에서 제일가는 부잣집이 있었는데 그 집의 벽에는 유치원 졸업사진이 걸려 있었다. 늘 담너머로 보이는 것들을 부러워하였다. 우리 집은 셋방이라 방도 좁고 세간살이가 없었다. 입학하고 보니 그 부잣집 아들이 우리 반이었다. 그 아이도 얼마 다니지 않아 학교를 그만두었다. 다음 해에 후배로 다시 들어왔다.
우리 집은 양화점이라 위험한 물건들이 많았다. 그런데 주인집 아들이 가게에 와서 구둣주걱을 만지고 있어 위험하다며 칼을 뺏다가 내 얼굴을 찔러 피를 흘리고 병원에 가서 꿰맸다. 병원 가는 걸 무서워해서 마무리하러 가지 않아 상처가 남아있다.
양화점의 일이 밀려 바쁠 땐 구두 밑창에 사포질 하는 것을 도왔다. 본드칠을 하려면 사포로 고무창을 밀어서 거칠게 해야 구두와 창이 잘 붙는다. 어린 나이였지만 시키면 곧잘 했다.
일 학년 때 선생님은 연세 있으신 분이었는데 매일 사탕을 드시곤 했다. 10원을 주며 사탕을 사 오라고 심부름시켜서 사다 드리면 사탕 하나를 주시곤 했다. 각설탕이 붙어 있는 사탕. 지금도 그런 사탕이 있긴 한데 그 맛이 나질 않는다. 당시에 학교에 작은할아버지가 근무하셨는데 급식으로 나오는 옥수수빵을 반학생들에게 나눠 주고 남으면 집에 가서 먹으라고 챙겨 주시곤 했다.
드라마 여로를 한창 재미있게 보던 해라 주인집 마루에 텔레비전이 있어서 우린 그곳에 가서 보곤 했다. 그런데 주인집 아들 녀석이 걸핏하면 가라고 했다. 집 없는 설움이 많았는데 이듬해에 우리도 구미에 집이 생겼다.
2학년 때 봉곡에 있는 집을 팔아 시장에 집을 사서 할머니와 식구들이 모두 이사를 나왔다. 그 넓고 큰 촌집을 20만 원에 팔고 구미에서는 60만 원에 샀다고 한다. 엄마, 아버지가 열심히 벌었던 모양이었다. 시장에는 장날이 아니면 텅 비어있었다. 새끼줄로 서까래에 그네를 매어 놓고 타다가 떨어져서 머리를 다쳐 꿰매기도 했고, 회전그네 타다가 떨어져서 다리를 다치기도 하고, 할머니 말씀이 이사를 잘 못 나와서 그렇다고 액땜이 많다고 했다.
당시에는 지저분하게 머릿니도 많았고, 빨간 내복에도 겨드랑이나 옷의 박음질되어 있는 부분에 이가 알을 낳아서 그 옷에다 가루약을 뿌리기도 했고, 참빗과 씨가 리빗이라는 걸 수시로 사서 머리를 빗겨주기도 했던 지저분했던 옛날이야기.
우리 집은 시장 안에 있기에 장날이면 약장사가 온다. 집 바로 옆에서 약을 파는데 깨진 유리 위에 사람을 눕혀 놓고 그 위에 돌을 얹여 망치로 깨기도 하며 약을 팔기에 우린 그 약을 먹으면 그렇게 되는 줄 알았다. 회충약을 먹으면 많이 나온다고 병에 넣어서 들고 다니며 약을 팔기도 했다.
2학년 때는 반에서 미술시간에 그림을 그려 제출했는데 선생님이 영남일보주최 그림 그리기로 출품을 했는가 보다. 그곳에서 입선을 했다. 나보다 훨씬 잘 그렸던 친구는 못 받았는데 어쩌다 내가 받게 되었는지 그때 엄마가 좋아했던 기억이 있다.
열 살이 되니 동생이 넷이나 되어 초등학교 3학년때는 엄마가 대구에 물건 하러 가면 학교 갈 때 세 살 동생을 데리고 가서 옆에 앉혀 놓고 수업을 들었다. 3학년 때 짝꿍을 몇 년 전에 만났더니 “야 네 동생 잘 있냐” 고 물어서 웃기도 했다. 생각도 못했는데 그 친구 덕분에 그때 일을 떠올렸다.
4학년 즈음에 구미중앙시장이 들어온다고 우리 집이 길로 들어가야 되기에 허물어야 된다고 했다. 집이 반이상이 시장으로 들어가기에 상가를 두 개 배당받았다. 그리고 집이 지어질 때까지 학교 근처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못 먹고살던 시절이어서 주인집에서 귤을 먹다가 덜 먹고 버리면 그걸 주워 먹었다. 단칸방에 식구가 8명. 할머니, 엄마, 아버지, 5남매.
누군가 오줌을 싸면 전체가 다 젖는다. 빨래가 나오면 대야에 담고 비누랑 방망이를 가지고 냇가로 간다. 혼자서 갈 때도 있고, 친구랑 같이 갈 때도 있다. 냇가에서 반듯하고 좋은 돌을 맡아야 빨래하기가 좋다. 흐르는 물에 똥 묻은 기저귀를 흔들면 떨어져 나가고, 비누질해서 방망이로 펑펑 때린다. 기저귀가 구멍이 날 정도로 때리면 스트레스가 풀리는지 그렇게 했다. 빨래를 하고 집으로 돌아온다. 동생의 똥기저귀 빨기가 힘들고 싫어서 제발 동생 낳지 말라고 엄마한테 사정까지 했단다. 그래서 여섯째는 빛도 못 보고 말았다.
우리 엄마 늘 내게 그랬다. 너 때문에 유산했다면서 너는 회개해야 된다고.
할머니가 아들 한다고 내 또래의 남자아이를 데리고 왔는데 한 달쯤 있다가 돈을 훔쳐서 도망갔다. 붙잡혔는데 다시는 안 그런다고 했지만 엄마가 내쫓았다. 이후론 본 적이 없다.
집이 지어졌는데 반이 길로 들어가는 바람에 세모잡이 집이 되었다. 새 집이라 좋았지만 넓었던 집이 좁아져서 많은 가족들이 살기엔 옹색했다. 그 집이 지금 중앙시장에 다모아 순대다.
양화점을 하다가 싫증이 났는지 가구점을 열었다.
공장을 얻어 놓고 만들어서 시장엔 가게로 진열을 해놓았는데 솜씨가 좋았던 탓에 잘 되었다. 수시로 장롱이 만들어져서 팔려나갔다.
조각농도 있었고, 자개농도 만들고 있었는데 조각하는 사람과 칠하는 사람을 두고 하다가 배우고 나서는 내보내고 아버지 혼자 다했다.
그래서 엄마와 내가 많이 도왔다. 학교 마치면 공장으로 가서 자개농에 자개를 붙이려면 보드라운 사포로 칠해놓은 곳을 닦아내고 그 위에 자개를 붙이고 다시 칠을 해서 마무리를 한다. 나무를 자르거나 대패질하면 부스러기가 많이 나오는데 수시로 자루에 담아내고 청소하는 것도 했다. 그 공장에 담옆에는 감나무가 있었다. 개가 있었는데 감꽃 따려고 하다가 다리 뒤에 물렸다. 개한테 물리면 광견병 생긴다고 바로 병원으로 데리고 갔다. 그러고는 개털을 깎아서 태워 참기름에 개어 상처에 바르면 된다고 할머니가 해주었는데 그 상처가 문신처럼 약간의 색이 남아있다. 개한테 물리고는 얼마 되지 않아 가구점도 접었다.
우리 집은 이상하게 돈이 벌릴만하면 그만두었다.
중학교 입학할 무렵엔 닭집을 했다.
경주아저씨가 닭을 실어다 주면 생닭을 잡아서 파는 것이다.
직업이다 보니 엄만 그 일을 잘했다.
뒷 일을 나한테 시켰다.
닭똥집 잘라서 안에 붙어있는 모래주머니 벗기고 창자는 갈라서 깨끗하게 씻어주면 그걸 볶아서 술안주로 팔기도 했다. 중학생이 공부해야 되는데 학교만 갔다 오면 일을 시키니 공부도 못하고 손에 닭똥냄새 배이게 일만 해야 했다.
1학년 때 학교 앞에서 아이스크림을 사 먹다가 선생님께 걸렸다. 절친 네 명이 같이 걸렸는데 나만 혼나지 않았고, 친구들은 혼났다. 같이 걸렸는데 나만 빠졌을까? 친구들에게 굉장히 미안했다. 한 친구가 대구로 전학을 갔다. “엄마 나도 대구로 보내줘”라고 졸랐는데 결국은 못 갔다. 선생님이 잘하는 말이 “바보 같은 사나이들” 여중생에게 그런 말을 자주 했다.
3학년 때는 첫사랑 체험수기 이런 내용 책을 많이 봤다.
한 친구가 좀 성숙했는데 책을 가져오면 서로 돌려가며 보기도 했다.
당시 노래 “돌아오지 않는 강”을 조용필이 노래했다. 지금도 그 노래를 좋아한다. 어느 오빠의 휘파람으로 부는 돌아오지 않는 강을 부르는 내용을 보며
내가 그 책 속의 주인공이 된 마냥 빠져 들기도 했던 시절이었다.
고등학교에 가야 되는데 여중에는 여상이 있었고, 인문계를 가려면 대구나 김천으로 가야 했는데 마침 구미에 인문계고등학교가 생겼다. 두말할 것도 없이 지원했다. 구미고 1기생. 남학생 3반, 여학생 2반.
그래도 입학시험이 있었다.
떨어질까 봐 조마조마했는데 어머나 인원이 딱 맞았고 1명만 후보로 들어왔단다. 지도부로 선발되어 교문에 서서 들어오는 친구들 용모나 지각생 관리.
당시에 학교에서 놀던 남학생들이 보이지 않았는데 삼청교육대로 갔다는 후문을 들었다. 여고시절은 나름 재미있게 보냈다.
괜히 문학소녀인양 산중턱 느티나무 아래서 시도 적어보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