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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미다 Sep 24. 2024

남들은 걸을 때 나는 뛴다 남들이 뛸 때 나는 걷는다

과일을 깎으며 생각한다.

'나를 위해 꺼낸 게 언제지?'

항상 아이들을 위해 손에 들었다. 제철 과일을 보고 눈길을 거두지 못하는 아기 새의 눈망울에 얇은 지갑 속 무거운 카드를 건넸다. 양팔 가득 안고 오면서도 정작 내가 먹고 싶은 과일은 여전히 가게를 지켜야만 했다. 복숭아 껍질을 깎아 한 접시 가득 내어주고 심지에 붙은 여분을 알뜰히 돌려 먹는다.

음. 맛을 논하기엔 어림도 없다.


온전히 나를 위한다는 것. 그래서 새벽은 소중하다. 물론 잠이 더 소중한 새벽 역시 셀 수 없지만 가끔 일어나 혼자 맞는 달콤함은 내일 이 시간 역시 탐하게 만든다. 운동을 하거나 글을 쓸 때도 있지만 많은 시간은 그저 끄적인다. 방 한구석에 있는 아이 책상에 앉아 자질구레한 것들을 옆으로 밀고 노트북을 켠다. 이어폰을 꽂고 몸에 고요한 신호를 보낸다.

아이나 남편 생각 없이 나에게 집중하는 시간은 고요하고 진솔하다. 아침에 일어나 미온수 한 잔 마시듯, 눈을 떠서 가장 먼저 하는 행동이 나를 향한다는 점이 마음에 든다. 만지고 싶은 촉감을 느끼고, 귀에 알맞은 소리를 넣는다. 눈에 맞는 조도 속에서 발가락을 꿈틀거리고 팔을 쭈욱 뻗고 느끼는 하루의 시작이 생명수 같다. 갈증을 채워주는 건 이토록 단정했다.


더군다나 파격적이거나 단발적이지 않고
묵묵하고 장기적인 태도여서 더 인상적이었어요.
     

은유의 글쓰기 상담소 책을 읽다가 인상적인 문구를 발견했다. 그리고 지금 나에게 가장 필요한 생각이자 지침이라 주억거렸다. 글쓰기를 시작한 지 일 년도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자꾸만 불안하고 불편한 생각이 떠올랐다. 도통 나와 거리가 멀다 생각했던 불안, 질투, 조바심, 무기력, 자조 등이 떠올라 문득문득 놀랬다. 다소 생소한 사춘기 여드름 같은 감정이라니.

'나 회춘하나?'

마흔을 코 앞에 두고 느낀 감정이 이렇게 솔직할 줄이야. 애써 숨기며 아량과 배포로 포장해도 모자랄 판에 낯선 새침함이라니. 글쓰기 너 대체 뭐니.



묵묵히 조용하게 그러나 강단 있게. 무언가를 꾸준히 지속하려면 내겐 열정보단 '적당한 시듦'의 시간이 필요하다. 마음이 너무 설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감정도 없고, 이 길이 아니면 죽을 것처럼 전력 질주하는 것도 아닌 그저 적당한 긴장감 속에서 자리를 보존하는 것. 그것이 내게 필요한 시점이고, 이게 내게 딱 맞는 속도라는 것을 점차 깨닫는다.


난 전력 질주 러너 스타일이 아니다. 가끔 하는 달리기에서도 충분히 걸을 수 있는 속도에서 나 홀로 러닝을 즐기곤 했다. 숨이 찰 정도로 헉헉거리며 달리다 보면 달리는 날보다 회복하는 날(이라 쓰고 핑곗거리)이 더 많았다. 달리기 한 만큼 보상 심리가 작동해 냉장고 문을 수십번 열었으며, 오전 11시쯤이면 하루의 모든 에너지를 방전한 듯 피로가 몰려왔다. 퍼지려고 운동했나 싶게 평소보다 더 많은 시간을 누워지내고 힘이 풀렸다. 마음 한구석에서는 '오늘 달렸잖아.'라며 모든 행동이 그럴 수밖에 없다는 핑계를 대고 있었다. '이럴 거면 차라리 달리지 않아야 하는 거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면서 하루 에너지 총량 법칙을 따지게 되었다.


그랬다.

난 한쪽에 가속 페달이 밟히면 다른 쪽은 방전된 차량처럼 시름거리니, 삶의 밸런스 맞추기가 시급했다. 그나마 운동이라는 건전한 가속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태한 하루가 추가된다니. 아이러니도 이런 아이러니가 없었다.

나만의 트랙에 맞는 속도를 찾아야 한다. 타고난 체력과 열정으로 쉽게 추월차선을 그리는 이도 있고, 같은 속도를 달리더라도 더 우아한 몸짓도 있다. 몇 해 전부터 일찍 출발한 사람도 있으며, 곧 결승점을 목전에 둔 이도 있으리라. 그들의 페이스에 입 벌릴 시간에 나만의 호흡과 리듬을 찾고 적당한 수련을 거쳐야 한다. 더 달리고 싶을 때 멈출 줄 아는 결단력도 있어야 하며, 포기하고 싶은 순간에 마지막 한 발을 내디딜 줄 아는 끈기와 성취감 역시 쌓아야 한다.

아직은 줏대가 없다. 내 달리기가 그렇고 글쓰기가 그랬다. 목적지가 보이지 않는 입문자지만 내게 맞는 속도를 찾고 무엇보다 꾸준히 발자취를 남기다 보면 명확한 목표가 보이겠지. 더 신나고 설레는 순간이 찾아와 삶의 러너스 하이를 맛볼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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