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취제를 버릴 때, 우리는 자신의 인간성에서 가장 의미 있는 측면들을 되찾을 기회를 스스로에게 주는 셈이다.
-명랑한 은둔자 중-
뿌연 안개 대신 날카로운 개운함을 느끼는 것. 그것은 아무런 보호 장비 없이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견딘다는 것일까. 내 몸의 모든 감각을 날 세워 또렷하고 확대된 세상을 마주한다는 것. 옷 한 겹 걸치지 않고 모든 감각을 수용해야 하는 것은 과연, 나를 시련 속에서 성장하게 할까.
현재 내가 쓰고 있는 마취제의 종류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한두 잔 마시고 있는 맥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집어 들게 되는 핸드폰, 다른 사람 감정으로 이입하는 드라마.
모두 다 현실 자극을 둔하게 만들고, 느슨한 마음으로 정신을 다른 곳에 집중하게 만든다. 그나마 해쳐내고 있는 현실도 버겁다. 표피세포가 느끼는 감각마저 피로하므로 진피세포의 신경으로 침투할 수 없고, 하고 싶지도 않다. 그래서 현실의 마취제가 필요하고, 나는 때때로 쉬이 결투에서 지는 쪽을 택하면서 그 의무를 회피하고 만다.
모르고 지나가고 싶은 게 많다. 알수록 피곤하고, '굳이 거기까지 신경 써야 하나'싶은 마음에 애써 모른 '척' 한다. 현재 신경 써야 할(해치워야 할) 일이 산적해 있으므로 내 감정 깊숙이 들어가 불편한 끈적임을 온몸에 도포하고 싶지 않다. 그것을 직면한다하여 과연 나은 삶이 가능할까. 목도한 순간에 깊은 '점'이 곧이어 '선'으로 나열되어 어디까지 이어질지. 점들의 연속성에서 헤쳐나오지 못할까 봐 그 끝이 두렵기도 하다.
책을 읽는다. 병렬독서의 유행에서 내 단정치 못한 독서법이 위안을 얻는다. 읽다 만 책들의 부채 속에 무엇이든 완결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죄책감이 수두룩했다. 갖은 책들이 집안 여기저기 쌓이면서 책 속 내용이 생각나지 않기 시작했다. 읽던 책을 어렵게 들었다가 어디까지 읽었는지 찾지 못해 되돌이표 독서를 하는 일도 빈번했다. 뛰어 세기처럼 많은 페이지를 넘긴 채 내가 '이어졌다 여기는' 페이지부터 읽었는지도 모르겠다. 완독이라 생각했던 수많은 책은 사실 여전히 미완일지도.
차를 꺼낸다. 굳이 티백을 뜯고, 물을 팔팔 끓여 쌉싸름한 티 한 잔을 차린다. 보통은 팔팔과 따듯의 경계에 있는 물에 티백을 우리는 것에 그치지 않지만, 커피와는 사뭇 다르다.
일반적으로 커피를 마시는 사람이 작은 귀찮음을 물리치고 차를 우려낸다는 건, 차분하고 고요한 시간을 보내겠다는, 몸에 보내는 소소한 리츄얼이다. 내 일상에서 각도가 5도쯤 벗어난 일. 그 일을 행하기 위해선 마음의 결단은 둔각 이상으로 벌어져야 하는 일. 아니, 벌어진 정신이 올바르게 제 자릴 찾아야 할 수 있는 일 일지도. 시선은 공허하게 툭, 단지 두 손으로 컵을 감싸 호로록 입술을 가져댄다. 작은 행동으로 인해 정신이 또렷하고 분명해지며 내면을 향한 움직임이 시작된다.
단지 물을 끓였을 뿐인데. 단지 티백을 뜯었을 뿐인데.
커피를 마실 때 연결되는 장면과 차를 들었을 때 펼쳐지는 장면이 다르다. 어쩌면 난, 차가 전해주는 쌉싸름한 위로를 마시며 몸 안에 끼든 기름 덩어리를 개운하게 씻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멈춘다는 것. 고개 들어 불특정한 곳에 시선을 남긴다는 것. 마취제가 감추려는 것은 그게 아닐까.
빠르게 휘몰아치는 화려한 빛깔 속에서 무채색 속 삶에 핀 조명을 비추는 것. 내 생각에, 내 삶에, 내 방향에 초점을 맞추고 시간을 지배하는 것. 세상이 쏘아대는 공해 속에서 문을 닫고 조용히 내 안의 방에 앉아 작은 소리에 집중하는 것. 그로 인해 오늘 하루를 고요히 마감하는 것.
모두의 흐름 속에 내 몸을 맡기지 않을 것. 생각 없이 흐르지 않을 것. 흘러가다가도 거슬러 오를 줄 아는 결단이 있기를. 책을 읽다가 드는 생각을 위해 과감히 덮을 것. 그런 '점'들이 글로 남겨지고 '선'으로 이어지기를 바란다. 정적 속에서 평온을 느낄 수 있도록 가끔일지라도 문을 닫을 수 있는 결단이 들어서기를, 마취제를 오용하지 않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