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웨이의 숲(상실의 시대)]
먼저 하루키의 묘사를 느껴보자.
부드러운 달빛에 비친 나오코의 몸은 이제 막 태어난 새로운 육체인 것처럼 눈이 시릴 만큼 매끄럽고 아슬아슬했다. 그녀가 살짝 몸을 움직이자(아주 미약한 움직임이었으나) 달빛이 닿는 부분이 미묘하게 이동하며 몸을 물들인 그림자 형태가 바뀌었다. 둥글게 솟구친 가슴과 조그만 젖꼭지, 오목한 배꼽, 골반과 음모가 만들어 내는 고운 입자의 그림자가 마치 조용한 호수의 표면으로 퍼져 나가는 파문처럼 그 형태를 바꾸어 갔다.
약간의 움직임이 떨림을 만들어냈기 때문일까. 하루키의 문장에서 나오코의 미세한(그가 말하길 미약한) 움직임은 글을 보는 이로 하여금 아름다움과 떨림을 느끼게 한다. 각자의 상상에 확신을 주는 노골적이면서 가볍지 않은 문장들이 주는 카타르시스.
진지하고 어딘가 모르게 우울해 보이는 나오코의 성격, 행동을 완벽하게 보여주는 말투 묘사. 소설 초반을 긴장감 있게 이끈다.
나오코는 신중하게 단어를 고르며 말했다. 때때로 그녀는 그런 식으로 말한다. 정확한 단어를 찾으면서 아주 천천히 말한다.
심각한 나오코에게 어깨에 힘을 빼는 게 어떻겠냐는 와타나베의 언어에 싸늘하게 변하는 나오코. 긴장하는 와타나베의 예민한 귀가 떠오른다. 둘 사이를 감도는 분위기를 발밑에서 끌어내는 하루키의 예민함이 돋보이는 문장.
우리는 적막에 감싸인 소나무 숲길을 걸었다. 길 위에는 여름의 끝자락에 죽어 바싹 말라 버린 매미의 시체가 흩어져서, 그것들이 신발 아래에서 바삭바삭 소리를 냈다.
부모보다 더 많은 것을 공유한 친구. 아무에게도 하지 못한 말을 털어놓을 수 있었던 친구가 자살한다면 ‘죽음’이 어떻게 느껴지겠는가.
당구대 위에 놓인 빨갛고 하얀 공 네 개 안에도 죽음은 존재했다. 우리는 그것을 마치 아주 작은 먼지 입자처럼 폐 속으로 빨아들이며 살아가는 것이다.
절친 기즈키의 자살 이후 와타나베가 느끼는 죽음의 일상화. 죽음과 가까운 병원, 그 심벌색의 당구공과 호흡이 주는 절묘하고 시퍼런 조화.
앉아있는 미도리는 하루키의 글 속에서 끊임없이 움직인다. 미도리의 외모, 성격을 담아낸 두 줄.
지금 내 앞에 앉은 그녀는 마치 봄을 맞이해 막 세상으로 튀어나온 작은 동물처럼 신선한 생명력을 힘차게 뿜어내는 존재였다. 그 눈동자는 독립된 생명체처럼 기쁨으로 약동하면서 웃기도 하고 화를 내기도 하고 체념하기도 하고 낙담하기도 했다.
정확한 단어의 나열은 감정을 이끌어내지 않는다. 상황을 정확하게 알려줄 뿐이다. 차갑다. 짧은 단어의 연속은 긴장감을 준다. 미도리의 시니컬한 목소리를 빌려 하루키는 다음과 같이 병원을 묘사한다.
“익숙하지 않으면 다들 그래. 냄새, 소리, 무겁게 가라앉은 공기, 환자의 얼굴, 긴장감, 짜증, 실망, 고통, 피로 같은 것들 때문이야. 그런 게 위를 꽉 죄어 식욕을 빼앗아 버려."
하루키는 일(공부)과 잠에 대해선 꽤 간략하게 묘사한다. 방과 후, 주말. 여가 시간에 집중한다. 그가 우선하는 가치가 그 시간 가운데 있을지도 모르겠다. 다음은 19살 주인공 와타나베의 말.
“전 일요일에는 대체로 빨래를 해요. 아침에 빨아서 기숙사 옥상에서 말리고 저녁 전에 거둬서 착착 다림질을 해요. 다림질하는 거 별로 싫어하지 않거든요. 마구 구겨진 게 매끈하게 변하는 거, 정말 기분 좋잖아요. 저, 다림질 꽤 잘해요. 물론 처음에는 잘 못 했지만. 여기저기 줄이 가고 그랬죠.”
미도리의 성격과 말투를 활용해 본인 생각에 빠진 사람에게 깨우침을 주고 싶어 하는 듯하다. 읽는 이로 하여금 ‘아’하고 조용한 탄식을 자아내는 노골적인 비유.
너는 늘 자기만의 세계에 틀어박혀 내가 똑똑, 와타나베, 똑똑, 문을 두드려 보아도 눈만 한 번 들어 쳐다보곤 금방 자기 세계로 돌아가 버리지.
참고.
무라카미 하루키, 노르웨이의 숲, 양억관, 민음사, 19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