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을 누리는 시작
바쁘다는 핑계로 묵상을 뜸하게 하던 차, 아니나 다를까 부작용이 생기기 시작했다. 어이쿠 안 되겠다, 정신 차리고 밤마다 다시 성경을 읽고 머리를 부여잡아 기도를 한다.
지난번 묵상을 통해 깨달은 것 한 가지는 신앙의 변화는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할 때 시작된다는 것이다. 그 후로 나의 필수 기도 제목은 하나님을 나의 왕으로 다시금 모시는 것이 되었다. 나는 어찌나 악하고 연약한지 늘 내가 왕인 그 자리로 도돌이표처럼 돌아간다. 매일 해가 밝아오듯, 새로운 아침이 되면 나는 이 세상의 왕으로 군림하고 있더라.
그래서 오늘 하루도 만만치 않았다. 왕인 내게 반기를 드는 사람들은 어찌나 많던지! 하라는 대로 하지를 않고 꼭 자기 맘대로 하는 그 사람이 미워졌다가, 나는 분명 맞는 말을 했는데 자꾸 내게 틀리다 핀잔을 주는 사람 때문에 정말이지 속이 다 꺼멓게 타버렸다. 왕인 나는 총명하여 모든 것을 좋은 것으로 계획해 두고 실행하려는데, 내 의도는 알지도 못하면서 자기는 못하겠다고 내게 훈수를 두는 사람도 진심을 다해 못마땅했다.
퇴근길, 저녁 시간, 빨래를 개는 시간 동안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나는 옳았고 억울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 앞에 비추인 나의 실상은 얼마나 엉망일까 싶어 두렵기도 했다. 오늘 나의 죄를 정확하게 인지하지 못해도, 말씀 앞에서는 나도 발가벗겨진 죄인임을 수차례의 경험을 통해 어느 정도 기억하고 있다. 주님의 그 은혜로, 저 사람을 어찌하려고 성경을 읽기보다는 나를 좀 어째보려고 말씀을 폈다.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_요한계시록 21장 2절 말씀
환한 천국을 묘사하는 장면이었다. 얼마나 정갈한 모습인가. 남편 앞에 단장을 한 그 모습이라니! 21장에서는 새 예루살렘을 다양한 방식으로 묘사해 두었다. 생전 처음 듣는 온갖 종류의 보석들, 해와 달이 필요 없는, 밤이 존재하지 않는 주님의 영광으로 가득 찬 이곳. 정금으로 된 그 성은 맑은 유리와도 같다니, 얼마나 아름답고 얼마나 귀한 곳인 걸까?
첫째로는 나도 저곳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육신의 안목 때문일까, 이리 멋진 곳이라면 흠모할 만하지 않은가. 두 번째로는 그 천국을 묘사한 말씀 하나를 묵상하게 되었다.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천국은 실제로 아름다운 곳이면서도 가장 큰 특징은 하나님과 나의 관계를 약속으로 준다는 것이다. 그리고 세 번째로 마음에 탁 걸린 것은 "오직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가리라" 하는 27절 말씀이었다.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 되시는 그 아름다운 천국에는 예수 그리스도로 흰 옷을 입은 자만이,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자 만이 들어갈 수 있다.
21장의 여러 군데에서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자에 대한 묘사가 나오는데 두려워하는 자, 믿지 아니하는 자, 흉악한 자, 살인, 음행, 점술가, 우상 숭배자, 거짓말하는 자, 속된 것, 가증한 일은 결코 그리로 들어갈 수 없다고 말한다. 사실 나는 이 모든 것에 해당하는 죄인이기에 달리 할 말이 없고 심히 참담하기까지 했다. 해당 안 되는 것이 없네. 절로 숙연해진달까. 그러다 곧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떠올랐다. 이 때문에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를 대신 지어주셨다니. 그 복음 하나 붙들고 주께로 나아가는 것이지.
아멘.
네 번째로 묵상한 내용은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보내주심으로 나는 오늘 이 땅에서의 천국을 누리며, 맛보며 살 수 있다는 은혜였다. 죽어서 가는 천국이 아니라, 처음 것이 다 무너져야만 오는 천국이 아니라. 내가 마주하기 싫은 그 직장에 가서도, 지치고 힘든 내일의 하루에서도 하나님은 여전히 내게 천국을 허락하신다는 것이다. 주님께서 나의 왕이 되어주시고 나는 그의 통치를 따르기만 하면 되는 아주 간단하면서도 내 힘으로는 결코 불가능한 하나님 나라의 신비.
내가 왕인 인생은 아주 피곤할 수밖에 없는데, 그건 바로 이래야만 한다 라는 당연함 때문이다. 내가 왕이니 나는 인정받아야 하고, 내가 왕이니 난 거절될 수 없고, 내가 왕이니 나는 틀릴 수 없으며, 내가 왕이니 나는 항상 대단하다.
반대로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면, 왕이 아닌 나는 어떠한 대접을 받아도 상관없다. 그렇게 대단한 존재가 애초에 아님을 알게 되면 남들의 인정이 굳이 필요하지 않게 되고, 타인의 거절을 수용할 수 있게 된다. 당연히 나는 틀릴 수밖에 없으며 그러므로 나는 그리 대단할 수 없어도 괜찮다.
무엇이 그리 중요한가. 처음 것은 없어질 때가 결국엔 오고야 마는데 말이다.
말씀을 읽고 떠오르는 생각을 정리하던 중에, 요즘 나의 진짜 숙제가 무엇인지를 분별하게 되었다. 현재 직장을 계속 다니느냐, 퇴사를 하고 그다음 스텝을 준비하느냐를 놓고 꾸준히 기도를 하고 있었는데 하나님은 그 어느 것에도 분명한 답을 주시지 않았다. 공허한 울림처럼 나의 걱정만이 뱅뱅 돌기만 할 뿐. 그런데 오늘 말씀을 놓고 바라보니 내게 정말 중요한 것은 매일의 하루를 "천국"에서 보내는 것이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나의 미래 그 어느 곳에서도 결국 답을 찾을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내가 어느 선택을 내리든, 그곳이 어디고 무엇을 하든 나는 나의 하나님을 주로 모시고 그와 동행하고 연합하며 늘 천국을 누리며 살면 되는 것이다.
이 세상에는 만족이 없다. 쫓기듯 사는 세상, 경주마처럼 또 달려야 하는 지금 이 시점에 하나님께서는 내게 진짜 천국을 누리지 않겠느냐, 초청하시는 듯했다.
명함 하나가 없어져도 주로 인해 감사한 삶.
임신 준비를 하다 잘 되지 않아도 하나님으로 만족한 삶. 일을 계속하며 나의 부족함을 끊임없이 마주해야 해도 여전히 천국에 거하는 삶.
그렇게 살면 되는데.
나는 정말 그렇게 살지 못하고 있다.
어제 저녁에는 고멜과도 같은 나의 죄로 가슴을 치며 울었다. 그런데 오늘 하루 아버지의 품이 싫다며 저 멀리 떠나는 탕자의 삶을 또 살고 말았다.
내일 아침에는 어떤 모습으로 주님을 다시 떠나 내가 왕이라 외치며 살고 있을까.
주여,
탄식이 절로 났다.
고멜과도 같은 내가, 탕자와도 같은 내가, 선악과를 따먹는 아담과도 같은 내가. 아무런 소망도 기대할 것도 없는 나 자신이 초라해 절망 가운데 빠져가는데
하나님께서 조용히 찾아와 주셨다.
주님은 내게 그의 진심을 묵상케 하셨다.
고멜을 끝까지 쫓아와 준 호세아 선지자의 마음을,
탕자가 돌아올 때 두 팔 벌려 환영한 아버지의 마음을,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을 위해 가죽옷을 입혀 보내신 창조주의 마음을.
그 마음을 더욱 크게 알려주셨다.
어제는 고멜, 오늘은 탕자인 나의 하루들.
느리고 더디지만 나는 주님의 시간표에 붙잡혀 있음을.
나는 이미 주님 주신 응답 한 가운데,
그 은혜의 자리의 정 중앙에 서 있음을 기억하자.
작은 믿음에도
큰 하나님 보게 하시니 참 감사한 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