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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료한 Oct 23. 2022

[어쩌다 들은] 듀엣은 어쩌면 꾸며진 것

MACROSS 82-99, ‘82.99 F.M’ 감상기

오늘의 ‘어쩌다 들은’


시티팝이나 디스코의 무드를 꽤 좋아하는 편인데, 정해두고 좋아하는 가수나 디제이는 아직 딱히 없는 것 같다. 아무래도 주로 일본에서 창작되는데 일본어에 아무런 재능이 없는 탓에 심지어는 가수나 디제이의 이름조차 읽을 수 없다는 것이 하나의 이유가 아닐까 싶고, 누군가를 정해놓고 좋아하지 않아도 알아서 그런 장르를 소개해주는 유튜브 뮤직의 큐레이팅 능력 덕분일 수도 있겠다 싶다. 여담이지만 시티팝 무드의 옛날 한국 노래들도 좋아해서, 한동안 김현철의 ‘왜 그래’만 주야장천 들었던 적이 있기도 하다.


Macross 82-99는 유튜브 뮤직의 큐레이팅 알고리즘이 인도해준 디제이라 할 수 있겠는데, 아직 한 곡밖에는 큐레이팅을 받지 못했으므로 사실상 아직은 사람을 소개받은 느낌은 아니고, 그냥 하나의 곡을 추천받은 느낌에 가깝다. 어쨌든 철저히 디제이의 프로듀싱으로 만들어진 곡으로 가사가 있음에도 어쩐지 노랫말이 없는 연주곡의 느낌을 주는데, 아주 철저하게 샘플링으로 갖춰진 노래이기 때문이다. 시티팝 무드의 멜로디를 비집고 나오는 환영의 멘트와 하이톤의 절절한 여가수의 일본어 노랫말, 그리고 이윽고 이를 이어받는 남자 가수의 R&B 무드의 영어 노랫말까지. 그럴듯하게 완성된 일관성의 결여.


Macross 82-99는 세일러문을 좋아하는 듯하다.


관심이 생겨 디제이가 누구인지 좀 찾아보려고 구글링을 했는데, 의외로 정보를 얻기가 쉽지 않고, 인스타그램을 찾았지만 사진까지 막 들여다보고 싶지는 않아서, 그냥 위키트리에 적힌 영어로 된 짤막한 소개를 훑어보았다. 대략 멕시코 출신의 디제이지만 일본을 주 무대로 활동하고, 플런더포닉스/디스코/힙합/재즈 퓨전/시티팝 등 여러 장르를 넘나드는 음악을 추구하는 것 같다. 플런더포닉스가 여러 음악을 혼합해 새 음악을 만들어내는, 그러니까 딱 이번에 들은 ‘82.99 F.M.’ 같은 노래를 지칭하는 장르인 듯하다. 일본 아니메 문화에 익숙한 듯하고, 지금까지 나온 음반들을 살펴보니 세일러문이나 그런 무드의 아니메를 좋아하는 듯하다.


일본어로 된 여자의 노래와 영어로 된 남자의 노래는, 이국의 청자 입장에서 단번에 가사를 이해할 수 없는 때에는, 얼핏 그럴듯한 듀엣곡 같다는 인상을 준다. 아무리 기본적인 장르가 다르다 할지라도, 백그라운드 사운드가 일관된 상태에서 어쩐지 비슷한 톤, 그러니까 조금은 애절한 느낌으로 주고받는 노래가 꽤나 그럴듯하게 이어진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실제로 가사도 어느 정도의 일관성은 있다. 사랑을 갈구하는 듯한 여자와 사랑에 빠졌다고 시인하며 여자를 쟁취하려는 듯한 남자. 하지만 어쨌든 이미 있는 노래를 새로운 노래에 이어 붙이려 한 탓으로, 가사를 곱씹어보고 노래를 돌이켜보면 확실히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잘 이어지지 않는 느낌, 그러니까 여자가 원하는 남자가 여자를 원하는 남자가 아닌 다른 누군가인 느낌, 듀엣 같은 곡을 들었는데 정작 듀엣을 부르는 줄 알았던 두 남녀의 듀엣 상대가 각기 다른 느낌.


마법소녀를 좋아하는 걸까. 근데 이 음반 노래는 취향에 안 맞았다.


대충 들으면, 멀리서 보면 꼭 맞아떨어지는 것처럼 보이고 심지어 듣기에도 좋은 듀엣이 사실은 그다지 접점이 없는 둘을 아무렇게나 이어 붙인 결과물이라는 사실은, 어쩌면 그 어떤 한 쌍에 가져다 붙여도 나름대로 개연성이 있는 일종의 불편한 진실일지도 모르겠다. 사실 듀엣은 모두 꾸며진 것이고, 그 꾸며진 듀엣을 연주하고 부르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이 모든 게 연극이라는 상상은, 좀 괜히 진지하고 약간 철부지의 염세주의 같기도 하지만, 그런 사춘기가 온 어린애 같은 발상이 꼭 틀린 것만도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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