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유일한 여성 연구원
호기심 많고 활기차고 가끔씩 엉뚱한 써니는 대학원 시절, 통신구조연구실(CA Lab.)이라는 특별한 '정글'에 발을 들여놓았다.
사실 우리 연구실은 하도 힘들어서 여학생들이 선호하는 연구실은 아니어서 가뭄에 콩나듯이 여학생들이 입학했다.
우리 교수님과 친하신 조민규 교수님은 자주 우리 연구실에 놀러 오시곤 했다.
수업도 굉장히 재미있게 진행하시고 해서, 개인적으로 조교수님께서 담당하시는 과목을 매우 좋아했다.
그리고, 우리 연구실 사람들과도 친해서 허물없이 농담을 주고받는 사이 이기도 했다.
그 연구실과는 달리, 우리 연구실은 공구와 전자제품, 납땜, 하드웨어들을 많이 다루어서 우리가 힘들다는 것을 늘 알고 계셨다.
험난한 연구의 길에서 교수님의 유머는 때로는 위태롭고, 때로는 기상천외했지만, 몇 가지 사건은 써니의 기억 속에 깊이 새겨졌다.
우리 연구실은 각종 전자 부품들을 재사용을 했다.
새로 부품을 사는 경우도 많았지만, 폐기되는 보드에서 추출하여 재활용하는 경우도 많았다.
낡은 아폴로 서버나 사용하지 않는 PC의 메인보드에서 연구원들이 인두나 토치로 부품들을 뽑아내면 그걸 일일이 분류하는 작업을 써니가 맡았다.
이 부품을 분류하는데 몰두하고 있는 써니를 보더니, 조교수님께서 한마디 날리셨다.
"동남아에서 온 예쁜 여공 같구나"
허걱, 이 말에 할 말을 잃은 써니는 순간 화가 굉장히 많이 났고, 전산과 대학원생이 이런 부품 분류를 하고 있는데 대해서 약간의 자괴감도 들었다고 했다.
이 이야기를 동기들과 술자리에서 하소연을 하면서 이야기를 했고, 모두들 맞장구를 쳤다.
하지만, 그녀는 마지막에 의외의 한마디를 던졌다.
"예쁜 이라는 단어가 들어가서 그래도 사람은 알아보네"
라고 생각하면서 화를 참았고, 용서하기로 했다고.
우리 교수님은 전자계산학과 이지만, 전자회로나 임베디드 시스템에 대해서 잘 알아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계셨고, 전산기 실습을 비롯한 하드웨어 수업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셨다.
그래서, 다양한 전자 부품들을 직접 학생들이 볼 수 있도록 연구실 앞에 큰 유리 상자로 전시하려는 계획을 실행하셨다.
그 업무로 거울 위에 전자 부품을 본드에 붙여서 유리 상자 안에 전시하기로 했고, 거울 위에 붙이는 그 작업을 써니가 하게 되었다.
며칠 째 고생하며 부품을 붙이고 있는 써니를 보며, 그 조교수님께서 지나가시면서 한마디 또 날리셨다.
"써니야, 힘들면 마셔가면서 해"
써니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교수님을 바라보았지만, 교수님은 장난기 어린 얼굴로 생글생글 웃고 계셨다.
우리 교수님께서 일찍 하늘로 가시는 바람에, 두 번째 나의 석사 논문에 도장을 찍으신 죄(?)로 조교수님께서는 나의 결혼식 주례를 맡으셨다.
40대 중반에 주례를 맡으셨으니, 참 고민도 많고 힘드셨을 것 같다. 물론 당시 비주얼은 충분하셨지만..
결혼 후 한참 뒤에 결혼식 영상을 다시 보았는데, 조교수님은 멋진 주례사로 결혼식장을 압도했고, 나는 교수님의 유머러스하면서도 진심이 담긴 말씀에 다시 한번 감동했다.
참고로, 나도 40대 후반에 주례를 서 달라고 부탁받은 경우가 있었는데, 나는 끝까지 고사를 하였다.
힘들고 엄청난 일들이 많은 연구실에서 써니는 좌충우돌하면서 성장했고, 묵묵히 연구에 매진한 결과 지금은 국책 연구소의 연구원으로 잘 살고 있다.
아마, 그런 힘든 일들이 많아서, 우리 연구실 출신의 사람들은 어떤 환경에서도 자신의 일을 잘 해내는 사람들로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서,
"대학원 생활 생각하면 이 일은 별일 아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