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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대웅 Feb 09. 2024

뉴턴역학의 일반화, 라플라스주의

지식인으로서의 과학자 (7)

1889년 파리 엑스포와 프랑스혁명 100주년을 기념해 에펠탑이 완공되었다. 높이가 무려 300m로, 울름대성당(161m)을 아득히 뛰어넘는 당시 세계 최고 건축물이었다. 프랑스는 이 걸작으로 자국의 과학기술 역량을 유감없이 뽐냈다. 산업혁명과 기술혁신으로 인한 고도성장의 절정기(벨 에포크)였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사실 이런 식의 자랑이 처음은 아니었다. 영국은 1851년 런던 엑스포를 개최하면서 최초의 철골 건축물인 수정궁을 지었다. 최첨단 기술이 동원된 수정궁은 압도적 규모는 물론, 동화 속 궁궐처럼 신비로운 자태를 과시했다. 그러니까 프랑스는 영국의 기술력 자랑에 자극받아 그보다 한술 더 뜬 역사를 벌인 것이다. 전통의 라이벌 다운 자존심 경쟁이었다. 이렇듯 에펠탑은 국력 과시가 목적이어서 20년 뒤 철거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송신탑으로 활용 가치가 있었고, 무엇보다 파리의 랜드마크로서 상징성이 커지자, 그냥 두었다.

     

에펠탑은 건축가 귀스타브 에펠이 설계했다. 프랑스 이공계의 적통임을 자랑스럽게 여겼던 에펠은 탑의 아치 부분에 존경하는 선배 72명의 이름을 새겼다. 그 면면은 조제프 푸리에, 가스파드 몽주, 라자르 카르노, 조제프 루이 라그랑주, 앙드레 마리 앙페르 등이다. 근대과학 발전에 금자탑을 쌓고 프랑스혁명에도 기여한 레전드들이다. 에펠탑이 국가적 자부심은 물론 혁명의 정신을 기리는 건축물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에펠은 프랑스혁명과 근대화를 이끈 72명의 과학기술자의 이름을 에펠탑에 새겨 넣었다. 그러니까 프랑스 이공계 '명예의 전당'인 셈이다.



     

달랑베르의 제자, 나폴레옹의 스승

     

피에르시몽 라플라스도 에펠탑 이공계 명예의 전당(?)에 그 이름이 새겨져 있다. 아마 이과생이라면 익숙한 이름일 것이다. 미분방정식을 대수방정식으로 바꿔주는 라플라스 변환과, 전자기학과 천문학에서 유용하게 쓰이는 라플라스 방정식의 원저작자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현대의 교과서에 나온다는 점만 봐도 얼마나 대단한 수학자였는지 알 수 있다. 그런데 라플라스는 골방에 틀어박혀 연구만 한 백면서생은 아니었다. 혁명 직후 격변기의 중심에서 프랑스의 근대화를 주도한 정치가이기도 했다. 그가 모신 권력자만 4명에 이른다.

    

라플라스를 학계에 데뷔시킨 것은 달랑베르다. 대학 졸업 후 수학 교사로 일하던 19세의 라플라스는 무작정 달랑베르를 찾아갔다. 달랑베르가 누구인가. 파리 과학아카데미 소속 수학자이자 『백과전서』의 책임편집자로서 명실상부한 당대 최고의 지성이었다. 그러니 처음에는 라플라스 같은 애송이는 만나주지도 않았다. 어떻게 하면 관심을 끌까 고심하던 라플라스는 역학의 일반 원리에 관한 메모를 써서 달랑베르에게 전했다. 고수는 고수를 알아본다고, 메모를 읽은 달랑베르는 라플라스의 비범함을 한눈에 알아차렸다. 그래서 1770년, 그가 육군사관학교의 교수가 되도록 추천해주었다.

     

정규직이 되자 라플라스는 수많은 논문을 파리 과학아카데미에 투고했다. 논문을 접수하는 과학아카데미 담당자는 당황했다. 여태껏 한 사람으로부터 그 정도로 많은 논문을 받아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중에는 행성들의 섭동, 즉 다른 천체의 인력 때문에 행성의 궤도가 변하는 현상을 밝힌 논문이 포함되어 있었다. 1773년 제출한 이 논문에서 라플라스는 행성과 태양의 평균 거리는 계속 변화하나, 그 변화의 평균은 일정함을 증명했다. 이로써 라플라스는 파리 과학아카데미의 회원이 될 수 있었다. 과학아카데미에서는 선배인 라그랑주와 죽이 잘 맞았다. 둘은 수학적 계산을 통해 목성과 토성 궤도의 불일치 문제를 해결하고, 달의 운동에 대한 지구 궤도의 영향을 입증했으며, 천체 운동을 설명하는 새로운 수식을 만들었다.


1784년 라플라스는 왕립 포병학교의 교관이 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16세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만났다. 포병은 육군 중에서도 고도의 수학과 물리 지식이 필요한 병과다. 라플라스는 고난도의 미분방정식과 대수 문제를 자주 내기로 유명했는데, 수학을 잘했던 나폴레옹은 이런 지도를 곧잘 따라왔다. 그리고 무려 3년을 월반하여 16세에 소위로 임관했다. 이때의 경험으로 나폴레옹은 과학기술 교육의 중요성을 절감했고, 후일 권좌에 올라 이공계 인재 양성에 많은 역량을 쏟게 된다. 흔히 나폴레옹을 군인이나 독재자로만 알고 있으나, 그가 강력한 권력 기반을 구축한 데에는 이공계 엘리트들의 조력을 빼놓을 수 없다.

라플라스는 뉴턴역학을 기반으로 프랑스의 과학발전과 근대화를 이끌었다. 그런 그의 별명은 '프랑스의 뉴턴'이었다.

      


     

뉴턴역학의 만개

     

학문적, 사상적으로 달랑베르와 라플라스 모두 뉴턴의 후예들이었다. 그들은 수학자이자 계몽주의자로서 뉴턴의 과학적 방법론과 세계관을 계승했다. 달랑베르 필생의 역작인 『백과전서』도 이러한 뉴턴주의적 사고와 실천의 산물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뉴턴의 이론이 유럽에 수용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 이유는 뉴턴의 중력 개념이 당시의 분위기에서는 쉽게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뉴턴이 정식화한, 원거리 사이 물체에 작용하는 중력은 과학의 법칙보다는 신비한 현상에 가까워 보였다. 이것은 데카르트를 비롯한 신학문의 기수들이 제창한 시대정신, 즉 중세의 주술 및 미신에서 벗어나 절대적으로 확실한 이성의 체계를 세우자는 운동과는 배치되었다. 실제로 뉴턴은 신비주의자라는 의심도 꽤 받아야 했다.

     

초창기에는 데카르트가 더 많은 지지를 받았다. 1644년 데카르트는 『철학의 원리』에서 우주를 가득 채운 에테르라는 유체가 일으키는 소용돌이로 인해 행성이 회전한다고 설명했다. 지금 보면 황당하지만, 그때는 이것이 뉴턴의 중력보다 더 과학적이라고 본 사람이 많았다. 데카르트는 물체에 직접 힘이 가해져야만 운동이 일어난다는 전제에서 소용돌이 이론을 전개했기 때문이다. 반면 뉴턴은 『프린키피아』에서 이런 논리로는 케플러의 법칙을 충족할 수 없음을 비판했다. 그리고 역제곱 법칙에 기초한 중력 이론을 체계화함으로써, 에테르 따위 없어도 행성들의 궤도와 공전을 수학적으로 완벽히 설명할 수 있음을 보였다.

     

뉴턴-데카르트 논쟁은 영국과 프랑스의 자존심 싸움으로도 번졌다. 본래 프랑스에서는 데카르트(프랑스인)의 권위가 압도적이었고, 뉴턴(영국인)은 듣보 취급을 받았다. 그런데 지구의 형태에 관한 논쟁을 계기로 이게 역전되었다. 데카르트에 따르면 지구는 적도 부분이 더 평평해야 했고, 반면 뉴턴에 따르면 극 부분이 평평해야 했다. 1730년대 프랑스 정부는 탐사대를 파견해서 실제로 측정해보았는데, 뉴턴이 옳았음이 입증되었다. 이를 계기로 뉴턴의 위상이 급상승했다. 특히 영국에서 돌아온 볼테르가 정력적인 뉴턴 알리기에 나서면서, 뉴턴은 과학은 물론 지성계 전반에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게 된다.

     

프랑스의 뉴턴역학은 볼테르와 달랑베르를 이어 라플라스 대에 완성되었다. 그의 주저 『천체역학』이 그 결정판이라고 할 만하다. 이 책은 뉴턴이 『프린키피아』에서 정식화한 법칙을 천체 운동 전반으로 확장해서 해석했다. 1권은 1799년 나왔으나, 1825년에 마지막 5권이 나올 정도로 방대한 내용을 담았다. 그 논리도 매우 어려웠다. 천체의 모든 형태와 운동을 수학으로 체계화하는 동시에, 그 기원과 역사까지 다룬 탓이다. 이를 통해 라플라스는 모든 행성이 지니는 고유의 불규칙성은, 뉴턴의 역제곱 법칙을 유지한 상태로 나타나는 장기적이면서 주기적인 불규칙성임을 증명했다. 이로써 뉴턴역학은 태양계의 운동을 완벽히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천체역학』의 완간으로 자신감을 얻은 라플라스는 “우주 모든 입자의 위치와 속도를 안다면,  미래 또한 예측할 수 있다.”라는 주장을 피력했다. 이렇게 뉴턴역학에 따라 우주를 완벽한 인과적 체계로 설명할 수 있다는 입장을 라플라스주의라고 한다. 라플라스주의는 근대과학의 새로운 세계관인 결정론에 강력한 이론적 근거를 제시했다. 이는 과학을 넘어 철학에도 중요한 함의를 갖는다. 결정론에 따르면 자연과 우주는 수학적 인과관계로 틈 없이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절대자로서 신의 존재는 어디에도 개입할 여지가 없다. 이는 인간 이성으로 모든 것을 파악할 수 있다는 인식론을 만들어냈다.



     

혁명과 과학

     

세계사의 분기점인 프랑스혁명은 과학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혁명의 태풍은 과학자들마저 강경파와 온건파로 갈라놓았다. 막시밀리앙 드 로베스피에르를 필두로 한 강경파들은 “공화국에는 과학자가 필요 없다. 오직 정의만이 필요하다.”라는 구호와 함께 절대왕정이 만든 과학아카데미를 해산시켰다. 그리고 온건파이자 라플라스의 동료였던 앙투안 라부아지에를 기요틴에서 처형했다. 이러한 공포정치에 질린 많은 과학자가 망명을 택했다.

     

그러나 1794년 로베스피에르가 실각하면서 분위기가 바뀌었다. 온건파 과학자들인 카르노와 몽주는 공포정치로 파탄이 난 혁명정부를 재건하려 했다. 이를 위해 엘리트 이공계 교육기관 설립을 추진했다. 혁명정신을 다시 세우고 조국을 방어할 과학기술자와 장교들을 양성하겠다는 큰 그림에서였다. 이 학교가 바로 ‘조국, 과학, 그리고 영광을 위하여’라는 교훈을 내세운 에콜 폴리테크니크다. 당시 프랑스는 주변국들이 결성한 대프랑스동맹의 압박과 과학자들의 망명으로 인해 고급 인력이 크게 부족했다. 특히 수학과 물리 지식이 필수인 포병과 공병 등의 병과가 그러했다.

     

에콜 폴리테크니크 문장(왼쪽)과 재학생들(오른쪽). ‘조국, 과학, 그리고 영광을 위하여(Pour la Patrie, les Sciences et la Gloire)'

에콜 폴리테크니크를 통해 프랑스의 뉴턴역학과 수리과학은 크게 발전했다. 라플라스를 비롯한 라그랑주, 몽주, 카르노 등 최고의 석학들이 교수진으로 참여한 덕분이었다. 이들은 신분보다는 실력을 기준으로 학생들을 선발하여 체계적인 전문교육을 시행했다. 그 결과 시메옹 드니 푸아송, 조제프 푸리에, 사디 카르노, 조제프 게이뤼삭 등 19세기 프랑스의 부국강병을 이끈 학자들이 대거 배출되었다. 에펠탑에 새겨진 72인의 대부분이 이 학교 출신들이다. 오늘날에도 에콜 폴리테크니크는 프랑스가 자랑하는 그랑제콜 중 하나로서, 고위관료와 기업가를 가장 많이 배출하는 학교다.

    

1799년 나폴레옹이 집권하자, 라플라스는 그해 출간된 『천체역학』 1권을 헌정하며 충성을 맹세했다. 나폴레옹은 그런 라플라스를 신정부의 내무부 장관으로 기용하며 화답했다. 다만 행정에는 영 소질이 없었던 라플라스는 불과 6주 만에 해임되었다. 그래도 라플라스는 상원 의원으로 재직하면서 과학 정책의 실권자로서 강한 기획력을 발휘했다.

      

그 정점은 ‘라플라스 프로그램’으로 불린, 정부가 지원하는 일련의 연구과제들이었다. 이 프로그램의 핵심은 천문학과 물리학 이외의 분야에도 뉴턴역학의 원리를 적용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뉴턴역학의 일반화라고 할 만한 시도였다. 그만큼 라플라스는 뉴턴의 이론으로 자연의 비밀을 모두 밝혀낼 수 있다는 확신에 차 있었다. 물론 여기에는 정치적 계산도 중요하게 작용했다. 수학과 과학에 관심이 많았던 나폴레옹은 뛰어난 연구성과를 바탕으로 프랑스의 우월성을 과시하고 싶었다. 이에 막대한 재원을 들여 라플라스 프로그램을 적극 후원하고 나섰다.



     

라플라스 프로그램의 유산

     

이러한 배경에서 열, 빛, 전기, 자기, 모세관현상, 화학적 친화력 등의 자연현상을 뉴턴역학으로 해석하려는 원대한 작업이 추진되었다. 라플라스는 이 현상들을 입자 사이에 작용하는 인력과 척력 같은 근거리 힘을 사용해서 수학적으로 설명하고자 했다. 여기에는 라플라스 외에도 장 바티스트 비오, 시메옹 드니 푸아송 같은 학자들도 동참했다. 비오는 전류에 의해 발생하는 자기장의 세기가 뉴턴의 역제곱 법칙과 유사함을 밝혀낸 바 있었다. 푸아송 역시 라플라스의 제자로서 확률론을 연구했는데, 이를 통해 ‘푸아송 분포’를 정식화한 대학자였다.

나폴레옹은 수학과 과학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았던 지도자였다. 사진은 이집트 원정 중에 과학자들과 토론하는 나폴레옹.

     

하지만 1815년 나폴레옹이 실각하자 라플라스 프로그램도 몰락했다. 강력한 후원자가 사라지니 연구에 대한 지원 규모도 이전과 같을 수 없었다. 물론 이런 정치적 이유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19세기 물리학에서 새롭게 부상한 빛의 파동설, 전자기학, 열역학 등도 몰락에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경향은 새로운 관점과 방법론을 창안하면서 뉴턴역학의 한계를 보여주었다. 그 결과 라플라스를 비롯한 비오, 푸아송 등의 라플라스주의자들은 급속히 학문적 영향력을 잃어갔다.

     

그럼에도 라플라스 프로그램이 갖는 의의는 작지 않다. 프로그램이 이어지는 동안 뉴턴역학의 발전은 그야말로 절정에 달했기 때문이다. 이로써 분야를 막론하고 수학이 과학의 방법론적 기초가 되는, 과학의 수학화가 진행되었다. 이것은 20세기 이후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이론물리학의 등장에도 공헌하게 된다. 라플라스 프로그램은 과학 외적으로도 중요한 의미가 있다. 국가가 정치적 필요에 따라 과학을 지원하고 또 이용하는 경향이 본격화되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특히 프랑스혁명을 거치면서 과학의 민족주의적 색채가 강해지는 모습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마치 후일 제국주의와 냉전의 시대에 형성되는, 국가-과학 관계의 원형을 보여주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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