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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대웅 Feb 25. 2024

프롤로그 : 과학, 연구소, 그리고 시대정신

<연구소의 탄생> 시작에 부쳐

과학 연구는 시대와 떨어져 이루어지지 않는다. 인간의 모든 활동이 그렇듯, 과학도 사회적 필요에 따라 탄생했고 또 이어져 오고 있다. 오늘날 과학자들은 사회의 지지와 후원이 없다면 연구를 계획하기조차 어렵다. 그러므로 그 시대 사람들이 삶에서 마주하는 과제는 곧 과학자들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럼 정말 과학이 현실의 어려움을 해결해줄까? 생각해보면 별로 그렇지 않을 것 같다. 과학은 왠지 훈련된 전문가들만의 특수한 활동인 것처럼 느껴진다. 즉 과학은 ‘그들만의 리그’다. 또 과학의 연구 대상은 원자, 힘, 세포, 빛, 우주 등 평범한 일상을 한참 벗어난 것들이다. 거기서 뭔가 발견한들, 당장 내가 먹고사는 데 뭐가 달라질까 싶다. 이렇듯 내가 지금 있는 위치에서 과학과 사회의 직접적 연결고리를 인식하기란 쉽지 않다.

     

그렇다면 관점을 달리해보자. 과학과 사회의 관계는 멀리서 보아야 더 잘 보인다. 16~17세기 과학혁명 이후 둘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며 긴밀해졌다. 사회가 과학을 만들었지만, 과학도 사회를 만들었다. 그 무렵 철학자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은 “철학은 그 시대의 아들”이라고 갈파했다. 철학은 시대의 고민에 대한 응답이라는 의미다. 그때는 철학과 과학이 엄밀히 분리되지 않았으며, 과학도 철학 못지않은 시대의 아들이었다. 과학자들은 백면서생처럼 골방에 틀어박혀 연구만 하지 않았다. 그들은 시대의 모순과 정면으로 대결하며, 과학적 탐구를 무기로 현실을 바꾸고자 했다. 이런 의미에서 과학자들은 시대정신의 개척자였다. 오늘날 시대정신이란 말을 주로 정치인에게 쓰지만, 역사적으로 그 단어는 과학자에게 훨씬 더 잘 어울렸다.



     

이러한 시대정신의 최전선에 연구소가 있었다. 최고의 과학자들이 모인 그곳에서 세상을 변혁하는 지식과 발명이 쏟아져 나왔다. 혹자는 의아할 수도 있겠다. 연구소는 말 그대로 연구만 하는 곳 아닌가? 그 한가로운 곳이 시대의 발전과 관련이 있나? 이 의문은 연구소의 여러 모습 중 한 단면만 보아서 생기는 것이다. 연구소는 그 설립 주체가 정부든 기업이든, 원대한 목적에 따라 만들어진다. 연구소 설립에 투입하는 엄청난 비용과 자원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연구소는 과학이 사회적 필요와 만나는 곳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세계적 연구소들의 역사에는 국가와 민족이 헤쳐온 현실 극복의 서사가 함께 새겨져 있다. 그것을 과학의 발전사와 겹쳐 보면, 인류의 진보를 관통하는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을 발견해 낼 수 있다.

    

연구소가 과학 연구의 보편적 조직으로 자리 잡은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그것은 20세기 자본주의와 과학 발전의 산물이었다. 과학에 돈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다만 근대과학 초창기에는 스폰서를 해줄 곳이 많지 않았다. 아직 자본주의가 발달하지 못한 때였고, 막 신학문으로 등장한 과학에 의구심을 갖는 사회 분위기 때문이기도 했다. 따라서 이때의 과학 연구는 대부분 개인이 알아서 했다. 물론 로버트 보일, 제임스 줄, 찰스 다윈 등은 평생 연구만 해도 먹고살 걱정 없는 금수저들이기는 했다. 안드레아스 베살리우스나 아이작 뉴턴은 스타 교수로서 대학의 지원으로 연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과학자들이 훨씬 더 많았다. 이 흙수저들은 자기 연구를 세일즈해서 후원을 받아야 했다. 이때만 해도 대학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가르치던 곳이었으며, 과학은 정규 교육 과정에 지 못했다. 그래서 과학혁명의 선구자들은 주로 부자나 권력자에게 어필했다. 가장 유명한 사례는 갈릴레오 갈릴레이일 것이다. 파도바대학교 교수였던 그는 적은 보수가 늘 불만이어서 귀족 자제들에게 과외를 하거나, 실험기구를 제작해 팔았다. 그러다 자신이 만든 망원경으로 목성의 위성을 4개 발견했는데, 그중 하나를 ‘메디치의 별’이라고 명명하고 메디치 가문의 코시모 2세에게 헌정했다. 이때 갈릴레이가 쓴 ‘메디어천가’는 후일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고 외친 강직한 이미지와는 사뭇 달랐다. 어쨌든 갈릴레이는 메디치 가문에 들어가 돈 걱정 없이 연구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 당시 이런 방식의 후원은 꽤 많았다. 티코 브라헤와 요하네스 케플러도 황실 소속의 천문학자였다.

베네치아 총독에게 망원경을 보여주는 갈릴레이. 그는 연구 못지않게 스폰서를 찾는데도 열심히 노력한 과학자였다.

 


    

18세기 들어 과학이 급격히 발전하자 조직과 지원의 형태도 바뀌었다. 개인 단위로 이루어지던 과학 연구가 점점 전문화, 대형화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집단적 협력과 대규모 자금이 필요해졌다. 이러한 변화는 크게 두 흐름으로 나타났다.

      

첫째로 과학자들이 과학단체를 조직했다. 당시 유행하던 커피하우스, 살롱 등에서 토론하던 과학자들은 편지로 교류를 넓혀 나갔고, 결국 모임의 필요성에 공감했다. 과학이 아직 신학문으로서 그 위상이 모호하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비슷한 성향의 사람들이 모여 과학의 정당성을 알리고 영향력을 확대할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배경에 따라 1660년 영국에서 최초의 근대적 과학단체인 런던 왕립학회가 결성되었다. 다만 ‘왕립’이라는 칭호는 상징적이었을 뿐, 아마추어 과학자 모임으로서 왕실의 지원은 받지 못했다.

     

그로부터 6년 뒤에는 프랑스에서 파리 과학아카데미가 만들어졌다. 루이 14세의 재무장관 장 바티스트 콜베르가 당대 최고의 과학자들을 불러 모았다. 그는 중상주의자답게 과학도 국가의 육성과 지원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이로써 파리 과학아카데미의 과학자들은 국가로부터 급여를 받을 수 있었다. ‘직업으로서의 과학자’가 탄생한 것이다. 파리 과학아카데미의 주 업무는 정부가 의뢰한 프로젝트의 수행이었는데, 오늘날 국가R&D 사업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다. 아카데미의 과학자들은 정부 관료로서의 위상을 바탕으로, 굵직한 대형 연구를 수행할 수 있었다. 뒤이어 독일, 러시아 등도 파리 과학아카데미를 벤치마킹해서 아카데미를 조직했다. 과학자가 아마추어 개인을 넘어 프로페셔널 집단으로 진화한 것이다.

1666년 설립된 파리 과학아카데미의 과학자들은 정부 지원 하에 높은 위상을 갖고 국가적 연구사업에 참여했다.

둘째로 국가가 과학을 제도화했다. 16~17세기 과학혁명은 본래 개인의 호기심에서 시작되었고 국가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과학이 발전하고 사회적 유용성이 입증되면서 분위기가 바뀌었다. 그 중요한 계기가 1789년의 프랑스혁명이다. 이 세계사적 대사건은 주로 민주주의와 민족주의의 맥락에서 이해되나, 과학에도 전환점이 되었다. 혁명정부는 혁명에 적대적인 주변국으로부터 조국을 방어하고자 엘리트 과학기술자를 대거 양성했다. 그 결과물이 바로 에콜 폴리테크니크다. 이곳에 최고의 석학 교수진과 전국에서 치열한 경쟁을 뚫은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수학, 물리, 기계, 건축 등을 학습한 졸업생들은 대부분 공공부문으로 진출했다. 포병과 공병 등의 장교나 국책사업을 감독하는 관료가 주로 되었다. 요컨대 프랑스는 근대화의 과업 수행에 과학기술자를 핵심 파트너로 삼은 것이다.

      

국가의 과학 지원은 19세기 독일에서 더욱 고도화한 형태로 나타났다. 과학 지식의 실용화에 주력한 프랑스와 달리, 독일에서는 자유로운 진리 탐구라는 학술적인 풍토가 강했다. 신인문주의로 불린 새로운 교육운동이 그 배경이 되었다. 독일의 낭만주의 전통을 계승한 신인문주의자들은 인간 내면의 도야와 창조의 의지를 강조했다. 이렇게 학문 정신을 장려하는 분위기에서 독일의 대학은 연구중심대학으로 개편되었고, 교수의 업무도 강의보다는 연구의 비중이 더욱 높아졌다. 여기에는 정치적인 요인도 있었다. 1871년 마침내 통일을 이룬 독일은 고도의 산업발전을 이끌 과학기술 지식과 인재를 필요로 했다. 이에 독일 정부는 과학에 지원을 확대했는데, 단기 실익보다는 진리의 탐구라는 이상주의에 정책의 중점을 두었다. 그게 장기적으로 국익에 더 도움이 된다는 판단이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1887년, 세계 최초의 근대적 국립연구소인 제국 물리기술연구소가 탄생했다. 산업발전에 필수적인 기술 표준을 정하는 것이 이곳의 임무였다. 글로벌 기업 지멘스의 창업자이기도 한 베르너 폰 지멘스도 연구소 설립에 참여했다. 지멘스는 전기‧전신기술로 큰돈을 벌었지만, 국가가 발전하려면 순수 물리학에 투자해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1900년, 양자역학의 포문을 연 막스 플랑크의 흑체복사 이론이 탄생한 곳도 바로 이 연구소였다.

      

반면 영국과 미국에서는 오랫동안 국가의 과학 지원이 저조했다. 자유방임주의의 본고장인 영국에서는 과학에 국가가 지원해야 한다는 관념 자체가 낯설었다. 개인의 호기심 해결을 위해서라면 본인이 비용을 대면 되고, 산업기술을 개발하기 위해서라면 그걸로 이득을 볼 기업이 투자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미국에서도 상황은 비슷했다. 20세기 초반까지도 미국인들은 학문과 연구에 세금이 들어가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하려면 자비나 자선사업으로 추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당시 카네기연구소, 록펠러 의학연구소 등이 설립되었으나, 이는 (연구소 이름에서 보듯) 부자들의 자선사업이었을 뿐이다. 미국이 정부 차원에서 과학에 투자하고 연구소를 설립하는 일은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한 시기에 와서야 이루어졌다.

1887년 설립된 최초의 근대적 국립 연구소, 독일 제국물리기술연구소는 130년이 넘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사진은 독일 브라운슈바이크 지역에 위치한 연방물리기술청.



     

이렇듯 연구소는 18세기부터 본격화한 과학의 집단화, 제도화가 높은 수준에 이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과학혁명의 시대만 해도 국가나 사회가 과학에 지원해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없었다. 그러나 과학이 눈부시게 발달하고, 특히 산업화와 부국강병에 효과가 있음이 입증되면서, 국가는 과학을 포섭하여 체제로 흡수하고자 했다. 그것은 당시 시대적 과제였던 근대화 – 자본주의와 산업화, 관련 제도와 정책의 정비 등 - 의 과업을 추진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근대화의 필수 자원인 고급 지식과 인재에 대해 과학은 매력적인 공급원이었기 때문이다.

      

이로써 오랫동안 자연스럽지 않았던 생각, 즉 과학자들이 다른 일 안 하고 연구만 할 수 있도록 자금과 인프라를 지원하는 일이 사회 제도로서 확립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20세기가 태동하고 나서야 본격화했다. 과학의 발전, 근대화의 과제, 그리고 국가와 산업의 성장이 서로 만나 연구소라는 조직으로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그것은 20세기 자본주의가 제국주의, 세계대전, 냉전을 거쳐 평화와 협력으로 진화해가는 과정을 오롯이 함께했다. 바로 이 점에서 연구소는 세계사를 이끈 주역 중 하나였다. 따라서 인류 진보의 여정, 그 성과와 한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연구소를 통해 역사를 바라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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