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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대웅 Apr 24. 2024

알아두면 피와 살이 되는 일본의 과학 문화 (1)

평소 과학이 교양과 문화로서 뿌리내려야 한다고 주장하곤 한다. 그러니까 과학의 사회적 저변이 넓고 깊어져야 한다는 말이다. 물론 다분히 추상적인 이야기이다. 그래서 당장 뭘 어떻게 하자는 거냐고 되물으면, 딱히 할 말은 또 없다(…). 과학이 문화로서 사회화한다는 게 하루아침에 만들 수 있는 결과가 아니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역사 단위의 시야와 노력이 필요하다.

    

다만 몇 가지 예시는 들 수 있다. 가까운 일본에 참고할 만한 사례들이 꽤 있기 때문이다. 과학에서 일본과 한국의 차이는 노벨상 수상자의 압도적 스코어 – 25 대 0 - 로 대비된다. 그것도 맞지만, 단순히 숫자로 치환될 수 없는 더 중요한 차이가 있다. 과학이 문화적 전통으로서 존재하는가다. 일본이 근대 과학을 받아들인 역사는 생각보다 길다. 연원을 따지면 17세기 난학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일본은 그 긴 시간에 걸쳐 사회 곳곳에서 과학을 체화하고자 노력했다. 그래서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마치 가풍처럼 과학을 존중하는 전통이 만들어질 수 있었다. 다음의 흥미로운 사실들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일본 황실의 과학자들

     

일본 황실에서 과학은 가업과도 같다. 그만큼 과학을 사랑하고 진지하게 연구한다. 이건 돈과 시간이 넘쳐나는 황족들의 취미 활동이 아니다. 그들도 실제로 실험을 하고 학술지에 논문을 낸다. 황족 이전에 한 명의 과학자로서 일반인과 똑같이 학문적 업적을 검증받고, 인류의 지식에 기여한다.

     

현 나루히토 천황의 할아버지 히로히토는 생물학자였다. 그래서 천황 재임 중에도 해양생물 채집을 즐겨했다. 이를 몇 편의 논문으로 쓴 적도 있었다. 아들인 아키히토도 이러한 이공계 기질을 물려받았다. 그의 전공은 정치학이나, 어류 분류학에 관심이 많아 국제저널에 20편이 넘는 논문을 투고했다. 이러한 업적으로 일본 어류 백과사전 일부를 저술하기도 했다. 특히 망둑어의 권위자로 유명한데, 그가 제안한 망둑어 분류법은 학계의 공식 기준으로 통용되고 있다. 이뿐만 아니다. 아키히토 천황의 남동생과 둘째 딸도 모두 조류 연구자였다. 현 천황인 나루히토는 역사학을 전공했으니 예외라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런 그도 영국 템스강의 수운사에 대한 책을 저술한 인문학자였다. 요컨대 집안 전체에 학술연구의 피가 흐른다고 할 수 있다.


이는 황실이 과학을 존중한다는 상징성에만 그치지 않는다. 실질적으로도 황실은 과학의 든든한 후원자 노릇을 한다. 일본은 2015년 스웨덴 노벨재단의 <노벨프라이즈 다이얼로그> 행사를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유치했다. 노벨상 수상자들이 대중을 상대로 강연하는 이 행사는 자국 과학자를 노벨재단에 알리는 기회가 된다. 과학자인 아키히토 천황은 누구보다도 이 점을 잘 알았다. 그래서 행사 중 만찬을 열어 노벨재단 관계자들을 치하하는 한편, 일본의 과학이 얼마나 우수한지를 적절히 어필했다. 적어도 이 자리에서만큼은 그는 천황이 아닌 ‘과학 외교관’이었던 셈이다. 세계 최고 학술지인 <사이언스>에 일본 과학사에 대한 논문을 투고했던 아키히토에게 이 정도는 별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과학을 사랑하는 황실의 이러한 지원은 국제학계에서 일본의 품격을 더욱 높이는 역할을 한다.

1992년 아키히토 천황이 <사이언스>에 투고한 논문. 저자명에 'Akihito, His Majesty the Emperor of Japan'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과학이라는 말을 만든 일본의 지식인

     

서양에서도 과학(science)이 자연과학을 뜻하는 용어로 확립된 것은 오래되지 않았다. 라틴어 scientia에서 유래한 science는 본래 인간과 자연을 망라하는 다양한 지식 체계를 의미했다. 그러니 이때만 해도 천문학이나 물리학은 물론, 철학과 역사학도 과학이었다. 절대왕정을 무너뜨리기 위해 프랑스 계몽주의자들이 전개한 백과전서 운동은 그 전형과도 같다.

      

그런데 1833년 윌리엄 휴얼이라는 철학자가 ‘과학자(scientist)’라는 용어를 쓰면서 변화가 생겼다. 휴얼은 당시 자연과학 연구자들이 다른 학자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전문 용어와 체계를 사용한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자연과학을 특별한 학문으로 차별화하려는 의도라는 것이 그의 판단이었다. 요컨대 휴얼이 예술가(artist)와 대비하여 자연 탐구에만 몰두하는 이를 과학자(scientist)라고 한 데에는, 학문적 편협성을 꼬집는 냉소의 함의도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개념화가, 과학의 눈부신 발전과 맞물리면서 되려 지적 권위를 얻게 된 것이다.


비슷한 시기 일본은 서양의 근대적 제도와 학문을 받아들이는 데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과업이 서양인들이 만든 개념들을 이해하는 것이었다. 근대 문명의 기초를 이루는 용어들을 명확히 규정해야만, 그것을 자유자재로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메이지 시대 지식인들이 가장 역점을 기울인 사업이 번역이었다. 서양의 학회를 모방해서 만든, 일본 최초의 계몽운동단체 메이로쿠샤가 그 구심이 되었다. 오늘날 근대화의 선구자로 추앙받는 모리 아리노리, 후쿠자와 유키치, 니시 아마네, 가토 히로유키 등이 모두 이곳 출신이었다. 이들이 발간한 <메이로쿠잣시>는 최초의 학술지로서 지식인 사회에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했다. 이 잡지를 매개로 의회 설립, 문자 개량, 과학 교육, 사형제 폐지 등에 대한 격렬한 토론이 벌어졌고, 이는 곧 근대 일본이 나아가야 할 비전을 제시했다.

    

니시 아마네는 그중에서도 학술 용어 번역에 적합한 회원이었다. 1829년생인 그는 일찍이 사서삼경까지 마스터한 한학자인 데다, 1862년 막부의 명으로 네덜란드 유학까지 다녀왔기 때문이다. 니시는 이때 공부한 법학, 칸트철학, 경제학을 일본에 처음으로 소개한 인물이기도 하다. 요컨대 동양철학과 서양과학을 아우르는, 요즘 말로 통섭형 지식인이었던 셈이다. 그래서 서양의 생소한 개념을 동양사상에 맞게 조어하는 데 뛰어난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니시가 보기에 서양의 science는 대단히 오묘한 의미를 지니는 단어였다. 일본에서는 도무지 그와 비슷한 용어조차 찾기 어려웠다. 사실 당연한 일이다. 동양에는 과학적 사유란 것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랜 연구와 토론을 거쳐, science의 본질이 전문적인 지식에 기초해서 자연을 탐구하는 데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것은 인간과 우주의 통일된 이치를 궁구하는 동양철학과는 전혀 다른 사상원리에 기초했다. 그래서 니시는 science를 분야별로 전문화된 지식의 체계라는 의미의 ‘과학(科學)’으로 번역했다. 실제로 과학은 물리, 화학, 수학, 생물학 등 고유의 패러다임을 갖는 분과들로 구성된다. 니시는 바로 이러한 science의 특성을 과목을 뜻하는 한자 科에 집약한 것이다.

니시 아마네(왼쪽)와 그의 1874년 저서 『백일신론』(오른쪽). 이 책에서 니시는 서양의 philosophy를 '철학'으로 번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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