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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대웅 Jun 07. 2024

과학의 극단적 정치화

독일 막스 플랑크 협회 (6)

플랑크는 임기 내내 나치와 불편한 관계를 유지했다. 본래 나치의 이념에 별로 동조하지 않았던 그였지만, 협회를 지키고자 마지못해 그 정책을 받아들였다. 그래서 자신이 발굴한 아인슈타인, 진심으로 존경한 하버가 협회를 떠나는 것도 그대로 지켜봐야 했다. 학계의 존경을 받는 이 70대의 노학자도 나치에게는 평범한 공무원일 뿐이었다. 다만 나치도 플랑크가 불만족스러운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매사에 꼬장꼬장한 플랑크보다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아주는(무슨 초코파이도 아니고) 유들유들한 회장을 원했다. 1935년 1월 하버 사망 1주기 행사(하필 다음날이 히틀러 집권 2주년이었다)를 플랑크가 강행하자, 나치는 더는 두고 볼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결국 플랑크는 1936년 4월 임기가 끝나면 재선에 나서지 않기로 했다. 그러자 독일 물리학의 두 기수, 레나르트와 스타르크가 후임의 물망에 올랐다. 둘 다 나치의 이념에 충실한 과학자였다. 하지만 레나르트는 고령을 이유로 고사하면서, KWG는 유대인의 유산이니 이참에 해체하라는 의견을 내놓았다. 스타르크도 제국물리기술연구소의 소장직을 수행 중이어서 KWG를 맡기가 어려웠다. 이렇게 되자 2안으로 기업가들이 후보로 부상했다. 나치는 이미 집권 초부터 재벌과 돈독한 관계(a.k.a. 정경유착)를 유지하고 있었다. 나치가 유대인으로부터 빼앗은 재산과 시설은 대부분 독일 기업이 차지했고, 그렇게 부를 축적한 기업들이 정권 유지의 물적 기반이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곧 다가올 전쟁을 대비하여 KWG를 군사‧무기 연구에 동원할 필요성도 있었다. 그것은 파시즘이라는 극단적 정치의 시대에 과학연구소가 필연적으로 겪어야 할 숙명과도 같았다. 



    

나치-기업-KWG의 연계

     

이런 복잡한 고려 끝에 3대 회장으로 카를 보슈가 선임되었다. 보슈는 하버와 함께 하버-보슈법을 고안해서 1931년 노벨화학상을 받았다. 그리고 바스프와 바이엘을 비롯한 6개 기업이 참여한 거대 화학 회사 이게파르벤의 대표이기도 했다. 즉 과학자와 기업가의 정체성을 둘 다 가진 인물로, 이론물리학자인 플랑크와는 대조적인 유형이었다. 이러한 회장 인사는 KWG의 운영 방향 변화를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다. KWG가 이전까지는 과학의 자율성과 순수성을 중시했다면, 이제는 기업을 염두에 둔 목적성과 응용‧개발에 치중하게 된 것이다. 실제로 보슈는 기업에서 함께 일한 이들을 회장의 고문단으로 데려왔다. 또한 이게파르벤의 대표직도 계속 병행했다. KWG 본부가 있는 베를린이 아니라 회사와 가까운 하이델베르크에 거주할 정도로 말이다.

카를 보슈(왼쪽)는 뛰어난 과학자이자 기업가였고, 그의 재임기부터 KWG는 친기업적 성격을 띠게 된다. 독일 하이델베르크에 그의 이름을 딴 박물관(오른쪽)이 있다.


KWG의 구성원들도 변화를 수용하였다. 기업가 출신이 오히려 작금의 KWG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대는 역시 기업과 나치의 유대관계를 반영한 것이었다. 물론 보슈는 나치당원이 아니었고 그들의 이념을 추종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독일 굴지의 기업가라는 지위 때문에 플랑크보다는 나치의 정책에 훨씬 더 유연한 입장을 보였다. 그가 보유한 재산 역시 상당하였다. 이게파르벤은 이미 1920년대부터 KWG를 후원해왔고, 보슈가 회장이 되자 그 규모는 더욱 커졌다. 이게파르벤을 비롯한 기업 기부금과 그들이 의뢰한 연구용역은 이 시기 KWG의 중요한 수입원이었다. 이렇게 기업인을 매개로 나치와 KWG의 연계는 더욱 공고해졌다.

     

하지만 그럴수록 연구의 자율성과 독립성은 줄어들었다. 제2차 세계대전의 개전이 임박하면서 이는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1936년 나치는 협회 정관까지 개정해가면서 KWG를 직접적인 통제 범위에 두려 했다. 가장 중요한 변동 사항은 나치 정치 이념의 핵심인 ‘지도자 원리’를 삽입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KWG도 국가 최고 지도자인 히틀러의 지휘를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이로써 KWG는 내각의 관리‧감독 아래 놓였고, 회장과 이사들은 교육부 장관의 승인을 얻어야만 취임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단지 인사에만 그치지 않았다. 연구 방향에도 큰 전환이 일어났다. KWG는 무기 개발은 물론, 나치의 이념에 과학적 정당성을 제공하는 연구도 맡아야 했다. 물리학자들은 항공기 제작 및 어뢰 설계에 필요한 역학적 연구에, 생물학자들은 우생학과 인간 유전학 연구에 투입되었다. 이 과정에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받은 표본으로 실험하거나, 정신 질환자들로부터 채취한 뇌를 검사하기도 했다. 두고두고 회자될 협회의 흑역사였다.

베를린의 KWG 인류학, 인간유전학, 우생학 연구소. KWG는 나치 이념의 과학적 정당화를 위한 연구에 동원되었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이는 KWG의 근간인 하르낙 원칙에 대한 부정을 의미했다. 1941년 알베르트 푀글러가 4대 회장이 되면서 나치와 KWG의 유대는 최고조에 이르렀다. 푀글러는 과학자도 아닌 순수 기업가로, 독일 군수산업의 거물이었다. 그런 그가 KWG의 회장까지 맡은 이유는 역시 제2차 세계대전 때문이었다. 나치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그랬듯 KWG가 군의 지휘에 따라 무기 개발을 전담해주기를 바랐다. 마침 푀글러는 KWG를 후원했던 1930년대부터 군수산업의 중요성을 강조해왔다. 나치는 바로 이런 점이 마음에 들어서 그를 KWG 4대 회장에 ‘꽂았다’. 그 결과 한때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의 성지였던 KWG는 실용화 연구, 특히 무기 개발에 전념하게 되었다. 이는 과학을 둘러싼 정책환경이 바뀌면, 연구결과와 활용 분야도 달라질 수밖에 없음을 함의한다.



     

핵분열을 일으키다

     

1938년 KWG 화학연구소에서 인류 역사를 뒤바꾼 발견이 나왔다. 이름부터 무시무시한 핵분열이다. 발견자는 연구소장 오토 한이었다. 다만 한이 처음부터 핵분열을 알아본 것은 아니다. 사실 비슷한 실험을 엔리코 페르미가 먼저 했었다. 당시에는 제임스 채드윅이 원자 내부에서 발견한 중성자로 핵물리 실험을 하는 것이 유행이었다. 전자보다 무겁고 전기적으로 중성인 중성자를 원자핵에 충돌시켜 나오는 결과로, 원자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가능하다고 기대되었기 때문이다. 그중 페르미는 중성자를 우라늄에 충돌시켜서 우라늄보다 약간 더 무거운 원소를 분리해내는 데 성공했다. 이는 원자번호 93의 새로운 원소라고 여겨졌고, 1938년 노벨물리학상까지 받았다.

     

한도 동료인 프리츠 슈트라스만과 함께 우라늄보다 무거운 원소를 찾으려 했다. 그런데 몇 년에 걸친 실험 끝에 황당한 결과를 얻었다. 되려 우라늄보다 훨씬 가벼운 라듐 원자가 나타난 것이다. 실험을 계속해보니 더욱 어이없는 결과가 이어졌다. 라듐인 줄로 알았던 원자가 바륨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바륨의 무게는 137로 238인 우라늄의 절반 정도다. 설마 중성자에 의해 우라늄이 쪼개진 건가? 그럴 리는 없었다. 화학자인 한의 물리학적 상상력은 거기까지였고, 결국 동료에게 SOS를 쳐야 했다. 그 동료가 바로 리제 마이트너다. 그녀는 당시만 해도 여성에게는 불모지였던 과학계에서 성공한, 입지전적인 물리학자였다. 빈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역사상 두 번째 여성이었던 그녀는 독일로 가서 플랑크를 사사했다. 여자가 무슨 물리학을 연구하냐고 했던 보수적인 플랑크도 그녀의 능력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독일 최초의 여성 물리학 교수이자 KWG 화학연구소의 연구책임자가 되었다. 하지만 마이트너는 다른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나치 집권 후에 독일을 떠나야 했다. 한이 SOS를 쳤을 때 그녀는 스톡홀름에 정착해 있었다.


마이트너는 조카인 오토 프리슈와 이 기이한 실험 결과를 분석했다. 여기에는 몇 해 전 닐스 보어가 제안한, 물방울과 비슷한 새로운 원자핵 모형이 힌트가 되었다. 무거운 원자핵이 중성자와 충돌하면 물방울이 그러하듯 휘청거릴 것이다. 이때 물방울 모양이 충분히 찌그러지면, 장거리 전기 반발력이 핵을 지탱하는 힘보다 커지고, 그럼 핵이 쪼개진다. 마이트너는 아인슈타인의 그 유명한 방정식 E=mc2을 적용해 이때의 에너지를 계산해보았다. 우라늄 원자핵 하나에 2억 전자볼트라는 엄청난 수치가 나왔다. 프리슈는 이 현상을 생명과학에서 세포가 자가 복제할 때 세포핵이 쪼개지는 과정에 비유해 ‘핵분열’이라고 했다. 핵분열의 진정한 무서움은 연쇄반응에 있었다. 분열된 핵에서 나온 에너지가 다른 핵을 분열시키면서, 훨씬 더 많은 에너지를 방출할 것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의 향방, 나아가 인류의 운명을 뒤바꿀 초거대 에너지가 그렇게 모습을 드러냈다.

KWG 화학연구소 시절의 오토 한과 리제 마이트너. 마이트너는 한의 실험을 핵분열로 해석하는 데 공헌했지만, 1944년 노벨화학상은 한이 단독 수상하고 둘의 사이는 틀어졌다.



     

패배의 이유

     

핵분열이 내뿜는 어마어마한 에너지에서 폭탄을 떠올리는 것은 자연스러웠다. 물리학자들은 핸드볼 크기의 우라늄 한 덩어리면 도시 하나쯤은 날려버릴 수 있다고 예상했다. 때마침 인류 최대이자 최악의 전쟁인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 그렇다면 이제 문제는 어느 쪽이 먼저 핵폭탄을 개발할 것인지였다. 나치가 훨씬 앞서 있음은 분명했다. 우선 핵분열의 발견자들이 KWG의 과학자들이었다. 그리고 당시 세계 최대 우라늄 광산이 있던 자이르는 나치가 점령한 벨기에의 식민지였다. 그곳에 매장된 약 1천 톤이 넘는 천연우라늄 역시 나치 차지였다.

     

나치는 ‘우란프로옉트’로 알려진 핵폭탄 개발 계획을 비밀리에 추진했다. 그리고 베르너 하이젠베르크에게 총책임자를 맡겼다. 하이젠베르크가 누구인가. 양자역학의 이론적 설계자이자, 31살에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희대의 천재였으며, 과학자들이 너도나도 떠나는 와중에 조국에 남은 순수 독일인이었다. 학문적으로나 인종적으로 우란프로옉트의 적임자였던 셈이다. 하이젠베르크는 KWG 물리학연구소장으로 임명되었고, 연구소는 육군 병기국에 소속되어 핵폭탄 개발을 수행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하버의 KWG 물리화학‧전기화학연구소가 독가스 개발을 한 것과 똑같은 양상이었다.

     

결과는 대실패였다. 1939년 아인슈타인은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나치가 핵폭탄을 개발하기 전에 미국이 먼저 만들어야 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하지만 걱정과 달리 나치는 개발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히틀러의 변덕이다. 전쟁 초기 히틀러가 핵폭탄 개발에 관심을 갖고 지원한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개발에 언제쯤 성공할지는 아무도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전쟁 후반으로 갈수록 히틀러의 관심사는 또 다른 신무기인 V2 로켓으로 옮겨갔다. 실제로 1944년의 런던 폭격에서 V2는 한꺼번에 11개의 건물을 파괴하는 가공할만한 위력을 선보였다. 우란프로옉트에 하이젠베르크가 있었다면 V2 개발에는 베르너 폰 브라운이 있었다. 폰 브라운은 전쟁 후 미국으로 투항해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에 혁혁한 공을 세우게 된다. 

    

둘째는 인력과 자원의 부족이다. 나치 집권 후 이미 많은 과학자들이 독일을 떠난 터였다. 나치는 양자역학과 핵물리학을 유대인의 학문이라며 탄압했는데, 바로 이들이 핵폭탄 개발의 전문가들이었다. 이 과학자들은 미국에서 재회했고, 맨해튼 계획에 참여하여 단 3년 만에 보란 듯이 핵폭탄을 만들어냈다. 그 주역이 된 엔리코 페르미, 한스 베테, 존 폰 노이만, 에드워드 텔러 등 독일 출신들은 20세기 물리학의 올스타팀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투입 예산만 해도 맨해튼 계획은 20억 달러였던 데 비해, 우란프로옉트는 2백만 달러에 불과했다.

     

셋째는 프로젝트 책임자인 하이젠베르크의 결함이다. 하이젠베르크가 천재 이론물리학자임은 모두가 인정하는 사실이다. 그러나 핵폭탄을 만들려면 이론 못지않게 대규모의 정교한 실험도 뒷받침되어야 했다. 이 점에서 하이젠베르크는 별다른 능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물론 맨해튼 계획을 총괄한 줄리우스 로버트 오펜하이머도 이론물리학자였다. 그러나 오펜하이머는 이론은 물론 실험과 설계에 대한 포괄적 이해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또한 그의 곁에는 어니스트 로런스, 엔리코 페르미, 이지도어 아이작 라비 등 쟁쟁한 실험의 달인들도 포진해 있었다.


다만 하이젠베르크는 후일 자신의 태업을 주장했다. 어차피 나치의 패배를 예견했고, 우란프로옉트에서도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을 대비한 기초연구를 했을 뿐, 핵폭탄 개발은 고의로 지연시켰다는 것이다. 이 같은 주장은 엄청난 논란에 휩싸였다. 특히 하이젠베르크의 절친이자 스승인 보어의 주장과 크게 엇갈렸다. 두 사람은 전란의 복판이었던 1941년 코펜하겐에서 만났는데, 보어에 의하면 이때 하이젠베르크는 핵폭탄의 성공을 확신하고 있었다. 물론 하이젠베르크는 정반대의 기록을 남겼지만 말이다. 둘의 이 미스테리한 만남은 영국에서 <코펜하겐>이라는 제목의 연극과 TV 드라마로 제작될 정도로 유명하다.

베르너 하이젠베르크와 닐스 보어의 1941년 코펜하겐 회동은 TV 드라마로 제작될 정도로 현재에도 논란거리이다.

      

어쨌든 하이젠베르크의 태업 주장은 미국에 의해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 덕분에 핵폭탄 개발의 총책임자였음에도 전쟁 후 석방되었다. 그리고는 과학자로서 꽤 평온한 삶을 살았다. 하이젠베르크는 KWG가 MPG로 재편된 이후 그대로 물리학연구소장을 맡아 1970년까지 재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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