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만 대군을 이끌고 알프스 원정에 나선 나폴레옹. 천신만고 끝에 정상에 올라 주변을 둘러보고는 외쳤다. "어? 이 산이 아닌가벼." 지친 대군을 다른 산으로 이끌고 간 나폴레옹. 거기서 다시 외쳤다. "어? 아까 그 산이 맞는가벼."
아마 요즘 세대는 이게 개그인지도 모를 것이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이런 최신 유모어 한번 날려주면 바로 인싸행이었다. 인싸 지망생을 위해 이와 비슷한 글을 모은 유모어 책도 있었다. 뭐 어쨌든, 각설하고.
이제는 화석이 된 개그를 발굴해본 이유가 있다. 요즘 내 심정이 딱 “아놔 이 산이 아닌가 봄ㅠㅠ”이라서다. 지금 쓰고 있는 책 『연구소의 탄생』 이야기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책을 처음부터 다시 써야 할 것 같다.
책의 최초 기획은 이러했다. 해외 연구소 5곳 – 독일 막스플랑크 협회, 일본 이화학연구소, 미국 에너지부 국립연구소, 유럽 입자물리연구소, 미국 국립보건연구원 – 의 현황과 역사를 소개한다. 누구나 이름을 들어봤을 만한 유명한 곳들이다. 하지만 이 연구소들이 왜 만들어졌고, 어떻게 성장해왔는지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이걸 독자적인 주제로 다룬 책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의 기관사(機關史)를 업계 최초로 정리해보고자 한다. 다만 평면적인 기관사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그건 책보다는 보고서에 가깝다. 기관사를 세계사 및 과학사와 교차시켜, 복합적이고 중층적인 맥락을 만들어준다. 그럼으로써 역사의 난관을 극복하고 인류에 새 비전을 제시한 연구소들의 진취성을 드러낸다.
이 기획에 따라 책을 5부로 구성했다. 하나의 연구소가 부가 되는 셈이다. 그리고 각 부에는 연구소의 개관 – 역사 – 시사점으로 내용을 배치했다. 이 통일적 구조가 5부를 통해 반복되도록 했다. 이렇게 하면 각 연구소를 개별적으로 조명하면서도, 연구소의 보편적 경향성도 그려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나는 그렇게 책의 얼개를 확정했고, 별 고민 없이 내용을 써 내려갔다.
하지만 뒤늦게 보니 단점도 많았다. 가장 큰 문제는 이 구성이 구식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과학기술정책의 벤치마킹 보고서에서 흔히 쓰는 방식이다. 나도 배운 게 도둑질이라(…), 업무적으로 익숙해서 이 구성을 그대로 쓴 것 같다. 대학원 시절 모 교수님이 학생들의 발표에 혹평할 때 “보링(boring, 따분)하다”는 표현을 곧잘 썼다. 이 책의 구성이 딱 그랬다. 그리고 서사도 너무 완고했다. 5부가 모두 같은 구조를 취하다 보니, 각 연구소를 서사에 억지로 맞춰야 했다. 그래서 쓸거리가 없는 부분을 굳이 늘리거나, 반대로 집중적으로 다뤄야 할 부분을 생략해야 했다. 서술을 위한 서술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니 다양한 어필 포인트가 살아나지 못했다. 게다가 5개 연구소 외에 다른 흥미로운 곳들도 있는데, 하나의 부로 편성할 만큼 분량이 나오지 않아 빼기도 했다.
출판사 대표님도 이런 문제의식에 동의했다. 현재의 구성과 서술 기조로는 내 장점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표님이 보는 나의 장점은, 지식을 잘게 잘라서 쉽고 경쾌한 문장에 담아내는 것이다. 게다가 과학사학자나 과학정책 연구자가 아니라, 과학정책 실무자로서 현장 경험이 풍부하다는 점도 있고. 그런데 현재의 각 잡힌 기관사 구조로는 이런 점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사실 나도 작업하면서 느끼고는 있었다. 원고를 쓸수록, “이게 아닌 것 같은데…?”라는 불안감이 들었던 것이다. 이대로는 책이 연구서와 교양서의 중간에서 붕 떠 버릴 것 같았다. 이 문제에 대해 대표님과 회의를 하다가, 말 나온 김에 내가 “아예 지금껏 쓴 걸 다 갈아엎을까요?”라고 해봤다. 그랬더니 바로 그러자고 하셔서 당황스러웠다(…). 근데 한편으로 마음은 편했다. 늦었지만 어쨌든 올바른 방향을 찾은 것 같아서.
결국 기존 체계를 다 무시하고, 원점에서 구성부터 다시 짜기로 했다. 그 방향은 이렇다. 일단 책의 핵심 전제는 변함이 없다. 20세기 과학의 새로운 연구방식으로서 ‘연구소’가 기본적인 문제설정이 된다. 다만 연구소 중심의 기관사 서술은 폐기한다. 대신 가벼운 에피소드 중심으로 짧고 경쾌하게 간다. 타깃은 ‘과학에 큰 관심은 없지만, 그래도 알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정도의 생각을 가진 일반인’이다. 이들을 위한 흥미로운 에피소드가 주가 되는 만큼, 주제의식은 느슨하고 무겁지 않게 전달한다. 전체 에피소드는 25개 내외로 편성한다. 그것들이 담지하는 주제는 현대과학의 보편적 문제들 – 정치, 산업, 무기 개발, 연구자금 조달, 인재 유치, 공동연구, 후진국의 추격 등 – 이 된다. 연구소는 이를 드러내는 수단일 뿐, 전면으로 나서지 않는다.
물론 새 기획에서도 지금껏 써둔 연구소들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할 것이다. 내용은 새 기획에 맞게 고쳐야겠지만, 그래도 전체 원고의 절반은 훨씬 넘을 듯하다. 하지만 새로운 연구소들의 에피소드도 추가한다. 미국 프린스턴 고등연구소, 미국 항공우주국, 덴마크 닐스보어 연구소, 한국과학기술연구원 등에도 재미있는 글감이 많다. 기존 기획의 연구소들만큼 분량은 아니지만, 하나의 에피소드를 만드는 밑천으로는 충분하다.
300페이지가 넘는 책 작업을 한 방에 밀고 가기란 쉽지 않다. 어쩔 수 없이 시행착오가 필요하다. 사실 내게는 매우 익숙한 일이기도 하다. 내가 이제껏 쓴 중요한 문서들은 다 이런 갈아엎기 과정을 거쳤기 때문이다. 석사학위논문의 경우 서너 번은 갈아엎었고, 『최소한의 과학공부』도 출판사 피드백을 받고 처음부터 새로 썼었다. 물론 둘 다 집필 초반이었고, 이번처럼 작업 진행이 50%를 훨씬 넘었을 때 그랬던 적은 없지만(…). 새삼 새로 써야 할 원고들이 아득하게 느껴진다. 하긴 마음이 불편한 것보다 몸이 피곤한 게 낫다. 나에게 맞는 방향을 찾은 지금, 마음만큼은 편하다. 다시 시작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