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소의 탄생』을 갈아엎기로 한 뒤 고민이 많아진다. 물론 내 장점을 드러낼 수 있는 기획 방향을 다시 잘 찾았다고 생각한다. 대안으로 쓸 목차와 내용 배치도 머릿속에 대강은 있다. 졸지에 폐기할 운명이 되었지만, 그래도 기존 원고를 충실히 써온 덕분일 것이다. 다만 1페이지로 돌아가 첫 문장부터 다시 시작하려니 부담도 된다. ‘연구소’를 주제로, 과학 문외한에 가까운 사람의 흥미를 끌면서, 분량은 300페이지가 넘어야 한다. 나는 이런 글을 지루하지 않으면서도 밀도 있게 쓸 수 있을까. 솔직히 자신이 없다.
작가에게는 여러 가지 능력이 필요하다. 시대의 트렌드에 밝아야 하고, 자기 분야의 지식도 풍부해야 하며, 아이디어를 포장할 기획력도 있어야 한다. 글도 잘 써야 하지 않냐고? 그거슨 기본이다. 다른 능력이 GOAT급이어도 필력이 후지면 작가 못한다. 그 옛날 <위닝 일레븐>이란 게임을 떠올려보면 된다. 아무리 슈팅과 패스가 좋은 선수여도, 스피드가 구리면 선발로 못 쓰는 것과 같은 이치다(그래서 나도 베컴을 빼고 라이트 필립스를 RM에 넣었다).
요즘 부쩍 필력의 한계를 느낀다. 이전에는 잘 몰랐는데, 300페이지가 넘는 책을 써보니까 확실히 알겠다. 내게는 그 정도로 긴 서사를 이끌고 갈 역량이 부족함을. 사실 이유도 안다. 그만큼 내가 문학을 읽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른 작가님들과 대화를 나눌 때 새삼 이 약점이 느껴진다. 요컨대 나는 브런치에서 보기 드문 문알못이다. 이 브런치란 곳은 죄다 문학소녀 문학청년들만 모였는지— 어쩜 그리들 문학에 해박한지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과학 글을 주로 쓰는 사람으로서 특정 분야가 브런치를 잠식하는 걸 반대한다! …라고 외치고 싶지만, 작가의 필력은 결국 문학의 토대에서 나옴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건 엄연한 사실이므로(깨갱).
예전부터 나는 확실하게 떠먹여 주는 책을 좋아했다. 이를테면 주제는 선명하면서 논거는 정합적인 사회과학책들. 반면 문학은 읽어도 그래서 뭘 어쩌자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은유, 상징, 비유 같은 기법은 암호처럼 느껴졌다. 특히 “이후의 이야기는 독자의 상상에…”로 맺는 열린 결말은 끔찍했다(무라카미 하루키를 좋아하지만 이건 정말 싫다). 사회과학을 전공으로 택하면서 이런 경향이 심해졌다.
반전의 계기가 없지는 않았다. 대학원 시절 모 교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었다. “사회과학으로 대성하고 싶으면 문학을 많이 읽어라.” 그분은 유명한 사회학자였지만 문학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장편소설도 몇 권 냈고, 『토지』의 박경리 선생과 대담도 했었다. 그래서인지 논문도 남들과는 달랐다. 산업과 노동 같은 사회 제도를 다루지만, 그 근간에는 결국 인간이 존재함을 일깨워줬달까. 몇 해 전에는 조용필의 곡에 작사까지 했다는데, 참으로 그 양반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때는 이런 조언도 와닿지 않았다. 문학은 고사하고, 수업 진도를 따라가는 것조차 버거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참 팔자 좋은 소리한다며 넘겼는데… 진지하게 그 이야기를 들었어야 했다는 후회가 든다. 그때부터라도 문학을 읽었다면 지금쯤 얼마나 내공이 쌓였을까. 아마 그게 지금 책을 쓰는 데 데이터베이스가 되어주었을 것이다. 필요할 때마다 적절한 묘사와 문장을 쏙쏙 빼먹을 수 있는.
이미 때는 늦었다. 이제 와서 세계문학전집이나 이상문학상 작품집을 독파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죽이 되든 밥이 되든 300페이지를 채워야 한다. 선 굵은 서사와 고급스러운 표현으로 책의 격조를 높이는 것은 바라지도 않는다. 연구소라는 생소한 조직이 우리 삶에 얼마나 깊숙이 들어와 있는지, 그걸 알리는 것으로 족하다. 빈약한 필력을 쥐어 짜내서라도 써봐야겠다. 열심히 하면 뭔가 되긴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