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은 암기 과목이 아니지만 외울 것이 꽤 있습니다. 원소 주기율표도 그중 하나입니다. 다만 외우기가 쉽지 않습니다. 표에 적힌 원소의 개수만 118개입니다. 이름들도 특이합니다. 수소, 헬륨, 리튬, 베릴륨, 붕소, 탄소, 질소, 산소… 첫 글자만 따서 외우면 좀 낫습니다. 수헬리붕탄질산, 뭔가 국사의 태정태세문단세와 비슷한 느낌입니다. 그래도 외우려는 사람들이 많긴 한 모양입니다. 유튜브에 주기율표로 만든 노래도 여러 곡 올라와 있을 정도입니다.
주기율표는 ‘자연에 존재하는 원소들을 화학적 특징에 따라 분류‧정리한 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표에 올라 있는 118개는 이제껏 확인된 ‘세상의 모든 원소’입니다. 우리는 이걸 잘 정리된 표로 편하게 보지만, 이게 그냥 얻어진 것은 아닙니다. 여기에는 오랜 세월 자연의 비밀을 밝히려 했던 과학자들의 분투가 담겨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원자와 원소의 정체를 밝힌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주기율표의 118개 원소는 과학으로 이룬 인류 지식의 위대한 성취입니다.
원소(element)는 물질을 이루는 가장 기본적인 - 더 이상 분해되지 않는 - 성분입니다. 일상에서 쉽게 접하는 철, 구리, 금 등이 모두 원소입니다. 인류 역사에서 원소를 찾으려는 노력은 고대 그리스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물론 그때 우리가 지금 아는 과학은 없었습니다. 대신 철학이 과학의 역할을 했죠. 자연의 원리를 철학적으로 사고하려 한 사람들을 자연철학자라고 합니다. 저 유명한 탈레스, 아르키메데스, 히포크라테스 같은 이들이죠. “세상의 근본을 이루는 요소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철학에서도 중요한 주제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기에 가장 권위 있는 답을 내놓은 사람이 아리스토텔레스였습니다. 그의 별명은 ‘학문의 왕’인데, 이게 결코 과장된 표현이 아닙니다. 철학이든 사회과학이든 자연과학이든, 서양 학문의 기원을 찾아 올라가면 죄다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만나거든요. 아리스토텔레스는 물, 불, 흙, 공기의 4원소설을 제시했습니다. 지금은 엉성해 보이지만, 당시 사람들에게는 엄청난 설득력을 발휘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4개 원소에서 출발해서 지구와 우주의 운행, 물체의 운동까지 한 방에 설명해버렸거든요. 4원소설에 기초한 세계관은 1,000년 넘게 서양인들을 지배했습니다.
4원소설은 과학, 특히 화학의 발전으로 폐기됩니다. 중세 자연철학이 몰락하고 근대 과학이 등장하면서 생긴 중대한 변화는 실험입니다. 인간이 직접 자연을 파헤쳐 그 이치를 확인하는 실험 방법이 발달하면서, 세상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간단하지 않음을 알게 됩니다. 원소만 해도 그렇습니다. 과학자들은 때마침 발견된 전기를 이용한 화학 실험으로 많은 원소를 알아낼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4개와 비교도 안 되게 다양했습니다. 이런 새로운 원소가 수십 개에 이르자, 과학자들은 고민을 하게 됩니다. 이 원소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할 수는 없을까? 원소들을 분류하는 어떤 규칙이 있지 않을까?
1869년 러시아의 드미트리 멘델레예프가 원소 주기율표를 만들어 이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멘델레예프는 이 업적 하나만으로 역사에 영원히 기록될 가치가 있습니다. 그만큼 주기율표는 혁명적이었습니다. 이전에도 원소들을 규칙에 따라 배열해보려는 시도들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결과가 조잡해서 사용하기 어려웠지요. 멘델레예프는 원소를 원자량 순으로 배열하면 그 성질이 주기적으로 변한다는 사실에 착안해서, 현재와 거의 같은 형태의 주기율표를 발표했습니다. 덕분에 많은 원소를 한눈에 알아봄은 물론, 화학적 특성에 따라 그룹별로 쉽게 분류할 수도 있게 되었습니다. 멘델레예프가 체계화한 원소들의 규칙성은 화학을 명실상부한 ‘과학’으로 확립하는 데 공헌했습니다. 이전까지 화학은 중세의 연금술과 엄밀하게 구분되지 않았거든요. 연금술은 과학보다는 오컬트라 해야겠지요.
멘델레예프 주기율표의 백미는 미지의 원소까지 예측했다는 것입니다. 최초의 주기율표에는 63개 원소만 있었고, 멘델레예프는 표 곳곳에 공백을 남겨두었습니다. 그 빈칸에 적합한 성질의 원소들이 더 있으리라고 내다본 겁니다. 예언은 그대로 적중해서 이 원소들은 실제로 발견되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주기율표의 빈칸이 하나둘 채워지기 시작합니다. 멘델레예프의 원리를 응용해 여러 원소를 예측하고 실험으로 검증한 결과입니다. 그 수가 현재 118개까지 이른 것입니다.
다만 118개 원소가 모두 자연에서 ‘찾은’ 결과는 아닙니다. 그중 26개는 과학자들이 인위적으로 ‘만든’ 것입니다. 이런 걸 인공 원소라고 합니다. 그런데 인공 원소는 자연에 없거나, 있어도 양이 극히 적어서 실제로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요컨대 실험실의 특수한 환경에서나 존재하는 원소입니다.
인공 원소를 만드는 데 필수인 장비가 입자가속기(particle accelerator)입니다. 말 그대로 원자 속 입자들을 빠르게 가속하는 장치입니다. 강한 전기장에서 이 입자들을 쏘아 엄청난 속도로 서로 충돌시키면, 기존에 없었던 원소를 합성해낼 수 있습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닙니다. 일단 충돌한 입자들이 서로 반응할 확률이 극히 낮습니다. 어떻게 겨우 반응한다 해도, 합성된 원소가 존재하는 시간은 찰나조차 안 됩니다. 따라서 인공 원소의 합성 실험에는 인내의 무한 반복이 필요합니다. 가성비가 극악입니다.
그럼에도 인간이 원자와 원소의 초미세 세계를 조작하게 됐다는 것의 의미는 엄청납니다. 과학은 물론 인간의 삶에도 큰 변화를 몰고 왔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인 예가 원자력입니다. 원자력의 기원인 원자폭탄은 핵분열을 일으키는 동위원소들(우라늄 235, 플루토늄 239)로 만들 수 있었습니다. 우라늄 235는 자연에 존재하는 비율(0.7%)이 너무 적어 인위적 분리가 필요했고, 플루토늄 239는 인공 합성으로 만들어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원자폭탄은 경제와 산업에 활용됩니다. 오늘날 전력 생산의 약 30%를 차지하는 원자력도, 결국 원자와 원소를 조작하는 첨단 기술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최초의 인공 원소는 43번 테크네튬입니다. 1937년 미국에서 가속기 실험으로 합성에 성공했습니다. 그 어원은 ‘인공적인’을 뜻하는 그리스어 ‘테크네’입니다. 이건 인간의 기술로 발견한 원소인데, 테크놀로지라는 단어와도 의미가 통합니다. 역사상 첫 인공 원소에 찰떡처럼 어울리는 이름이죠. 이렇듯 새로운 원소는 발견한다고 끝이 아닙니다. 작명 센스도 발견만큼이나 중요합니다.
몇 가지 사례를 봅시다. 자연에서 발견된 가장 무거운 원소는 92번 우라늄입니다. 과학자들은 이보다 무거운 93번 원소를 합성하려 했으나 번번이 실패했습니다. 성공한 줄로 착각했으나 아닌 경우만 수차례였습니다. 그러다 1940년에야 겨우 성공하는데, 이름을 넵투늄이라고 했습니다. 92번 우라늄이 천왕성(uranus)에서 유래해서 93번은 해왕성(neptune)의 이름을 딴 거죠. 그럼 뒤이어 발견한 94번은? 명왕성(pluto)에서 가져온 플루토늄이 됩니다. 그야말로 힙합 래퍼 찜쪄먹을 펀치라인입니다.
원소 이름으로 가장 많이 쓰이는 것이 인명입니다. 선배 과학자를 리스펙하는 취지에서 그 이름을 붙이는 거죠. 96번 퀴륨(마리 퀴리), 99번 아인슈타이늄(알베르트 아인슈타인), 101번 멘델레븀(드미트리 멘델레예프), 102번 노벨륨(알프레드 노벨) 등이 그 예입니다. 사실 유명 과학자의 이름은 과학의 다른 분야에도 많이 쓰입니다. 연구소나 프로젝트의 이름에서도 흔히 볼 수 있죠. 또 국명이나 지명도 원소명에 많습니다. 87번 프랑슘(프랑스), 95번 아메리슘(미국), 98번 캘리포늄(캘리포니아), 115번 모스코븀(모스크바) 등이 그렇습니다. 이건 원소 발견이라는 과학적 위업이 국가의 자존심도 대변함을 상징합니다. 현대과학연구는 국가 단위에서, 국가의 지원을 받아 이루어지니까요.
118개 원소의 절대다수는 유럽이나 미국에서 발견했습니다. 유일한 예외가 일본에서 발견한 113번 입니다. 그래서 원소 이름이 니호늄입니다. ‘일본’을 일본어로 발음한 ‘니혼’을 원소명으로 쓴 거죠. 일본은 덕후의 나라로 유명합니다. 113번 원소의 발견 과정도 덕후스럽습니다. 2004년 9월 일본 연구진은 입자가속기로 아연 원자핵을 비스무트 원자핵에 충돌시켜, 새로운 원자가 0.000344초 동안 존재한 것을 포착했습니다. 2005년 4월에도 같은 실험 결과를 얻었습니다. 하지만 원소 명명권을 가진 국제순수·응용화학연합(IUPAC)이 증거 부족을 이유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추가 실험에 착수했는데, 세 번째로 성공한 것은 8년 뒤인 2013년입니다. 도합 10년이 걸린 연구인 셈입니다. 그 기간 했던 충돌 실험만 400조 번이라고 합니다. 예산도 433억 원이나 썼고요. 경제효과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을 순수과학 연구에 이런 지원을 할 수 있는 이유는, 일본이 그만큼 선진국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라이벌 일본이 했는데 우리라고 못 하란 법은 없겠지요. 우리나라도 대전에 중이온가속기 '라온(RAON)'를 짓고 새로운 원소 발견을 위한 실험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희귀 동위원소를 발견하는 중이온가속기는 웬만한 선진국에는 하나쯤 있는 필수템입니다. 일본만 해도 1981년에 구축했지요. 그에 비해 우리나라는 많이 늦은 편입니다. 다만 늦은 만큼 이제껏 없었던 독창적인 방식으로 뛰어난 스펙의 가속기를 완성해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기대해도 좋겠습니다. 118개를 넘어서는 주기율표 119번 원소의 이름은 꼭 ‘코리아늄’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