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 하면 무겁고 거대한 이미지가 떠오릅니다. 과학과 연결되는 단어들을 보면 이를 잘 알 수 있죠. 과학기술, 과학산업, 과학혁명 등등. 듣기만 해도 부담스럽죠? 그런데 그것은 사실입니다(설마 아니라고 할 줄 아셨나요?^^). 과학은 인류 문명을 지탱해온, 아주 크고 넓은 지적 기반이거든요. 특히 20세기 이후 과학은 일반인의 상식으로는 대체 뭘 연구하는지조차 알기 어렵습니다. 초끈이론, 중력파, 힉스입자 같은 주제들이 그렇죠. 이건 과학이 엄청나게 진보해서, 이제 우리가 인지할 수 있는 영역에서는 연구할 것이 별로 없어서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과학은 우리 삶에 깊이 스며들어 있습니다. 매일 사용하는 스마트폰, 인터넷, 컴퓨터만 해도 최신의 과학 원리가 들어있죠. 특히 인터넷 세상의 무대인 월드와이드웹(www)은 구글이나 마이크로소프트 같은 기업에서 발명한 것이 아닙니다. 힉스입자를 발견한 유럽 입자물리연구소(CERN)의 작품이죠. 수천 명의 과학자가 참여하는 입자물리학 실험을 원활히 하려다 보니 만들어진 게 월드와이드웹입니다. 이런 첨단 기술 말고도, 흔한 일상의 물건들도 과학 지식으로 만들어 낸 것이 적지 않습니다.
주방용품의 필수 재료인 스테인리스강이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수저, 수도꼭지, 냄비, 프라이팬 같은 것이죠. 스테인리스강은 말 그대로 녹슬지(stain) 않는(less) 철입니다. 철을 비롯한 대부분 금속은 시간이 지나면 녹이 슬기 마련입니다. 금속의 핵심 성질은 단단함인데, 녹이 슬면 제 기능을 못 하죠. 그런데 스테인리스강은 아무리 물로 씻고, 오랜 시간 물에 넣어 두어도 녹슬지 않습니다.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그 또한 과학의 위대한 발견입니다.
인류의 효자 금속, 철
철은 인류의 운명을 바꾼 금속입니다. 인류는 철로 도구와 무기를 만들면서 비로소 문명을 꽃피울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철기 시대는 약 3,000년 전 시작되는데, 어쩌면 지금도 철기 시대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현대의 도시를 가득 채우는 고층 건물, 자동차, 기계, 항공기, 선박 등이 여전히 철로 만들어지니 말입니다. 즉 철은 인류 문명의 근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지구상에 철만큼 흔하면서도 단단한 금속은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철도 부식, 즉 녹이 스는 현상에 약하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이건 화학 시간에 배우는 산화‧환원 반응 때문에 생기는 일입니다. 철의 부식도 산화 반응의 일종입니다. 이름대로 풀이하면, 산화는 산소를 얻는 것이고 환원은 산소를 잃어 원상태로 돌아오는 현상입니다. 과학적으로는 이를 전자의 이동으로 설명합니다(사실 모든 화학반응의 본질은 전자의 이동이죠). 특히 철은 반응성이 좋아서, 산소나 물에 노출되면 금세 산화 반응을 일으켜 산화철이 됩니다. 이 산화철이 바로 녹이죠.
산화‧환원 반응은 음악으로 치면 듀엣과 같습니다. 늘 쌍으로, 주고받듯 일어납니다. 철은 자연 상태의 철광석을 제련해서 얻습니다. 제철소에서는 산소와 결합해 존재하는 철광석에 코크스를 넣어서 철로 만듭니다. 이 또한 산화‧환원 반응을 이용한 것입니다. 철광석은 산소를 잃어 철이 되고(환원), 일산화탄소 형태로 변한 코크스는 산소를 얻어(산화) 이산화탄소가 되는 거죠. 따라서 산화철로의 부식 현상은 철이 자연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산화·환원 반응은 전자의 이동을 통해 일어납니다.
여러분 녹이 이렇게 무섭습니다
녹슨 철은 심각한 사태를 초래합니다. 예컨대 철근에 녹이 슬면 콘크리트가 부서지면서 건물이나 다리가 붕괴할 수 있습니다. 또 대형 유조선의 선체에 녹이 슬면 기름이 바다로 유출될 수 있지요. 기계와 자동차의 녹슨 부품은 오작동을 일으켜 사람을 다치게 만들기도 합니다. 이런 사고들은 실제로 종종 일어납니다. 이렇듯 녹은 금속의 단단함을 무력화하기 때문에 인류에게 치명적인 재앙이 될 수 있습니다. 게다가 눈에 잘 띄지 않아 인지하기도 어렵죠. 녹은 마치 게임 속 다크 템플러나 어둠의 사도처럼, 소리 없이 침투해 사회의 기반 시설들을 공격합니다.
녹의 위험성은 수치로 보면 더욱 명확합니다. 미국의 언론인 조나단 월드먼의 분석에 의하면, 미국에서 녹으로 입는 손실은 연간 4,370억 달러에 달합니다. 스웨덴의 GDP보다도 많은 수치죠. 특히 금속으로 만든 무기를 다루는 군대가 심각합니다. 2011년 미군은 부식 방지에 210억 달러를 썼는데, 그해 군 시설유지 비용의 20%였습니다. 녹의 위협이 가장 극적으로 드러난 사례는 자유의 여신상일 겁니다. 본래 구리로 만들어진 자유의 여신상은 갈색에 가까웠으나, 뉴욕항의 바다에 오래 노출되면서 청록색으로 변한 건 유명한 일화죠. 그러던 1980년, 붕괴가 우려될 정도로 심각하게 부식되었음이 확인됩니다. 결국 미국 정부는 14억 달러를 들여 녹을 제거하는, 자유의 여신상 복원 사업을 벌여야 했습니다.
어차피 다 미국에서 일어난 일 아니냐고요? 우리나라의 사정도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2014년 상수도 통계를 한 번 봅시다. 녹이 슨 노후 상수도로 인한 피해액만 6,059억 원에 달합니다. 2023년 1명의 사망자를 낸 분당 정자교 붕괴 사고의 원인도 녹슨 철근이었습니다.
1984~1986년 진행된 자유의 여신상 복원 공사. 녹은 이렇게 거대한 구조물도 위협할 정도로 강력합니다.
자연을 거스른 위대한 발견
영화 <인터스텔라>의 명대사처럼 인류는 늘 답을 찾아내는 존재입니다. 1912년, 인류를 괴롭혀 온 녹의 위협을 막아낸 과학자가 나타났습니다. 스테인리스강을 발명한 영국의 해리 브리얼리입니다. 어쩌면 과학자라고 하기 어려울지도 모르겠습니다. 브리얼리는 정규 과학 교육을 받은 적이 없고, 과학자나 연구소장 같은 공식 직함으로 불리기 싫어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브리얼리는 노동자 출신입니다. 11살부터 산업혁명의 중심이었던 셰필드의 제철 공장에서 일했습니다. 다만 그 어린 나이에도 시키는 일만 하지는 않았습니다. 호기심이 강했던 브리얼리는 늘 과학자의 마음가짐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철의 제작 과정을 유심히 살펴보았고, 궁금한 것은 직접 실험해보며 원리를 익혔습니다. 퇴근 후에는 화학과 금속에 대한 논문들을 읽었습니다. 덕분에 학교 교육 없이도 최고의 금속 전문가가 됩니다. 한 세기 앞서서 전기 모터를 발명한 마이클 패러데이가 그랬듯, 브리얼리도 독학으로 이론을 정립하며 과학자로 성장했습니다.
1907년 브라운 퍼스 사의 연구소장이 된 브리얼리는 철의 부식을 방지하는 기술에 관심을 두게 됩니다. 그때만 해도 이건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는, 아주 황당한 생각이었습니다. ‘녹슬지 않는 철’이라니, ‘깨지지 않는 유리’나 ‘죽지 않는 사람’과 비슷한 발상이었던 거죠. 하지만 브리얼리는 부식이 당연한 자연현상이 아니며 과학으로 충분히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철의 제작 과정에서 재료의 성분 비율을 조정하면 가능할 수도 있다는 판단이었죠. 그래서 다양한 방법을 동원해 실험해봤는데, 딱히 의미 있는 결과를 얻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1912년, 새로운 돌파구가 열렸습니다. 브리얼리는 어느 날 공장 뜰을 산책하다가 유난히 빛나는 쇳조각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고온에 견디는 철강재를 개발하려고 만든 샘플이었는데요. 실험에 실패해서 그대로 버렸지만 브리얼리가 주운 겁니다. 이걸 다시 발견했을 때는 시간도 많이 지났고, 비까지 맞은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샘플은 조금도 녹슬지 않았습니다. 쇳조각을 분석해본 브리얼리는 철과 크롬이 혼합되었음을 알아냈습니다. 철과 크롬을 일정한 비율로 합금하면 녹이 슬지 않는다는, 스테인리스강의 기본 원리를 처음 발견한 것입니다.
스테인리스강을 발명한 영국의 화학자이자 야금학자인 해리 브리얼리(왼쪽)와 녹슬지 않는 철의 등장을 보도하는 1915년 1월 31일자 뉴욕타임스(오른쪽).
다만 엄밀히 말해 스테인리스강이 녹이 슬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그보다는 표면에 얇은 막이 형성되어, 녹이 내부로 침투하는 것을 막는다고 해야 정확합니다. 실제로 크롬이란 금속은 산화 반응이 잘 일어나는 경향이 있습니다. 크롬의 녹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산화물은 일반적인 녹과는 다른 성질을 갖고 있습니다. 일단 매우 얇고 안정적이며, 철 원자와도 잘 접촉합니다. 크롬 녹의 이런 성질이 산소와 철 원자가 만나 산화 반응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죠.
이렇게 우리가 잘 아는 스테인리스강이 탄생했습니다. 스테인리스강은 부식에 강할 뿐만 아니라 가볍고 내구성도 좋습니다. 게다가 세균의 번식도 막아줍니다. 이러니 널리 쓰일 수밖에 없죠. 건축 내외장재와 기계 부품은 물론, 주방용품, 가전제품, 의료기기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현대사회의 필수 재료라 할 만합니다.
과학적 발견으로서 스테인리스강은 X선과 비슷합니다. 둘 다 현대인에게 없어서는 안 될 실용적인 지식이자, 우연과 행운이 개입한 연구결과라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X선도 빌헬름 뢴트겐이 음극선 실험을 하다가 우연히 발견했거든요. 이름의 ‘X’가 발견 당시 정체를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붙인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이 발견들을 얻어걸린 것으로 치부해서는 안 됩니다. 브리얼리와 뢴트겐 모두 신념이 강한 성실한 과학자였고, 사소한 결과도 놓치지 않고 분석했기에 위대한 발견을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스테인리스강의 발명 사례가 주는 교훈은 이러한 학문적 진지함과 성실함일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