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고 싶지만 “뭘 써야 할지 모르겠다”라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아이러니한 일이다. 애초에 우리는 전하고 싶은 생각이나 감정이 있을 때 글을 쓰고 싶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니 무엇을 써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은 “아직 글로 표현하고픈 무언가를 찾지 못했다”라는 뜻이 된다. 이는 글쓰기의 동력이 충분히 깨어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글을 쓰기 전에 먼저 그 동력부터 일깨워야 한다.
그럼 어떻게 하면 그런 무언가를 찾을 수 있을까? 사실 답은 단순하다. 내가 진심으로 좋아하거나 오래 고민해 온 주제를 고르면 된다. 철학자 강유원은 이렇게 말한다.
“주제를 선택하는 것은 너무나 쉬운 일인데도 어려워하는 사람이 많이 있다. 어떤 이는 그걸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는 어리석은 짓을 하기도 한다. 간단히 말해서 공부 주제는 자신이 살아오면서 가장 심각하게 고민했던 문제여야 한다. 실존적인 차원에서 고민해 본 문제를 다듬어서 철학적 주제로 삼는 것이다. 별로 해주는 것 없이 규제만 하고 세금만 잔뜩 걷어 가는 국가가 못마땅했으면 국가론을 주제로 삼아보는 것도 좋다. 자기가 만나는 사람마다 죽어나가는 게 이상했다면 존재와 무의 문제를 주제로 택해도 될 것이다. 주제를 이런 식으로 정하지 않고 요즘 유행하는 거, 남들이 하는 거 붙잡아서 공부하다 보면 유행이 지나서 말짱 헛것이 될 수도 있고, 남들도 다 아는 이야기만 하게 될 수도 있다. 더 심각한 문제는 그런 공부는 얼마 가지 않아 흥미를 잃어버린다는 것이다. 자신의 삶과 따로 노는 공부가 가면 얼마나 가겠는가? 자기 스스로도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 주제를 가지고 남을 얼마나 설득할 수 있겠는가?”
- 강유원(1999), <내가 공부하는 방법> 중에서
이 글은 철학 연구에 대한 것이지만, 글쓰기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평소 자신에게 절실한 물음이 아니면 깊이 있는 글을 쓰기 어렵다는 점에서 그렇다. 강유원은 남들이 하는 주제를 붙잡고 공부를 하면 유행이 지나 헛수고가 되기 쉽고, 자기 삶과 동떨어진 주제는 곧 흥미를 잃고 만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내 고민과 관심으로부터 출발하지 않은 글은 깊이도 진정성도 부족해 독자의 공감을 얻기 어렵다.
좋아하는 것을 쓴다는 건 단순히 취향을 따르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글을 잘 쓰기 위한 가장 합리적인 전략이다. 글의 품질을 결정짓는 요소는 세 가지다. 끝까지 밀고 갈 수 있는 몰입, 읽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설득력, 그리고 한 편으로 끝나지 않고 다음 이야기로 자연스레 이어지는 지속성. 이 세 가지는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서로 맞물려 돌아가며, 하나가 무너지면 나머지도 흔들린다. 이 모든 것을 움직이게 만드는 유일한 연료가 ‘정말 좋아서 쓰는 마음’이다. 좋아하는 주제를 붙들 때만 우리는 오래 앉아 있을 수 있다. 오래 앉아 있을 때만 생각이 깊어진다. 그리고 깊어진 생각만이 독자를 움직인다.
글은 아이디어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몰입의 힘이 떨어지면 멈춘다. 스스로 “내가 왜 이걸 쓰고 있지?”라는 질문이 들면 손끝은 싸늘하게 식어 버린다. 반대로 좋아하는 주제를 쓰면 다르다. 이상하게도 더 읽고, 더 찾아보고, 더 고치고 싶어진다. 내가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글이 나를 끌고 가는 기분이 든다. 이런 순간이 오면 글쓰기는 이미 궤도에 오른 것이다.
좋아하는 것을 글로 써야만 글에 힘이 실린다. 이는 감상적인 격려가 아니라 과학적으로 입증된 사실이다. 심리학자 테레사 아마빌레의 실험에서도 확인되듯, 사람은 외적 보상보다 내적 동기가 강할 때 창의성을 발휘한다. 시인 실비아 플라스가 출판사의 평가에서 벗어난 후 다시 글을 쓸 수 있었던 이유도 그 때문이다. 평범한 사람의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출판사 편집자나 공모전 심사위원의 시선을 계산하기 시작하면 검증된 문장만 고르게 된다. 그러면 실수는 줄겠지만 감동도 사라진다. 이미 누군가가 써 본 길을 다시 걷게 될 뿐이다. 반대로 내가 정말 흥미를 느끼는 이야기를 쓸 때는, 흥미가 탐구의 에너지로 확산된다. 모르는 걸 확인하고 싶어지고, 아는 것도 다시 의심하게 된다. 이때 문장은 더 멀리 뻗는다. 비유가 대담해지고, 논리가 단단해진다.
결국 몰입은 단순한 열정의 상태가 아니다. 그것은 사고의 깊이와 글의 완성도를 결정짓는 기술이다. 좋아하는 주제를 쓰는 사람은 감정적으로만 자유로운 게 아니라, 인지적으로도 가장 예리한 상태에 있게 된다. 이렇듯 몰입이란 문장을 더 깊이 파고들게 하는 지적 엔진이다.
독자에 대한 설득력 또한 진실한 마음에서 비롯된다. 독자는 글쓴이의 태도를 놀라울 만큼 빠르게 감지한다. 억지로 끌고 가는 글은 아무리 문장이 매끈해도 설득의 힘이 없다. 반대로 거칠더라도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를 쓰면, 그 거침이 오히려 생생하게 다가온다. 하루에도 수십 편의 원고를 읽는 편집자들은 이걸 한눈에 구분한다. 잘 계산된 글은 표면이 번쩍일 뿐 속이 비어 있다. 그러나 몰입해서 쓴 글은 작은 문장 하나에서도 “이 사람은 진심이구나” 하는 에너지가 느껴진다. 그래서 편집자나 심사위원을 설득하고 싶다면, 오히려 그들을 의식하지 말아야 한다. 그들을 설득하는 가장 빠른 길은 내가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에 집중하는 것이다.
글을 오래 쓰기 위해서도 좋아하는 주제를 선택해야 한다. 글쓰기는 한 편의 성취보다 지속의 힘에서 진가가 드러난다. 한두 편 반짝 잘 쓰는 건 어렵지 않다. 하지만 매달, 매년 쓰는 건 다른 차원의 일이다. 좋아하지 않는 주제로는 그 길을 버텨낼 수 없다. 반면 좋아하는 주제는 스스로 가지를 친다. 하나의 생각이 다음 생각을 부르고, 글이 연재처럼 이어진다. 독자의 신뢰도 마찬가지로 쌓인다. 독자는 작가만의 고유한 목소리를 기대한다. 그 목소리는 좋아하는 것을 쓸 때만 일관성을 유지한다. 요컨대 자기 삶에서 길어 올린 주제만이 오래가게 된다.
이렇듯 좋아하는 것을 쓰는 일은 개인의 글쓰기 역량을 높인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여기에는 좀 더 복잡한 사회적인 의미가 개입되어 있다. 우리가 쓰고 싶은 것을 마음껏 쓰지 못하는 이유는 훨씬 더 단단한 구조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근대의 학교와 직장은 인간을 효율적인 단위로 조직하기 위해 끊임없이 정답의 언어를 훈련시켜 왔다. 교육은 사유보다 정답을, 창의적 글보다 모범답안을 요구했다. 이로써 스스로 사고하기보다 ‘틀 안에서 정확히 복제하기’를 배웠다. 사회로 나가면 이 훈련은 더 정교해진다. 기획서, 보고서, 홍보 문구 - 모두가 누군가의 승인이 필요한 글이다. 이렇게 형식화된 언어 속에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타인의 검열을 내면화한다.
결국 글을 쓰는 행위조차 체제의 규율 아래 놓이게 되고 만다. 그래서 글을 쓰면서도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묻는다. “이건 괜찮을까? 이건 팔릴까? 이건 인정받을까?” 이 질문은 어쩌면 체제가 우리의 내면에 만들어놓은 검열의 장치일지 모른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좋아하는 것을 쓴다는 일은 하나의 저항이 될 수 있다. 즉 체제가 규정한 유용성의 언어를 내려놓고, 오직 나의 감정과 사유의 궤적을 따라 문장을 세우는 일이다. 요컨대 자기 언어의 회복, 나아가 인간의 자율성에 대한 선언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보편적인 것이다”라는 오래된 명제를 다시 떠올려야 한다. 개인의 사유와 감정은 고립된 사적 영역이 아니다. 오히려 사회가 감추고 싶은 진실, 구조가 설명하지 못하는 틈새가 그 안에 있다. 진정한 보편성은 체제가 만든 공통분모에서 나오지 않는다. 그것은 한 개인이 자신의 고유한 언어로 세계를 다시 서술할 때 생겨난다. 따라서 좋아하는 것을 쓴다는 건 자기만족의 행위가 아니다. 세계 속에서 나의 고유성을 드러내며 보편의 언어를 갱신하는 철학적 실천이 될 수 있다.
역사적으로도 이런 글쓰기가 사회의 변화를 이끌었다. 조지 오웰은 제국의 선전 체계가 언어를 어떻게 타락시키는지 폭로했다. 버지니아 울프는 여성이 사유할 공간조차 갖지 못한 현실을 기록했다. 이들의 글은 개인의 문제의식에서 출발했으나 시대의 언어를 새로 만들었다. 그들의 주제는 시장성이 없었고, 그래서 한동안 외면받았다. 그러나 바로 그 ‘체제 밖의 글쓰기’가 새로운 보편성을 열었다. 좋아하는 것을 쓰는 용기야말로, 언어의 민주주의를 지탱한 힘이었던 셈이다.
오늘날 우리의 글쓰기 또한 비슷한 구조 속에 놓여 있다. 공모전, 플랫폼, 알고리즘은 잘 팔리는 글을 요구한다. ‘좋아요’와 ‘조회 수’가 글의 질을 대체하면서, 사람들은 점점 읽히기 위한 문장만 쓴다. 하지만 그런 문장은 생명력이 짧다. 유행이 지나면 속절없이 사라질 뿐이다. 오히려 시대를 넘어 오래 남는 글은 가장 개인적인 언어에서 비롯됐다. 자기 경험의 균열, 사유의 불안, 기쁨의 미세한 결이 녹아든 문장. 이런 글이야말로 독자에게 “너도 이런 적 있지?”라고 말을 건다. 그 공감의 순간에 개인은 보편으로 확장될 수 있다.
따라서 좋은 작가가 된다는 것은 문장 기술만 익히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체제가 요구하는 언어에 자신을 맞추지 않고, 고유의 언어로 세계를 다시 쓰는 사람이 되는 일이다. 좋아하는 것을 쓰는 일은 그 첫 번째 실천이다. 그것은 전략적으로나 철학적으로 가장 정직한 글쓰기의 출발점이다.
이제 논의를 실천의 차원으로 옮길 차례다. 좋아하는 것을 쓰겠다고 마음먹는 순간, 많은 사람은 다시 같은 질문으로 돌아간다. “그럼 도대체 뭘 써야 하지?” 이 질문의 답을 찾는 과정은 사유의 훈련 그 자체다. 좋아하는 주제를 발견한다는 것은 내 관심의 구조를 근원적으로 인식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다음의 네 가지 방법을 고려해볼 수 있다.
첫째는 순수한 반응을 기록하는 것이다. 최근 몇 달 동안 마음이 움직였던 순간들을 떠올려보자. 분노, 부러움, 슬픔, 감탄, 동정 등 어떤 감정이든 상관없다. 그 감정이 일어난 사건, 문장, 이미지들을 적어보자. 감정은 무의식의 이정표다. 강하게 반응한 지점에는 언제나 세계관이 드러나 있다. 그 지점이 바로 글의 출발선이 된다.
둘째는 반복되는 관심사를 찾는 것이다. 독서 목록, 메모 앱, 인터넷과 SNS의 북마크를 열어보면 일관된 패턴이 보일 것이다. 역사, 관계, 기술, 인물 등 표면의 주제는 다르더라도, 그 안에는 공통된 질문이 있을 것이다. “나는 결국 무엇을 알고 싶은 사람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바로 글로 써내야 할 분야다.
셋째로 ‘싫어하는 것’에서 시작해도 좋다. 좋아하는 주제가 잘 떠오르지 않는다면, 견딜 수 없이 불편했던 일들을 적어봐도 좋다. 분노는 종종 가장 정확한 통찰을 낳는다. “왜 나는 이 장면이 이렇게 싫을까?” “왜 나는 이런 사고방식에 거부감이 들까?” 이 질문을 끝까지 밀고 가면, 사회의 모순이나 인간의 본성에 닿게 된다. 좋아하는 것을 쓰는 일은 때로 싫은 것을 직면하는 용기에서 비롯된다.
넷째로 대상 독자를 한 사람으로 좁히자. 모든 사람을 감동시키는 글은 아무도 감동시키지 못한다. 그 대신 가장 사랑하는 한 사람 - 친구, 동료, 과거의 나 등 - 에게 이야기하듯 쓰자. 대상이 구체화되면, 문장은 자연스럽게 정돈된다. 누구에게 말하고 싶은지 알면, 무엇을 말해야 할지도 분명해진다.
글쓰기는 누가 시켜서 하는 일이 아니다. 읽히지 않아도, 인정받지 않아도 쓰게 되는 순간이 있다. 그것은 살아 있는 사람이 자신을 확인하고자 하는 충동에 가깝다. 좋아하는 것을 쓴다는 건 그 충동에 이름을 붙이는 일이다. 세상의 기준이 아니라 나의 언어로 세계를 재해석하는 일이다. 그래서 좋아하는 것을 쓰는 사람은 덜 흔들린다. 그는 외부의 시선보다 내면의 진실에 더 귀 기울이고, 그 진실이 문장을 단단하게 만든다.
결국 글쓰기가 해방이 되는 가장 확실한 길은 하나다. 좋아하는 것을 쓰는 것. 그러니 무엇이든 좋다. 지금 당신의 마음을 가장 먼저 건드리는 그것부터 쓰자. 그 한 줄이 당신을 작가로 세우는 첫 문장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