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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선택한 자리, 내가 선택할 자리

by 배대웅

책은 출간되는 순간 작가의 손을 완전히 떠나는 것 같다. 어떤 독자가 읽을지, 어떤 맥락에서 회자될지, 어떤 관점에서 평가받을지, 작가는 관여할 수 없다. 대신 책은 스스로 자리를 선택한다. 책의 주제의식, 구조, 문체, 그리고 사회적 관심사가 결합되면서 움직인다. 두 권을 출간해 보니 이 사실이 더 분명해졌다.


첫 번째 책 『최소한의 과학 공부』는 비교적 넓은 독자층으로 퍼져 나갔다. 교양과학 개론서의 성격이 강해서 진입 장벽이 낮았고, 출간 직후 온라인 서점에서 빠르게 반응이 나타났다. 예스24 메인 노출, 과학 분야 Top 20, 독자 후기 등 시장의 흐름이 주도적이었다. 게다가 ‘도서관 사서들이 뽑은 올해의 책’, ‘문화체육관광부 세종도서’에도 선정되면서 공공 영역에서도 일정한 평가를 확보했다. 이 책이 선택한 자리는 명확했다. 독자 기반의 시장과 공적 독서 인프라였다.


두 번째 책 『연구소의 승리』는 경로가 전혀 달랐다. 이 책은 연구소, 과학기술정책, R&D 제도라는 생소한 분야를 다룬다. 대중 서사가 아니라서 독자 폭이 좁을 수밖에 없다. 출간 직후의 반응도 시장이 아니라 언론에서 먼저 나왔다. 특히 조선일보 문화면의 절반을 차지한 서평 기사는, 이 책이 지식인 커뮤니티에서 주목받고 있음을 보여주는 신호였다.

조선일보 애독자 장인어른이 보내주신 인증샷


그리고 얼마 전, 이 흐름을 결정적으로 확인하는 일이 있었다. 국회도서관 ‘금주의 신간’에 1순위로 선정된 것이다. 국회도서관은 매일 수백 종의 자료가 집적되는 국가 최대의 지식 기관이다. 그만큼 큐레이션도 사서들의 엄밀한 검토를 통해 이루어진다. 특히 1순위 소개는 “이번 주의 신간 중 정치·행정·학계에서 가장 참고할 만한 책”이라는 인정을 받은 것이다(…라고 챗gpt가 알려줬다).

국회도서관 '금주의 신간' 중에서도 맨 앞에, 가장 크게 소개되었다


두 권의 책이 다른 경로로 움직이는 걸 보니, 자연스럽게 고민도 생긴다. 책의 자리는 책이 선택한다. 그러나 작가의 방향은 작가가 결정해야 한다. 그렇다면 나는 앞으로 어떤 방향의 책을 쓸 것인가? 내가 쓰고 싶은 글은 구조와 제도, 긴 호흡의 역사, 사회적 맥락을 설명하는 책이다. 대중성과는 거리가 있지만, 공적 지식 생산이라는 측면에서 여전히 필요하다고 믿는다. 두 번째 책의 반응은 이 방향이 유효하다는 것을 확인해 주었다.


하지만 반대의 생각도 든다. 그래봤자 많이 안 읽힌다면 무슨 소용일까? 나의 목표는 앞으로도 꾸준히 책을 내는 것이다. 그러려면 우선 작가로서 확고한 기반을 갖춰야 할 것 같다. 단 한 권의 책이 작가의 위상을 바꾸는 경우는 생각보다 많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원래 아는 사람만 아는 오컬트 작가에 가까웠다. 그러다 『노르웨이의 숲』이 대박나면서 단숨에 거물이 되었다. 훗날 하루키의 술회에 따르면, 『노르웨이의 숲』이라는 ‘100% 연애 소설’은 다분히 전략적인 선택이었던 것 같다. 움베르토 에코도 비슷한 경우다. 그는 일반 독자와는 거리가 먼 기호학자, 중세 신학 연구자였다. 그러다가 갑자기 『장미의 이름』이라는 추리소설을 내면서 세계적 베스트셀러 작가로 떠올랐다.


물론 내가 하루키나 에코 같은 대가가 되겠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이 한 선택만큼은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나도 언젠가는 내 작가적 위상을 공고히 하는 책을 쓰고 싶다. 전문성 중심의 글만으로는 한계가 있음을 느낀다. 많이 팔리는 책을 한 번쯤은 써야 할 것 같다.


문제는 지금의 출판 환경에서 이런 목표는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이다. 책만으로 독자를 확보하는 시대는 이미 끝나가고 있다. 이제는 유명한 사람이 책을 써서 더 유명해지는 대다. 그럼 셀럽이 아닌 작가가 유명해지려면? 유튜브, SNS, 방송 등에서 바이럴을 타는 것이 가장 확실하다. 이 역시 쉽지 않은 일이다. 게다가 나의 글쓰기는 이런 류와는 거리가 멀다. 전문성을 유지하자니 독자층이 좁고, 대중성을 목표로 하자니 지금의 작업 방식과 충돌하는 셈이다.


당장은 뚜렷한 답을 내릴 수 없다. 그래도 분명히 말할 수는 있다. 내가 쌓아온 문제의식과 철학을 버릴 생각은 없다. 동시에 더 많은 독자를 확보하고 싶은 욕망도 숨기지 않는다. 결국 두 지점 사이에서 어렵게 균형을 잡아야 한다. 하지만 그 어려움 자체가 앞으로의 작업에 동력이 되어줄 것이다. 책이 어떤 자리를 선택하든 다음 책의 방향만큼은 내가 정해야 한다. 그 질문을 강하게 품고 있는 지금, 나는 다음 문장을 쓸 준비가 된 것 같다. 전문성과 대중성이라는 목표를 모두 놓지 않은 채,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 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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