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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비 Oct 13. 2021

자발적 게으름

내게 게으르다는 건 삶을 바라보는 마음이 여유로워지는 것

나는 무척이나 게으르다.  설거지는 싱크대에 쌓여있기 일쑤고 맡겨야 할 세탁물은 때가 빠질 때를 기다리며

늘 한구석에서 대기 중이다. 가끔 엄마가 불시에 들어닥치기라도 하는 날이면 어떻게든 들키지 않으려고

숨기기 바쁘다.

다행스러운 것은 그나마 보이는 곳은 어느 정도 정돈이 되어있는지라 일부러 찾아내지 않으면 갑작스러운 손님도 당황스럽지 않다는 것일 뿐 집안 구석구석 손길을 필요로 하는 곳이 한두 곳이 아니다.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었다.

유난히 깔끔하고 큰 살림을 했던 엄마의 맏딸로 자란 나는 집안일을 곧잘 해내는 사람이었다.

음식을 할 때도 설거지를 같이 하면서 조리대는 행주를 몇 번씩 빨아가며 닦고 또 닦으면서

어쩌면 조금은 유별나게 치워대는 통에 보는 사람이 피곤할 지경이라고 했다.

비단 집안일뿐 아니라 모든 일에 그 까다로운 잣대는 늘 나를 피곤하게 만들었다.

약속시간은 무슨 일이 있어도 20분 전엔 도착해 있어야 마음이 편했고

2주나 남은 강의도 미리 준비해 놓지 않으면 불안했다.

발등에 불 떨어져야 잘 된다는 건 나완 거리가 먼 얘기였다.

그렇다고 완벽한 것도 아니었다.

꼼꼼한 성격이 아니라 며칠이 걸려 만든 보고서나 제안서엔 오타 투성이인 경우가 태반이었다. 행여 누구에게 핀잔이라도 듣게 될까 눈치를 살피며 꾸역꾸역 내가 먼저 모든 일을 처리해야 하는 상황이 반복됐다.

시간이 촉박해서 급하게 일을 처리하면 내내 불안하고 초조해서 오히려 일을 망치기 십상인, 완벽하지 않은 완벽 추구자였다.

다른 이에게 들킬까 대충 급하게 처리한 것인 양 너스레를 떨지만 실상 자신을 괴롭혀 가며 며칠을 고민해서 도출한 결과가 다른 이에겐 별것 아닌 것으로 치부될 것이 두려웠는지도 모르겠다. 

그랬다. 나는 사람들의 시선이 두려웠다.

다른 사람에게 내가 어떤 모습으비칠지가 인생의 최대 관심사였고 그들의 눈에 들기 위해 필사적으로 나를 맞춰갔다.

그렇게 대충 완벽하게를 반복하다 보니 괴로운 건 나 자신이 될 수밖에 없었다. 완벽하지도 못하면서 완벽주의자를 꿈꾸는 아이러니한 내 행태는 급기야 주말에도 일을 붙들고 휴가도 반납한 채 그것이 나를 위한 것이라는 착각 속에서 살게 했다.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는데 나 스스로 완벽이라는 사슬을 채우고 거기에 맞춰 내려 안간힘을 쓰고 에너지를 소모하고 있었다.

 



그날 난 분명히 잠에서 깼고, 세수를 하고 옷을 입고 출근을 하고 있었다.

분명 그랬다. 그런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여전히 내 몸이 침대에 널브러져 있는 것이 아닌가.

유체이탈이라도 한 것일까. 나는 도저히 그 상황이 믿기질 않았고 일어나기 위해 젖 먹던 힘까지 내봤지만

몸은 점점 블랙홀로 빨려 들어가듯 바닥으로 내려앉아 숨조차 쉬기 힘들었다.

너무 무섭고 힘들어서 한참을 울었다. 회사에다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까. 믿어주기나 할까. 말도 안 되는 상황보다 더 공포스러운 건 이 얘기를 어떤 식으로든 사무실에 전화를 해서 알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지각 한번 안 했던 내가 거짓말도 유분수지 유체이탈 같은 늦잠으로 오늘 늦겠다고-그때가 이미 10시가 넘은 시간이란 건 전화를 끊고야 알았다- 말하는 것 자체가 죽기보다 싫었다.

전화 통화를 하는 내내 내가 무슨 말을 지껄였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눈물 콧물 쏟아내며 죄송합니다를 연거푸 했던 기억만으로도 충분히 끔찍했다.

불행히도 그런 일은 여러 번 반복됐고 급기야 한의원을 찾아가 뿌리째 흔들리는 내 체력과 원기를 채워주는 한약처방을 받고서야 조금씩 나아졌다.

그런데 말이다. 참으로 얄궂게도 사람들은 나의 부재에 별로 관심도 없었고 건강 잘 챙기라는 말은 의례 밥 한번 먹자는 말처럼 흔한 인사말이 돼있었을 뿐이었다.

난 결코 중요한 사람도 아니었고 내가 아니더라도 세상은 잘만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에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여태껏 아등바등하며 해왔던 모든 일들이 별 것 아닌 것이 되는 순간이었다.


잡고 있던 동아줄이 썩은 동아줄이라는 사실을 호랑이가 알아차렸을 때 호랑이는 그 줄을 놓았을까?

동화 '해님 달님'속의 호랑이는 아마도 끊어지기 전까지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일 게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나를 인생의 성공으로 인도해 줄 것 같았던 성실함과 완벽을 꿈꾸던 생활패턴은 썩은 동아줄처럼 나에게 건강악화라는 나락을 선물했고 나 정도의 능력을 가진 사람은 세상의 주목조차 받지 않는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게 했다.

무언가를 놓는다는 것은 패키지여행 때 보기 싫은 사람과는 한방에서 같이 잘 수 없다고 단호히 말하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다. 보통은 주어진 대로 받아들이기 일쑤인 우유부단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도저히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나를 옭아매고 있는 나의 잘못된 생활습관과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한 완벽주의자 노릇을 그만해야 했다. 그래야 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나는 선택해야 했고 그 선택은 위험을 감수해야 함을 알고 있다.

내가 지불해야 할 대가가 어떤 것 일지는 또한 살아가면서 알게 될 일이다.

게으름과 친해지기로 했다. 그래야 했다.

여기서의 게으름은 무위도식하며 한량처럼 지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해야 한다는 당위성에 대한 책임을 내려놓을 것과 되지도 않는 완벽함을 버리는 것이었다.


그렇게 게으름과 동반하게 되면서 몇 가지 변화가 찾아왔다.

우선은 먼지 한 톨 없는 집을 포기하는 거였다.

매일 쓸고 닦기를 멈추고 청소를 남편에게 맡겼다. 집안일은 피곤한 상태에선 하지 않는다.

얼마간은 마음에 안 드는 청소상태나 쌓여있는 설거지가 내내 신경이 쓰여 오히려 더 스트레스를 받는 건 아닌지 의심했지만 의외로 금세 적응됐다.

나를 대신해 청소해 주는 남편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조금 지저분한 것쯤 슬쩍 눈감아버릴 수 있게 됐다.

그다음으로 쉴 땐 오로지 쉬는 것에만 집중했다.

여행을 가서 온전히 책의 글자가 눈에 들어오는 것이 마냥 신기했다. 이제 주말엔 영화를 보고 책을 읽고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게 자연스러워졌다.

나를 위해 여행을 계획하고 그를 통해 재충전한다는 의미를 나이 마흔이 넘어서야 알게 된 것이다.

무엇을 위해 그동안 오르는데만 집중해서 살았던 것일까. 그러면서 늘 내가 완벽하게 해내지 못해 늘 불행의 여신이 내 곁에만 상주하고 있다며 투덜거리며 살아왔었다.

불행과 행운의 여신은 한 끗 차이로 늘 내 곁을 맴돌지만 선택은 내가 해왔다는 사실을 잊은 채로 말이다.

여전히 나는 일에 있어서는 완벽하기를 꿈꾼다.

하지만 마흔이 넘어서 비로소 보이기 시작한 여유를 조금이라도 만끽하기 위한 몸부림은 오늘도 현재 진행 중이다.


내가 행복해하는 일들이 나를 삼키는 일이 없도록  오늘 일을 내일로 미룬다.

오늘 그 일이 즐겁지 않다면 해낸다 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더군다나 내가 미룬 그 일은 누구도 오늘 일이라는 사실조차 모른다.

애써 부인해 보아도 여전히 나는 그저 보통의 존재이며 누구도 나로 인해 좌지우지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갖는다. 

완벽하지 않았던 나란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그간의 행보는 삶의 여유를 주었다.

어차피 특별한 것 없는 나이지만 남에게 보이기 위해 살아내는 게 아니라 살고 싶어지는 내일이 기다리고 있음에 감사할 줄 알게 됐다.

쉼표와 마침표를 찍을 때를 찾아내는 기나긴 삶의 시간 속에서 오늘은 조금 게으름이 필요한 쉼표의 시간일 뿐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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