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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하 Bakha Sep 04. 2023

[기도일기] 열왕기상 1:38-53

20230904, Mon 

열왕기상 1:38-53

"이 눈으로 그것을 보게 하시니"

 

하나님께서 노쇠해지고 무감각해진, 흐려진 다윗의 정신을 예언자 나단을 통해 흔들어 깨우셨다.

나는 요즘 마치 노쇠해진 다윗처럼 정신이 흐리멍덩하다. 이런저런 것들을 처리하고 알아보면서 생활을 이어가고 있지만, 틈이 나면 내 정신이 흐려지고, 결혼과 장거리 이사를 앞두고 뜬 시기를 보내고 있어서 그런지 내가 뭘 하는 사람인지 잘 모르겠다. 가정교회에서 나눔을 할 때 정리되지 않은 이야기들을 그때그때 생각나는 대로 내뱉게 되어서 매번 찜찜하고 충분히 진솔하게 내 속얘기를 나누지 못한 느낌이다. 정리하고 가늠하고 싶은 것들은 잔뜩 있는데(버려야 할 짐, 필요한 것들, 웹자료 정리, 웹콘텐츠 이전, 앞으로 어떻게 정리하고 작업해 나갈지, 요가 수련과 교육은 이어갈 여건이 될지 등) 좀처럼 동기가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12월이 되어야 성진이 직장이나 생활의 패턴, 환경이 자리 잡힐 것 같아 그런 것이겠지 하면서도, 다 핑계 같다. 언제는 내 삶에 그렇게 무언가 선명한 시기가 있었던가?


주변에서 나에게 물어보는 질문들이 내 정체성을 반영한다고 한다면, 요즘 매번 듣는 말은 "결혼 준비는 잘 되어가니?", "부산 가면 직장은 어떻게 할 거야?" 이니깐, 나는 결혼과 이주를 앞둔 사람일 테다. 나에게도 사회적 인정에 대한 욕망이 있지만(심지어 상당히 컸던), 또 건강하게 살고 싶은 욕망도 있어서 두 가지가 필연적으로 상충될 때마다 나는 지체 없이 후자를 선택했다. 돌아보면, 어느 쪽도 하나님과 크게 관련되었던 적은 없는 것 같다. 다만, 일에 함몰되어 정신 건강이 나빠지면, 타자에게 더 가혹해지고 악한 현실에 무뎌졌던 것은 사실이다. 거룩한 일과 영향력 일을 동일시하며 더 합리화를 많이 했고, 그래서 더 정신적으로 게으르고, 영혼이 망가졌다. 


그러다 보니 사건의 전환 과정마다 나는 결국 ‘생활자'가 되었다. 비교적 일찍부터 몸이 안 좋아지기 시작해서 건강을 위해 시작하던 운동이 전문가 수준에 이르렀지만, 그 기술은 나 자신을 위해 사용할 뿐, 자본으로 치환시키지는 못한다. (웰빙 사업에 불필요한 소비를 덜하고 있는 수준으로 기여) 생활자로서의 내 정체성을 오랜 세월 귀하게 봐주는 20년 지기 대학동기 언니가 있다. 일전에 언니에게 결혼 소식을 알리게 되며 4년 만에 만났다. 대학에서 교편을 잡기까지 언니는 참으로 치열한 삶을 살았는데, 이제 안정이 되며 ‘생활자'로서의 삶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고 했다. 그러니 그 삶에 집중하는 것에 너무 마음 어려워하지 말라고 해주었다. 진심으로 격려가 되었다. 


결국, 생활자로서의 삶에 감사하지도 자족하지도 못하는 내가 끊지 못하는 건 사회적 인정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반복적으로 사회구조적인 죄책감으로 귀결된다. 이런 사회적 인정에 대한 고민 자체가 참 사치스럽다고. 내 육체적 연약함이 장애 수준의 어려움인가? 내 경제적 어려움은 하루 끼니 걱정을 할 정도인가? 경제적 고립을 자처한 것은 나 자신이 아닌가? 인정욕은 인간의 기본 욕구 중의 하나라고 하지만, ‘욕구'를 주장하는 것이 얼마나 사치가 된 사회인가. 인정 때문에 어려워하는 나 자신이 수치스럽고 모두에게 미안하다. 여전히 무엇이 진정 값어치 있는지 전도서를 아무리 들여다봐도 모른다. 그렇다면 내게 부족한 것은 인정이 아니라 삶이다. 삶의 경험이 부족해서 아직 미련하게 망상한다. 어렵게 허락하신 부부 교회는 그 부족을 채워주시려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닐까. 


‘사모'로 불리게 되는 것은 그렇게 싫지도 않고 좋지도 않다. 사실 딱히 내 정체성으로 받고 싶지는 않아서 관심이 없는 상태인 것 같다. 문득문득, 전통적인 ‘사모감'과 거리가 한참 먼 내가 어쩌다 목사랑 결혼하게 되었는지 상고하다 보면 이런 생각이 든다. 각자에게 주어지는 삶은 소위 “you deserve it.”(그럴 자격이 있다)의 맥락이 아닌, “you need it”의 정황을 따라 주시는 것이 아닐까. 각자에게 주신 태생적인 DNA와 구체적인 정황이 다양하듯, 각자의 꽃을 피우기 위해 필요한 양분이 다를 것이다. 사막에서 피어나는 꽃과 우림에서 피어나는 꽃에게 필요한 습도와 햇빛, 영양분이 다른 것처럼. 


여러 시나리오를 상상해 보지만, 불과 한 달 남은 결혼과 이주 이후의 삶이 잘 가늠되지 않는다. ‘사모'라는 사람을 가까이서 본 적도 없고 특별히 그의 역할에 관심 가져 본 적도 없어 상상되지 않는다. 모태 신앙의 친구들이 내 결혼에 관해 “대단하다", “나는 사모감이 아니라서 용기 나지 않더라.” 등의 말을 많이 한다. 사실 그런 표현이 심히 거슬리고 짜증이 많이 난다. 동시에 나의 걱정과 불안에 ‘좋은’ 사례를 들이밀며 괜찮을 거라고 위로(?)해주는 이야기들도 더는 듣고 싶지 않다. (나도 참… 피곤한 사람인 듯--;;) 자신들은 피하고 싶은 삶을 가게 된 나를 존중해서 하는 표현이겠지만, 어찌 되었건 본인들은 원하지 않는 삶이라는 것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런 반응들에서 추측해 볼 수 있는 부분은, 전통적인 사모의 삶이 대중적인 ‘워너비'는 아니라는 것뿐이다. 

하나님이 ‘나’에게 필요한 삶을, 최적의 환경을 주신 것이라고 믿고 싶다. 그 부분에 집중해서 ‘볼 수 있길' 바란다. 흐려진 상태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깨어나 찬양하고 자신의 일을 수행했던 다윗처럼.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죄성과 삶이 아무리 흐려지고 무감각하게 만들더라도, 

언제고 성령의 목소리에 바짝 정신 차릴 수 있는 예수의 양이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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