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허니스푼 Jan 14. 2023

예쁘고 즐거운 중학생 첫째

날라리와 오타쿠 (1)

첫째는 14살 생일을 열흘 앞두고 있다.


11살에 전화기를 사줬을 때는 매일 밤 전화기를 거실에서 충전하고 전화기랑 같은 방에서 잠들지 못하게 했다.  밤에는 항상 잠자리에 드는 걸 봐주며, 정해진 시간에 아이가 자리에 눕고 잠드는 걸 확인했다. 자잘한 규칙으로 단속하기보다는 기본이 되는 원칙을 꾸준히 지키는 게 좋다고 생각해서 일관적으로 수행했다.


13살이 될 무렵, 아침에 알람 소리를 듣고 스스로 일어나고 싶다며 아이는 전화기를 머리맡에 두고 자기 시작했다. 혼자 알아서 자고 알아서 일어나고 싶어했다. 그러는 동안 아이의 취침시간은 9시 반에서 10시, 10시 반으로 슬금슬금 늦어졌다. 요즘 나는 종종 11시가 넘도록 아이가 깨어 있는 걸 모른 척 내버려 둔다.


아이의 공부나 예체능 레슨의 진도나 연습에 손을 뗀 지는 오래 되었다. 어차피 내가 시킨다고 더 잘 하지도 않고 아이의 작은 습관 하나도 바꿀 수 없다. 그래도 스마트폰 사용이나 수면시간은 굵은 선으로 테두리를 그어 놓고 그 밖을 넘어가지 못하게 내가 관리하는 편이었는데, 그 테두리가 자꾸 밀려나고 있다.


먹는 것은 어떤가? 깨작거리며 조금 먹는 아이라서, 좋아하는 음식 위주로 챙겨 주고 아이가 먹어 주면 고마울 뿐이다. 몸에 좋지만 아이가 싫어하는 음식을 먹으라고 타박하며 식습관을 가르칠 생각은 이제 다 버렸다.


그렇게 아이는 어제 오후 3시에 하교해서 영상 보며 간식으로 군만두 먹으며 쉬다가, 4시부터 한 시간 동안 영어과외 하고, 5시부터 좀 더 쉬다가 (아마도 전화기 했겠지), 6시부터 8시 반까지 두 시간 반 동안 댄스레슨 다녀와서, 9시에 저녁으로 돈까스를 먹고 또 쉬다가 (또 전화기 했겠지), 밤 10시쯤 되어 숙제를 시작했다. 보통은 11시 전에 자는데 숙제를 오늘까지 제출해야 한다며 아이는 어제 12시가 넘도록 깨어 있었던 것 같다.


어제 늦게 잤으니 아이는 아침에 피곤해서 오늘은 학교에 안 가고 싶다고 칭얼댔다. '어젯밤에 늦게 잤으니 오늘 아침에 피곤한 게 아니겠니’ 같은 하나마나인 잔소리를 하는 건 나도 싫다. 대신 ‘오구오구 우리 이쁜둥이, 많이 졸립지? 그럼 우리 오늘 학교 가지 말을까?‘ 이렇게 달랜다. 기분이 풀어진 아이는 어찌어찌 시간 맞춰 일어난다.


7시 45분까지 등교 완료해야 하는데 오늘은 몇 분 늦었다. 점심으로는 햄과 스위스 치즈를 넣은 샌드위치를 싸줬고, 아침으로는 과일 약간이랑 본인의 최애 메뉴인 미니피자베이글을 에어프라이어에 돌려 주었다. 언제나 빠듯하게 등교하다 보니 아침은 차 안에서 먹는다. 좋은 습관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이미 테두리는 밀려나서 어쩔 수 없다. 집이든 차 안이든 뭐라도 먹어주니 땡큐다.


그렇게 느지막이 등교하는 차 안에서 아이는 자동차 미러를 열고 마스카라를 칠한다. 귀에는 작은 링귀걸이가 반짝이고 목에는 목걸이, 팔에는 친구들이랑 나누어 낀 수제 헝겊팔찌랑 색색의 고무밴드가 출렁인다. 이것도 말리거나 못하게 하기에는 슬금슬금 너무 늦어 버렸다.


"엄마, 내가 몇 살부터 마스카라를 칠했는지 알아?"

"나 7학년부터 마스카라 하고 다녔는데, 엄마 몰랐지? ㅎㅎㅎ"


너 날라리란 말 들어봤니?.... 라는 말이 입안에서 맴돌지만, 아이의 한국말 실력은 날라리의 어감을 알아차릴 수 없을 것이다. 한창 어리고 즐거운 이 아이가 이쁘다는 생각 절반, 한창 공부하고 연습하며 실력을 쌓아야 할 나이에 이쁘고 즐겁기만 하면 어떡하느냐는 생각 절반이 머릿속에서 왔다갔다 한다.




아이는 특별활동으로 댄스를 하고 있다. 초등학교 내내 짐내스틱을 하다가 싱가포르에서 중학교를 다니면서 학교 댄스팀으로 종목을 바꿨다. 그런데 학교 댄스팀은 친구들이랑 동아리같은 느낌으로 하는 것이라서, 미국에 오면서 좀더 본격적으로 훈련하고 대회에도 나갈 수 있는 전문 스튜디오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런데 반 년쯤 지나 보니 지금 스튜디오에서 아이가 소속된 팀의 수준이 그다지 높지 않아 아이가 좀 더 고된 훈련과 높은 수준의 기회에 대한 갈망을 느끼는 것 같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댄스 세계도 전통적인 수련과정을 거친 사람들을 추려내어 엘리트 리그로 올리는 곳이라서, 탄탄한 기본기가 없이 중간에 들어온 사람에게는 기회가 많지 않다. 그리고 댄스 스튜디오는 학년제로 운영되기 때문에 올해 9월이 되기 전에는 반을 바꿀 수도 없다. 늦게 시작했고 수련기간이 짧으니 진도를 빨리 나가려면 무언가 별도로 노력해야 한다.


아이는 어디서 듣고 발레 스튜디오 두 군데를 찾아 왔다. 지금 다니는 곳에 더해서 발레를 제대로 배우고 싶다고 한다. 일단 오늘 그 중 한 곳에 시범수업을 가보기로 했다. 아이의 현재 스케줄과 둘째의 다른 운동 라이드가 겹쳐서, 여길 다니게 될 경우 어느 요일에 가더라도 첫째, 둘째, 그리고 나까지 시간낭비가 많을 것 같다.


오늘은 집에서 5시에 두 아이를 데리고 나가 15분 떨어진 주짓수 도장에 둘째를 내려주고, 20분 더 떨어진 발레 스튜디오에 첫째를 데려간 후, 15분 이내에 그 곳을 나와 주짓수가 끝나기 전에 둘째에게 돌아가야 한다. 둘째를 차에 태워 다시 곧장 발레에 가서 큰애를 픽업한 후 둘 다 데리고 집에 들어오면 7시 반은 될 것 같다.


이런 날은 저녁은 언제 뭘 해서 먹어야 할지.


아무의 잘못도 아니지만 짜증이 난다. 14살에 발레를 배우고 싶다니 너무 애매하다. 5살이었으면 많은 기회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13-14살은 갈 곳이 별로 없다. 이 나이까지 발레를 하고 있는 아이들은 이르면 5살, 늦어도 8살에 시작해서 이제는 엘리트 레벨에 들어가 있으니 말이다.


중학생한테 이미 너는 늦었으니 하지 말라고 하기는 좀 그런데, 솔직히 이제 발레를 제대로 배워서 도대체 어디까지 갈 지 별로 보이는 길이 없다. 그냥 돈 있고 시간 있는 부모가, 나는 어디까지 너를 위해서 정성을 들일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또 하나의 에피소드가 될 것 같은 짜증스러운 예감이 든다.


사실은 아이가 아니라 나한테 화가 난다. 미국에서 예체능 교육은 나이 제한이 뚜렷하다. 발레, 체조, 피아노, 바이올린 등 수련이 오래 걸리는 종목은 중학교 입학 이후에는 시작도 할 수 없다. 초등학교 동안에 궤도에 올라야 한다. 그러니 어린 아이의 판단에 맡길 수 없다면 언제 무슨 종목을 시작할지, 그만둘지, 계속할지는 부모의 결정이 된다.


내가 너무 많은 걸 이해하고 허용해 주었나? 전날 늦게 자고 아침에 피곤해하는 아이에게 "어젯밤에 늦게 잤으니 오늘 아침에 피곤한 게 아니겠니" 같은 하나마나인 잔소리는 하기 싫었다. 아무런 정보값도 없고 사람 마음을 움직이지도 않으며, 내 화풀이밖에 안 되기 때문이다.


"그 동안에 네가 꾸준히 한 게 없으니 이제 고등학교에 가서 본격적으로 할 게 없는 게 아니겠니" 같은 비난은 하면 안 된다. 하나마나한 잔소리보다도 나쁘다. 아이에게만 화가 나는 게 아니라 나 자신을 자책하게 된다. 내가 너무 아이를 배려하는 부모였던 걸까? 10살 이전, 12살 이전, 아직 어리고 시간이 많고 말을 잘 들을 때 그 때 싫든좋든 내가 적당한 종목을 정하고 아이를 빡세게 훈련시켰어야 했나?


지금 하는 생각을 그 때도 안 해본 건 아니었는데, 그 땐 알면서도 그렇게 되지 않았다. 아직 어린 아이의 미래라는 가능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아이가 어떤 미래를 스스로 선택하고 열어나갈지 모르는데, 그걸 못 믿고 부모 기준으로 억지로 뭘 시키고 싶지 않았다. 내 에너지 낭비이고, 아이와의 관계에도 좋을 리가 없으며, 무엇보다도 그렇게 해서 부모가 생각하는 그리고 남들이 거둔다는 성과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아이 인생의 미래는 아직도 창창하지만 내 품안의 자식으로 살아갈 미래는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미국은 18살에 대학 진학과 함께 집을 떠난다. 어렸을 때는 무궁무진하다고 생각했던 아이의 미래가 중간 이상 펼쳐진 걸 보니 별 게 없다. 예쁘고 건강하고 사랑스러운 아이로 자라 주었지만, 눈에 보이는 성과가 없어서 종종 자책하게 된다.


여태까지 성과를 염두에 두지 않고 키웠으니, 앞으로도 그 기대는 내려놓아야겠다. 그냥 너의 오늘이 행복하면 내일도 행복할 거라는 마음으로 바라본다. 남 보기에 탁월한 어떤 근성이나 실력은 없어도, 생활감각 좋고 눈치 빠르고 언제나 주변 사람을 재미있게 하는 이 아이가 자기 인생길은 잘 찾아갈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니 나는 오늘도 잔소리할 거리들은 접어두기로 한다. 그렇지만 하루종일 머리가 어지럽다.


작가의 이전글 가족의 전통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