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의 새로운 크리스마스 전통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온 가족이 발레 <호두까기 인형>을 보러 갔다. 온 가족이 발레 문외한이라서 미리 유튜브에서 관련 영상을 찾아 남편과 아들에게 예습을 시켰다. 하지만 예습을 하지 않았어도 졸지는 않았을 것이다. 왜냐면 우리 딸이 무대에서 공연하기 때문에!
2023년에 쓴 브런치 글을 읽어보니 딱 작년 이맘때에 14살 딸이 발레를 시작하고 싶어한다며 고민했던 글이 있다. "중학생한테 이미 너는 늦었으니 하지 말라고 하기는 좀 그런데, 솔직히 이제 발레를 제대로 배워서 도대체 어디까지 갈지 별로 보이는 길이 없다. 그냥 돈 있고 시간 있는 부모가, 나는 어디까지 너를 위해서 정성을 들일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또 하나의 에피소드가 될 것 같은 짜증스러운 예감이 든다" 고 썼다.
그 때 발레를 시작했다. 반 년쯤 하다 보니 아이가 잘하고 또 좋아하는 것 같아서 여름 이후로는 병행하던 댄스를 그만두고 발레에만 집중하고 있다. 딸은 빠르게 실력이 늘어 연말에는 학원에서 올리는 <호두까기 인형> 공연에 참가하게 되었다. 아니, 학원 소속의 모든 아이들이 공연에 참가하지만 그중에서 (신참임을 감안한다면) 좋은 역할을 맡게 되었다.
학생들이 공연하는 호두까기 인형은 귀엽고 재미있었다. 우리 딸이 예쁘게 잘하는 것도 굉장히 신기했다. 남편은 "성적 떨어지면 발레 그만둬야 한다는 협박을 그만해야겠다"고 했다. 이미 아이는 그 수준을 뛰어넘은 것 같다고. 부모가 그만두게 하네마네 할 수준이 아니고 본인의 뜻으로 결정하도록 두어야겠다고 말이다.
그러나 우리의 흥분도 잠깐이었다. 공연 소식을 들은 가족들은 이만하면 됐으니 이젠 애 발레를 줄이고 공부에 더 힘을 기울이라고들 했다. 우리 아이는 이제 고등학생이고, 발레 전공이나 발레 특기생으로 대학을 갈 것도 아니며 고작 취미발레로는 대학입시에서 특기활동으로 쓸 내용도 별로 없는데, 그에 비해 들이는 시간과 에너지는 너무 많기 때문이다. 그뿐이 아니다. 지인들 중에는, 춤을 추면 아이가 산만해져서 제대로 공부하기가 더 힘들어진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맞는 말인지는 알 수 없으나 우리 아이가 산만한 것은 사실이라서...
주 4회, 매번 2시간, 오가는 시간까지 합치면 일주일에 10시간 이상 발레를 하는데, 제대로 발레하는 학생들에 비하면 어림없는 연습량이다. 도대체 발레는 어디로 가고 공부는 어떻게 되는가. 우리 부부도 답은 모르지만, 우리는 그래도 아이가 하겠다고 하는 한 계속 시키고 싶다는 데 동의했다.
나의 이유: 발레를 줄인다고 아이가 그 시간에 공부를 할 것 같지 않다. 물론 발레를 5시간 줄인다고 공부를 5시간 더 하는 것은 아니지만 조금이라도 공부를 더 하게 마련이고, 우리 아이처럼 공부량이 많지 않은 아이는 인풋을 늘리면 아웃풋도 늘게 되어있으며, 발레를 비롯해 본인이 좋아하는 활동들을 통제하는 것만으로도 아이를 차분하게 단속하는 효과를 볼 수 있다는 반론도 있다. 어쩌면 그 말이 맞을 수도 있다. 그러나 초등 3학년부터 딸에게 이리저리 독서며 수학이며를 시켜본 내 경험으로는, 이 아이에게 공부는 일정량 이상을 섭취하면 모두 배설되는 비타민처럼, 아무리 들이밀어도 본인이 마음먹은 수준까지만 받아들일 뿐 그 이상은 다 버려진다. 그걸 거스르기 위해 아이를 통제하고 억압하고 싶지는 않다.
또 다른 이유로는, 아이가 성장하면서 배웠으면 하는 많은 것들을 발레에서 얻고 있는 것 같아서 그렇다. 딱히 근성과 지구력을 보이지 않던 아이가 고된 발레를 하면서는 지치지 않고 태도가 한결같다. 배우는 자세 또한 적극적이면서도 겸손하다. 여러 번 전학을 반복한 아이가 발레학원에 강한 소속감을 느끼고 정체성을 형성해가는 것도 기쁘다. 공부도 좋고 대학도 좋지만, 십대 시절에 할 수 있는 이런 경험을 방해하고 싶지 않다.
남편의 이유: 아이들은 변한다. 고등학교 4년 동안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 언제 작정하고 공부를 파고들지, 좋은 대학을 가겠다고 욕심을 낼지, 발레와 공부 두 마리 토끼를 다 잡겠다고 덤벼들지, 발레는 그만두고 공부에 집중하겠다고 할지 모르는 일이다. 또는 대학에 가서 변할 수도 있다. 어쨌든 아이들은 변하고, 그 변화는 어디까지나 본인이 주도하는 것. 우리는 능력 닿는 대로 밀어줄 뿐이다.
남편과 내가 조금 이유가 다르기는 하지만, 우리 둘 다 딸의 발레를 기꺼이 지원하겠다는 의지가 비슷해서 결정하기 쉬웠다. <호두까기 인형>을 보는 것은 아마 우리 가족의 새로운 크리스마스 전통이 될 것 같다. 그렇게 4번을 보고 나면 딸은 대학에 가겠지. 더 이상 딸이 무대에 서지 않게 되면 다같이 링컨센터에 가서 뉴욕시티 발레단이 공연하는 <호두까기 인형>을 관람해야겠다. 그 때쯤에 우리는 발레 애호가가 되어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