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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니스푼 Apr 19. 2024

파리에서의 스냅촬영

 내 통제욕과의 싸움

아이들 봄방학을 맞아 유럽여행을 간다. 런던-파리 7박8일 일정.


내일 저녁 출발인데 아직 짐도 못쌌다. 아이들은 내일까지 학교 수업, 오늘 저녁까지 각자 발레와 테니스 레슨이 있고 여행가기 전에 치워놓아야 할 집은 엉망진창이다.


원래 내 성격은 여행가기 전에는 집을 싹 치워놓고 가는 것이었다. 이 여행길에서 혹시 내가 못 돌아오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수습하는 데 아무 문제가 없도록 방정리 정도가 아니라 주변 정리까지 싹 하고 떠나야 직성이 풀렸는데, 4인용 여행을 다니다보니 이젠 전날까지도 쌓인 빨래가 한더미다.


그래도 유럽여행인데 준비는 하고 가야지. 12월 초에 비행기 티켓을 끊고 지난 4개월 동안 틈틈이 기본 계획을 세웠다. 고생하러 여기까지 왔냐며 짜증이 나지 않도록 쉬엄쉬엄, 그러나 모처럼의 유럽에서 우왕좌왕하지 않도록, 우선순위와 동선과 취향을 고려해서 큰 계획 위주로 짰다.


항공권, 호텔 3군데, 유로스타, 뮤지컬 2편, 엘리베이터 타고 올라가려면 일찍 예약해야 한다고 해서 티켓 오픈날짜 기다렸다가 구매한 에펠탑 전망대, 사람 많아지기 전에 뛰어들어가 모나리자를 보고 오려고 미리 구매한 루브르 박물관 9시 입장권, 이렇게 준비하다 보니 저절로 쌓이는 정보 때문에 총 7박 중에 5번의 저녁식사도 이미 예약해 뒀다.


그런데 여행일자가 다가올수록 가슴이 답답하고 한숨이 난다.


가족사진 촬영 때문이다.


지난 가을 부모님 모시고 파리에 갔을때 가족사진을 찍었던 게 좋아서 이번에 우리도 찍기로 했다. 다만 그 때 사진사님이 조금 아쉬워서 이번에는 지인에게 소개를 받아 다른 분을 예약했는데, 막상 여행날짜가 다가오니 온 가족이 적당히 어울리게 맞춰 입을 옷이 한 벌도 없는 것이다.


파티도 아니니 지나치게 차려 입을 수도 없고 (지나치게 차려 입는 것이라면 차라리 쉬웠을지도), 그렇다고 매일 입는 까만색 추리닝에 후드티 또는 까만색 유니클로 경량패딩을 입고 사진을 찍을 수도 없는 일. 한여름이었다면 온가족이 청바지에 티셔츠만 입어도 산뜻할 텐데 유럽의 봄날씨는 애매했다.


그리고 우리 가족의 패션 센스는 너무 초라했다. 나도 옷을 잘 입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기본 디자인과 색상 정도는 튀지 않게 맞춘다고 생각하는데, 우리 남편은 훨씬 더 후줄근하게 입는다(고 나는 생각한다. 본인은 다르게 여길지도). 사진찍는다고 온 가족이 옷을 한 벌씩 사는 것도 어렵지만, 이런 용도로 산 옷을 우리가 평소에 잘 입을 것 같지 않다.


이렇게 생각하고 딱히 옷을 안 샀는데, 막상 여행이 다가오면서 사진사님의 인스타그램을 보니 가슴이 졸이다 못해 콱 막혔다. 왜 이렇게 요즘 일반인들은 복장이며 포즈며 준연예인처럼 사진을 찍는가?


급한 마음에 얼른 옷을 사볼까 블루밍데일과 제이크루 웹사이트를 뒤져봤지만 가족을 위한 코디 아이디어도 없고, 개중 괜찮을 듯한 옷은 이제 주문하면 언제 제작되어 나올지 모른다. 직장일과 집안일이 매일 달리기 시합하듯 굴러가는 와중에 뛰쳐나가 어디서 코디 아이디어가 벼락같이 떨어지길 바라면서 한두 시간 쇼핑몰을 헤매도 봤지만 헛일이었다.


큰 맘을 먹었다. 우리는 그냥 있는 옷으로 간다. 그래도 봄이니까 까만 옷은 말고, 네 명 다 청바지에 밝은 크림색 윗옷을 받쳐 입는 걸로. 티셔츠는 추울 테니 후드티로.


이렇게 마음을 정하고 나서 여행 최종점검을 하는데 사진사님이 보내주신 '옷차림 참고자료'가 있다.

피해주실 것: 후드티, 청바지, 운동화......!!!


더 이상은 옷을 사러 나갈 시간도 주문해서 배송시킬 시간도 없고, 무엇보다도 여전히 아무런 코디 아이디어가 없는 상태에서 가족들 옷 맞춰 살 에너지가 없다. 뭔가 크게 망쳤다는 생각에 가슴이 조여오고, 집안에 다른 일은 쌓여 있는데 아무것도 손에 잡히질 않는다.


상황을 바꿀 수 없다면 마음을 바꿔야지. 도대체 왜 요즘 사람들은 모든 것에 이렇게 기준이 높을까? 소셜 미디어 때문이다. 나는 인스타그램을 안하더라도, 인스타그램이 있는 세상에 살고 있는 터라 그렇다. 가장 높은 기준의 결과물만 소셜미디어에 넘쳐나서 그렇지 못한 모든 것들은 뒤쳐진 듯이 여겨지는 세상 말이다.


우리는 그냥 촌스러운 미국인 관광객 가족이 되기로 했다. 아마도 우리는 에펠탑 앞에서 청바지와 후드티를 입고, 운동화를 신고, 그다지 자연스럽지 않은 포즈로 넷이 나란히 서서 증명사진 찍듯이 이를 활짝 드러내고 웃으며 스냅사진을 찍게 될 것이다.




여기까지 결심한 후에 날씨 앱을 확인하니 다음 열흘 내내 파리와 런던의 날씨는 흐리고 춥다.


촬영용 복장을 고민하면서 4월 초부터 내내 날씨를 확인했는데 그동안 늘 좋더니만, 막상 우리가 갈 때가 되니까 내내 흐리고 춥다. 아... 이럴 수가.


그런데 이상하지? 내가 통제할 수 없는 나쁜 일이 일어나 버리니 오히려 파이팅이 생긴다. 날씨가 나쁘더라도 따뜻하게 입고 우리만 즐거우면 돼. 결국은 상황이 안좋을수록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우리 마음뿐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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