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하지 않았던 소녀시절에 대한 그리움
트위터에서 '청량하다'며 너도나도 감탄을 내뱉는 뉴진스의 '버블검' 뮤직비디오를 봤다. 청량함, 아련함, 그리움, 소녀시절... 주로 이런 단어로 뉴진스를 수식하고 있었다. 뮤직비디오를 반쯤 보다 끈 내 감상은 이렇다. 이게 그렇게 청량하게 아름다운가? 우리 집에서 흔히 보는데?
우리 집에 있는 15세 여자아이가 딱 이런 느낌이다. 물론 화보 속이나 무대 위의 아이가 아니기 때문에 하루종일 그런 건 아니다. 하루 한두 번씩 한순간 반짝이는 이런 모습을 본다.
딸은 날씬하고 몸을 잘 쓴다. 초등학교 때 짐내스틱, 중학교부터는 댄스, 그리고 지금은 일주일에 10시간씩 발레를 하고 있으니 당연히 몸놀림이 좋다. 젊고 잘 훈련된 자기 몸을 편안해한다. 예쁜 옷을 입을 때도, 춤을 출 때도, 무언가를 흉내내며 웃길 때도.
그러나 사람들이 뉴진스 뮤직비디오를 묘사하는 "존재하지 않았던 소녀시절에 대한 그리움"을 딸에게서 느끼는 것은 외모 때문만이 아니다. 딸은 자기 자신을 편안하게 여기고 본인의 상황을 좋아한다. 언제나 현재에 산다. 한 번 사는 지금 이 순간이 즐거운 십대 소녀를 집에서 매일 보는 것은 놀라운 경험이다.
나는 십대 시절에 그렇게 현재에 살지 못했다. 내가 생각하는 나는 남들에게 보이는 것보다 더 멋진데 충분히 인정받고 사랑받지 못하는 것 같았다. 현재 상황이 다소 불만족스러웠기 때문에 시선은 언제나 미래를 향하고 있었고, 그래서 더 열심히 공부하며 앞날을 기약했다고 말하고 싶지만, 정말로 그랬는지 아니면 다른 길이 없어서 꾸역꾸역 공부만 한 건지는 모르겠다. 공부만 열심히 했는지도 이젠 모르겠다. 공부 아닌 것을 할 여지가 없었기에 책상에 오래 앉아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거창하게 썼지만 흔한 중2병의 증상이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평범해지기 싫었던.
그런데 내 딸은 평범한 현재를 즐긴다. 그리하여 딸을 보면 내게는 존재하지 않았던 소녀시절을 보는 것 같다. 딸은 오늘 학교에서 브롱스 동물원으로 현장학습을 간다며 새벽부터 일어나 샤워하고 머리를 높이 올려 묶었다. 짧은 청바지와 흰색 탱크탑 위에 파우더블루색 후드 집업을 입고, 룰루레몬 벨트백을 메고서 날아갈 듯이 차에서 내리는 딸의 뒷모습을 보며 평범한 인생을 즐거워하는 젊음에 눈이 부셨다.
물론 부작용은 있다. 미래를 별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앞날을 계획하거나 장래희망을 품지 않는다. 좋은 직업, 좋은 대학에 대한 욕심도 없고, 열심히 공부해서 뭘 이루어야겠다는 생각도 하지 않는다. 한 마디로 현재를 희생해서 미래를 도모하려는 의욕이 없다.
나는 이 나이에는 아직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과, 아니 이 나이에도 여전히 이렇다니 하는 두 가지 생각이 왔다갔다한다. 입시를 중심으로 한 한국식 교육관에 따르면 내가 무책임한 것일 수도 있다.
딸에게 앞날에 대해 생각하고 미래를 준비할 기회를 안 준 건 아니다. 나와 남편은 둘다 명문대를 나와 책상물림 직업을 가진 부모이고, 우리가 아는 유일한 방식인 학습에 대해 진지한 자세를 갖고 아이들을 키우는데, 마치 가벼움으로 방수처리라도 된 듯이 딸에게는 이런저런 잔소리나 불안감이 안 먹힐 뿐이다. 적당히 해서는 안 통한다고 깨달았을 때 그걸 넘어서 강요하거나 좋아하고 즐거워하는 것들을 못하도록 억누르지는 않았다.
우리가 살았던 인생은 한 가지 방법이었지만 그게 정답이거나 유일한 길은 아닐 것이기에, 우리는 딸을 적당히 놔두기로 했다. 놔두지 않는다면 어째야 할지 방법도 모른다. 그러나 하루하루 딸의 모습을 보는 것은 솔직히 즐겁다. 이 아이를 바라보면 행복은 삶의 자세이고, 오늘이 행복하면 내일도 행복할 거라고 믿게 된다.
그렇게 아무 일도 없는 일상 속에서도 기쁨을 흩뿌리며 사는 딸을 보며, 나는 아, 존재하지 않았던 소녀시절에 대한 그리움이 바로 이런 것이구나 하고 느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