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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니스푼 Oct 20. 2024

요리와 문학

흑백요리사와 한강 작가로 인해 즐거운 가을

시월 첫째 주말에는 유태인 새해 명절이 있어서 아이들 학교가 목요일부터 쉬었다. 연휴 동안 장안의 화제라는 <흑백요리사>를 보기 시작했는데 목요일부터 우승자가 발표되는 화요일까지 멈추지 못하고 하루 두 편씩 내리 시청했다. 시리즈가 끝나고 나서도 완전히 빠져나오지 못한 채 흑백요리경연의 세계에 살고 있다.


"나야, 들기름"이 머릿속에서 맴돌아 들기름간장소스를 만들어 들기름막국수를 해먹었다. 다음 끼에는 로메인 상추를 남은 소스에 무쳐 들기름간장샐러드를 선보였다. 다음 날에는 냉동실에서 잠자고 있던 말린 제주도 무를 꺼내 들기름에 볶고 새우젓도 넣어서 무우국을 했다. 무우국은 가족들 반응이 별로였다. 무우는 아무리 맛있어 봤자 무우 맛이었다.


가을이니까 수퍼마켓에서 단호박을 사왔다. 도서관에서 빌려온 <백종원이 추천하는 집밥메뉴> 책을 보고 단호박조림을 했는데 아이들의 반응이 그저 그랬다. 혼자서 "무한호박요리지옥"을 선포하고 이번에는 단호박죽을 끓였더니 반응이 좀더 좋았다. 이젠 호박죽 때문에 산 팥이랑 찹쌀가루를 써야 한다. 남은 재료로 단팥죽을 끓이겠다고 했다. 왜 또 죽이냐며 불평하는 아이들에게 말했다. "주방에서 셰프보다 높은 건 재료야. 남는 재료는 다 사용해야지."


흑백요리사의 흥분이 잦아들기도 전에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한국어로 읽고 쓰기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더할 수 없이 기쁜 일이다. 미국에서는 아침에 수상소식을 들었는데 오후에 도서관에 가보니 이미 한강 작가의 국문판 소설은 전부 대여중이었고 대표작들에는 40건 이상의 대기가 걸려 있었다. 세 군데의 도서관을 발빠르게 돌아 아마도 마지막으로 남은 한 권이었을 <흰>을 빌려왔다.


그렇게 중순이 되도록 약간은 들뜬 상태로 시월을 보내고 있다.


흑백요리사를 보면서 파인다이닝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고 들었다. 맨하탄 가까이에 살면서 한때는 파인다이닝 식당도 찾아다녀 봤는데 내게는 안 맞는 음식이라는 결론이었다. 뉴욕의 파인다이닝은 굉장히 비싸다. 우리 부부가 같이 먹었던 제일 비싼 음식은 와인 페어링 포함해서 둘이 먹은 음식값과 세금, 봉사료, 주차비를 합치니 $1,000에 가까웠는데 그게 십 년 전의 가격이니 이제는 더 비쌀 것이다.


단순히 음식의 재료와 맛, 서비스로는 그 가격을 설명할 수 없다. 흑백요리사에서 봤듯이 파인다이닝은 음식으로 표현한 셰프의 예술세계라고 생각한다. 예술작품이기 때문에 부르는 게 가격이 되고, 한 끼의 식사라기보다는 희귀한 경험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그 가치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감상할 줄 아는 건 아니다. 그리하여 파인다이닝의 진입장벽은 가격이 된다.


가장 높은 수준의 소설은 문학의 파인다이닝에 견줄 수 있겠다. 그것은 작가가 표현한 예술세계이고, 예술작품이 다 그렇듯이 누구나 쉽게 이해하고 즐길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런데 음식의 파인다이닝과 달리 책 가격은 누구에게나 동일하다. 가격이 진입장벽이 되지 않는다. 대신 문학의 파인다이닝은 지루하거나 어려워서 별로 재미가 없는 경우가 많다. 누구나 들어봤지만 아무도 읽어보지 않은 위대한 문학작품들은 책이 비싸서 그런 것이 아니다.


읽기도 이해하기도 쉽지 않은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의 작품들을 동시대인으로 작가가 의도한 그대로의 원문으로 읽을 수 있다니 가슴이 뿌듯하고 기대감에 신이 난다. 흑백요리사들의 식당은 찾아갈 수 없어도, 한강 작가의 소설은 읽을 수 있으니 말이다.


매일 요리를 하고 틈틈이 책을 읽는다.


실은 나는 요리하는 사람이 아니다. 물론 먹지 않으면 살 수 없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더 좋지만, 나는 맛에 대해 무딘 편이라서 맛있는 것을 만들어 먹고 찾아가 먹는 것은 내 즐거움이 아니다.


내 즐거움은 읽고 쓰는 것이다. 먹는 것보다 읽는 것을 즐기고, 요리하는 일보다 글을 쓰는 일에 더 자신 있다. 그렇지만 전문 작가는 커녕 딱히 글쓰기가 필요한 직업을 갖게 되지 않았고, 살다 보니 이제는 쓸 이야기가 없어져 버렸다. 쓰고 싶은 욕구와 표현하고 싶은 이야기 중에 어떤 것이 먼저인지 모르지만 앞서거니 뒤서거니 둘 다 사라졌다.


나라는 사람의 개성과 정체성에 더 가까운 글쓰기와 글읽기는 일상에서 그 자리가 위태로운데, 취미도 적성도 없는 밥하기는 매일 한다. 재능도 열정도 제대로 배운 적도 없으니 매일 해도 여전히 실력은 그저 그렇다. 어디 요리 뿐인가. 나이들수록 살아가는 것에 대한 나의 기술은 다 그저 그렇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하루하루 열심히 살지만 그것들이 쌓여 남보란 듯이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무래도 없을 것 같다.


좋아하고 잘하는 것을 일찍이 찾아 수련하며 사는 인생을 꿈꾸었다. 요리를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리는 에드워드 리의 창의성과 우아함, 심사의도를 정확히 파악해 그들이 원하는 그 이상의 것을 가져오는 나폴리 맛피아의 영민함, 음식의 맛 재료손질 부엌정리 하다못해 태도까지 최고였던 트리플 셰프의 완벽함에 경탄했다.


그렇지만 매일의 내 하루를 잘라 접시에 올려 내놓는다면 나는 어떤 요리사일까?


"이거는 제가 매일 하는 음식이잖아요, 새로 해서 만든 거나 이런 게 아니라 지금까지 내가 20년을 넘게 해 온 음식인데 거기에 대한 점수가 나왔을 때 그때 내 기분은 어떨까?" (흑백요리사 10화)


누가 몇 점을 주든지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지금까지 해온 일에 대해서 보람되고 너무 좋고요 정말 감사드리고 영광이었습니다." (흑백요리사 10화)


묵직한 감동으로 흑백요리사 모두를 응원했지만, 끝나고 나니 이모카세 1호님의 사연이 마음에 남는다. 어려서부터 생계를 위해서 해야 했던 일이 어느새 인생의 미션이 되어버렸다. 인생의 꿈과 미션은 어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그냥 오늘 내가 하는 일이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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