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02 23 금
너에게
나는.
너를 잊으려고 했어.
너에게서 벗어나려고.
잊을 수 없었지만 잊고 싶었어.
네가 나를 잊었다고 생각했으니까. 지고 싶지 않았어.
너보다 잘하는 건 하나도 없었지만.
그거라도 너한테 뒤쳐지고 싶지 않았어.
그러나 새로운 환경에서 스무 살을 시작하던 그때
연락 없는 너를 생각하며 힘을 냈어.
낯선 환경, 낯선 관계들 속에서 어쩔 줄을 몰랐던 나는
집에 돌아오면 너의 편지들 중 하나를 조심스레 꺼내 읽거나
너의 편지를 모아둔 은빛 봉투를 가만히 들여다보았지.
차마 안아볼 수는 없었어.
너와 학교가 갈리던 열일곱. 나는 조금 너이고 싶었어.
너처럼 전교 석차를 가질 수도 뭘 하든 대표가 된다거나
모두의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뭐든 해낼 수 있었던 너처럼은
평생 될 수 없는 건 알았어.
하지만 조금 명랑하고 맹랑해지고 싶었어.
물론 그건 너와 다르지.
넌 늘 당당했고 눈부셨고 담담했으며 솔직했으니까.
나는 그저 좀 덜 수줍은 아이가 되고 싶었어.
그저 조금 말이야. 그런데 그것조차 어려워서
만용으로 넘어가게 되어버리더라.
그러다 정말 너의 편지를 받을 수 없게 된 스무 살부터는
그게 내 옷이 되어버렸어.
정말 맹랑한 구석이 생겨버렸지.
집에선 무소불위의 오냐오냐 큰 큰 딸이었으니까.
그걸 밖에서도 하게 되더라. ^^;
그러다 널 어느 때쯤엔 놓쳐버린 것 같아.
넌 점점 내게서 멀어졌어.
버스 차창에 머리를 기대고 있다가
길을 가다 책을 읽다 널 떠올리곤 했겠지.
하지만 나는 널 어디서도 볼 수 없었고
나를 보이기도 싫었어.
나는 늘 나 스스로에게조차 나 자신이 어색했어.
그렇게 이십 대를 보내고 삼십 대가 되고
아버지가 떠나시고. 그 슬픔이 나를 온통 집어삼켰어.
난 간신히 그리고 열심히 버텼지.
그리고 사십 대의 나는.
뭐라고 해야 하지... 쌀 씻고 난 물색? 그런 상태였던 것 같아.
그러다 오십이 되었잖아.
때때로 너를 떠올렸겠지. 아주 잠깐씩.
왜냐면. 나 자신은 너를 그리워할 자격도 없는 것 같았으니까.
그러다 그렇게 그냥저냥 살다가
갑자기 너를 이렇게 그리워해.
슬펐지. 그때의 바보였던 내가.
그 이상으로 너를 아프게 한 내가 미웠고. 슬펐어.
그 슬픔은 나를 가만두지 않았어.
나는 무서웠고 두려웠어.
너를 볼 수 없을까 봐.
네가 잘 지내려니 했던 나는 멍청이였고 비겁했어.
그러나 뒤돌아, 너를 찾았더라면
너를 또 잃었을 거야.
난 늘 못된 친구였으니까. 너의 못된 친구는 네가 아니라 나였으니까.
나는 아무에게도 나를 내려놓지 못했어.
용기가 없었으니까.
네가 없는 곳에서는 조금쯤 네가 되고 싶었어.
아니, 진짜 내가 되고 싶었어.
잘 웃고 마음이 헤픈 나.
너한테처럼 굴고 싶지 않았어.
심각한 것도 싫었고 얌전한 것도 싫었고
울적한 것도 싫었어.
생각이 깊은 것도 아니었고
네가 아는 걸 나도 아는 척하고 싶어 하는 나도 싫었어.
나는 자유롭고 싶었어.
마음껏 쑥스러워하고 마음대로 어색해하고
뻣뻣하게 굴다가 마구 웃는
이상한 애로 보이고 싶었어.
그런데, 그렇게 할 수가 없었어.
네가 아는 나인 척하고 싶어서 지쳐갔지.
그러다 내가 나한테서 도망친 거야.
그게 진짜야.
너를 마지막 보았던 날.
너는 나를 경멸했을 거라 생각했어.
나를 더 이상 보고 싶어 하지도 그리워하지도 않을 거라 생각했어.
그래서 그게 네가 아니라고 믿으려 했지.
너의 편지가 오면 그건 네가 아니었던 거니까
너의 편지를 기다렸어.
그러나 그날 이후로 너의 편지는 오지 않았어.
1년도 2년도 3년도 기다렸는데...
너를 만날 수 없었어.
나. 는. 포기할 수 있었어.
어차피 네가 알던 나는. 네가 생각하는 그런 애가 아니었으니까.
(네기 생각하는 내가 뭔지도 몰랐지만_그저 내 생각의 나..)
그동안 너를 기만한 나에게 돌아온 당연한 결과라 여겼어.
그리고 너는 나한테 속은 너 자신을 한심해하리라 여겼어.
넌. 어떻게 편지 한 통 하지 않을 수 있었어?
그래, 너의 편지를 보니 내가 먼저 오래 답장하지 않았지?
너에게. 너에게 선물처럼 주고 싶었는데.
나의 고2. 마지막 고3의 결과물.
다 필요 없게 되어버린 쓰레기였지만
거기 가서 내 나름의 망나니(내 기준에서)로 살았어.
그러니까 내가 살아온 행적은 네가 모르길 바라.
하나도 안 자랑스러우니까.
흑역사라는 거. 나는 내 인생 다인 거 같아. ^^
보고 싶어.
그렇게 살았고 오늘에 왔지만
이제야 너에게 보고 싶다고 하는 만용을 너에게 부리고 있어.
내가 내 인생 전체에서 너를 만났다는 게
뭔지 알게 되어서.
너무 아파서 몸도 마음도 정신도 아프게 되었지만 다행이야.
이렇게 되지 않았으면
네 말처럼 어린 날의 동화로 끝나버렸을 거야.
정말 네가 있었던가 하며.
정말 우리가 있었던가 하며.
너는 내 평생이야.
나의 소중한 사람들이 물어봐.
왜 갑자기 너냐고. 너에 대해 들어본 적도 없다고.
당연하지. 너는 나 혼자 간직한 소중한 보물이었으니까.
나는 너를 말하지 않고 오래 살았어.
너는 내 마음에서만 살았어.
그런데 이제 만나야 할 거 같아.
네가 알아야 할 것 같아.
내 진심을.
너라는 존재. 우리의 우정. 내가 배운 것.
그게 너에게 작은 보람이 되었으면 바라.
만나지 못한다면(이건 너무 최악이야!) 만나지 못하더라도
네가 알게 되길 기도해.
열일곱의 너처럼. 모든 신께 기도하진 않을 거야.
난 너한테만 기도할 거야.
알겠지? 너는 나도 키웠다고!
내가 못해준 우정은 미안해.
다른 친구들에게서 많이 받았지?
친구가 얼마나 많던 너였니.
난 언제나 단짝 친구 하나면 됐었는데...
넌 언제나 친구들에 둘러싸여 있었지...
그래, 어떤 친구는 나도 그랬다고 말하더라.
그래서 가까이 오기 힘들었다고.
그러나 너도 나도 서로의 친구를 헤치고
서로에게 다가갈 필요도 없었지.
우리 둘 사이에는 아무도,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그래서 널 찾기가 너무 힘들어.
그래서 그걸 후회도 했어.
너라는 축복에 감사해.
그리고 네가 나의 엔딩이 되어주길 기도해.
안녕, 오늘 밤도.
늦게 잘 거지? ^^
난 네 꿈 안 꿔. 넌 내 꿈 꿨었어?
잘 자.
2024 02 23 금
지현으로부터
추신 : 너를 만난 후 난 평생 너를 생각했지.
내 무의식이 되었던 너를 너는 모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