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집안의 어른이자 대들보라고 했다. 1990년대 중반 이후 여성 근로 정책의 본격화와 법제를 통한 고용 평등 이야기가 나오기 전까지는 대부분 가정이 아버지 한 분만 바라보며 살았다. 아버지의 말 한마디는 법이었고 반드시 이행해야만 했으며, 그림자도 밟아서는 안 되었다.
1인당 국민총소득이 1만 달러도 채 이르지 못하던 힘들고 혹독한 시절이었기에 더욱 그랬는지도 모른다. 엄혹한 시절 가장으로 힘든 내색 한번 없이 가족을 돌보며 가정을 일궈주신 아버지가 떠나신 지 20년이 훌쩍 지났다.
건강만큼은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로 자신 있으셨던 아버지는 2000년 어느 날 갑자기 몸에 이상증세를 느껴 종합검사를 받으셨고 암이라는 청천벽력 같은 진단과 수술을 받으셨으나 1년 만에 다른 장기로 전이되고 더 이상의 치료는 의미가 없다는 담당 의사의 소견에 따라 2년여 가까운 기간 방사선치료만 받아오시다 발병 3년여 만인 2003년 70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셨다.
평소 건강을 자신했고 검진에 소홀했던 것이 후회로 남았으나 되돌릴 길은 없었다.
어느새 내 나이도 예순이 넘어 인생을 논하고 있음이 실감 나지 않지만, 세월은 벌써 여기까지 와있음은 현실이다. 나이를 논하고 있는 이유는 또 있다.
그러니까 지난 4월쯤 아내와 함께 카페를 다녀오는 길에 아내가 초등학교 담장의 장미 넝쿨을 보고 “장미가 곧 피겠네?” 하는 말에 나도 모르게 “진 거잖아?” 했더니 “그것이 벌써 작년의 일이란 거 몰라?”라고 하는 말에 나도 모르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세월 흐르는 것이 나이와 비례한다더니 어쩜 이리도 빠른지 다시 한번 실감하지 않을 수 있었다. 더욱이 디지털 정보와 AI 등 지식의 홍수 속에 시시각각 변화하는 세상을 따라가기란 결코, 녹록하지 않다.
나만의 ‘디지털 리터러시’ 능력을 갖추기 위해 쉼 없는 노력을 기울이지만 끝 모를 지식의 세계에 대응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안주하고만 있으면 손자와의 대화상대조차 될 수 없으니 노력에 노력을 더해야 하는 건 당연한 이치인 것 같다.
새로운 시대, 사람이 하던 일을 대행하는 AI 로봇이 인력난 해결의 구원투수로 등장했다. 임대료 100만 원이면 서빙과 조리 등 불평 한마디 없이 한 달 내내 쉼 없이 일한다고 한다. 주방보조 직원 월 급여 200~300만 원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금액이지만 효과는 두 배 이상이라고 하니, 20세기에 태어난 나는 21세기 빛의 속도로 변하는 첨단의 세상에 살고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다.
전기도, 자동차도, 스마트폰도, 컴퓨터도, 병ㆍ의원도, 문화시설도 그 무엇 하나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세상을 살다 떠나신 아버지가 다시 그리운 시간이다.
50~60년인 1960~‘70년대 내가 어릴 적 아버지는 콩나물국을 엄청 좋아하셨다. 그렇게도 맛있게도 잡수셨다. 아침ㆍ저녁 할 것 없이 콩나물국을 즐기시던 아버지를 보며 자랐기에 지금도 머릿속에 그 모습이 생생하다.
엄마가 뜨거운 콩나물국 한 대접이 담긴 밥상을 가져오시면 아버지는 두말할 것도 없이 쉰 김치를 한 젓가락 두 젓가락 국에 넣어 휘휘 저어 밥 한 숟가락 드시고 그 뜨거운 콩나물국을 후루룩 후루룩…
어쩌면 그리도 맛있게 잡수시던지 반세기도 훨씬 지났건만 아버지의 그 모습은 지금도 눈앞에 선하다. 그런 아버지의 피를 물려받아서인지 지금의 나도 콩나물국을 즐겨 먹는다. 먹는 방법도 아버지가 잡수시던 방법 그대로다. 가만히 생각해도 신기할 정도다. 진정 핏줄은 이런 것인가 보다.
아버지는 공직생활을 하셨다. 자동차가 흔치 않던 시절 낡은 오토바이는 아버지의 재산목록 1호였으며, 아홉 식구 3대 생계를 책임져 준 유일한 교통수단이었다.
출근 시간이 다가오면 우리 형제들은 오토바이를 대문 밖에 스탠바이 해 놓고 물걸레로 깨끗이 닦아놓아야 했다. 아버지는 오토바이에 몸을 맡긴 채 비포장 신작로(新作路)를 내달리신다. 아버지의 그 뒷모습도 잊을 수가 없다.
어쩌다 자동차라도 지날라치면 희뿌연 흙먼지가 아버지와 오토바이를 휘감고 하늘 높이 솟구쳐 오른다. 그럴 때마다 어린 마음에도 가슴이 저며 옴을 느꼈다. 한 번, 두 번…
마스크도 착용하지 않은 채 그 흙먼지를 맨몸으로 떠안으며 생계를 유지해 오신 아버지. 해 질 녘 저 멀리 아버지의 오토바이 소리가 들리는 듯하면 우리 형제들은 잽싸게 뛰어나가 대문 밖에서 아버지를 맞이하곤 했다.
흙먼지 쌓인 오토바이는 지금 앨범 속 사진으로만 존재한다. 아버지는 피곤한 몸을 뜨거운 콩나물국 한 그릇으로 푸르셨던 것 같다. 생선 꼬랑이 한 토막, 고기 한 점 없는 마른 밥상이었지만 입안이 데일 정도의 그 '뜨거운 콩나물국에 쉰 김치‘는 어쩌면 아버지의 고뇌였는지 모른다.
병환으로 일찍 떠나셨지만, 아버지의 삶은 청빈(淸貧)한 삶이었으며, 남들 가정보다 비록 가난했지만, 화목했고 우리는 잘 성장했다. 부끄럼 한 점 없이 평생을 살아온 [청렴한 삶]은 가족의 든든한 버팀목으로 우리 가정을 일군 아버지의 평생 동반자요 에너지원이었던 “오토바이와 콩나물국”이 증명하고 있다.
아버지는 생전에 우리와 그 누구한테든 ‘고향의 등불’이 되라는 말씀을 입버릇처럼 해 오셨다. 눈을 감으시면서까지 그 말씀은 놓치지 않으셨기에 지금은 ‘아버지가 등불’이 되어 365일 고향마을을 비춰주고 계실 거라 믿는다.
「아버지는 아무리 힘이 들어도 힘들다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아버지는 당연히 힘들지 않은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는 아파도 아프다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아버지는 당연히 아프지 않은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는 돈이 없어도 돈 없다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항상 돈이 많은 줄 알았습니다.
이제 내가 아버지 되어보니 우람한 느티나무처럼 든든한 크게만 보였던 아버지 그 아버지도 힘들 때가 있다는 것을, 아플 때가 있다는 것을, 돈 없을 때도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가장이니까 가족들이 힘들어할까 봐, 가족들이 실망할까 봐 힘들어도 아파도 돈 없어도 말을 못 했을 뿐이었습니다./ 아버지(이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