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내기 국세공무원에게 하고 싶은 말
어쩌다보니 국세공무원이 되어버린 썰양님. 제대로 월급받는 직장인이 되신 것을 축하합니다.
대학을 졸업한 이후로 변변히 월급도 못받고 창업회사 멤버가 되어 열정페이만 잔뜩 지불한채로 백수가 된 후 공인중개사 시험, 세무사 시험, 공무원 시험 도장을 깨고 드디어 월급을 받게 되었네요.
월급이 풍문으로 듣던 것 이상으로 작고 귀여워서 놀라셨을겁니다.
선배님들이 그러시더군요. 처음 5년은 월급이 너무 적은데, 그래도 5년이 지나면 그나마 좀 나아진다고요.
15년이 지난 지금은 6급 15호봉이어서 아쉬운대로 입에 풀칠은 하고 삽니다.
공무원 연금은 15년 재직 현재 예상 수령액이 월 90만원이 좀 넘네요. 저보다 조금 일찍 사회생활을 시작한 친구들은 국민연금 예상 수령액이 저보다 많다고 합니다. 제 공무원 연금 금액을 듣고 친구들이 놀라더군요. 공무원 연금 때문에 공무원을 선택한다는 말도 옛말이지요.
새내기 시절, 저보다 1년 먼저 공직생활을 시작한 선배언니가 술자리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승진 레이스를 뛸지, 승진을 포기하고 웰빙을 할지 선택해.
저보다 불과 1년 먼저 공무원 생활을 시작한 언니였는데, 지금와서 생각해보니 통찰이 상당했다 싶습니다.
이제 갓 공직 생활을 시작한 분에게 물어보기에 이른 감이 없지 않지만, 썰양님은 어느 길을 선택하시겠어요?
먼저, 승진 레이스부터 생각해봅시다.
일전에 '9급 공채 세무공무원의 승진 시나리오'를 쓴 적이 있습니다. 비현실적으로 빨리 승진해도 29년이 걸리더군요. 7급부터 시작하면 21년으로 줄어듭니다. 썰양님은 20대 후반에 7급으로 시작했으니 시나리오대로 스텝을 밟다보면 50대 초반에 4급 서기관이 되어 있겠네요.
4급 서기관에서 3급 부이사관이 되려면 세무서장 1년, 지방청 과장 2-3년, 본청 과장 4년 정도를 또 불살라야 하는데, 이 또한 쉽지 않은 과정이지요. 아마도 최대한 올라갈 수 있는 자리는 서기관이 마지막일 듯 합니다. 지방 세무서장에서 서울청 과장으로, 다시 서울 지역 세무서장으로 두어번 자리를 옮기다가 퇴직을 하는 것이 상상할 수 있는 최선의 코스가 되겠네요.
서장님이 되면 뭐가 좋을까요?
저도 되어보진 않았지만, 몇 백명의 직원을 대표하는 기관장이 된다는 것은 기분이 좋을 것 같습니다. 예전엔 서장님으로 퇴직하면 직원들이 법인 고문 자리도 얻어다주어서 퇴직 후에는 세무서 앞에 세무사 사무실을 차리고 법인 고문 자리를 발판삼아 제2의 인생을 이어가셨다는 풍문을 들었습니다.
뭐,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 얘기지요. 요즘은 서장님도 국장님도 개업 고민이 많습니다. 다른 세무대리인보다 경쟁력이 있을 수는 있지만, 퇴직 때 직급이 세무사 매출을 보장해주지는 않거든요.
그러면 승진 대신 웰빙은 어떨까요?
선배 언니가 얘기하던 '웰빙'은 엄밀히 말해서 유니콘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지요. 일과 개인생활이 균형을 이루는 소위 '워라밸'을 위해 공무원을 선택한다는 사람도 많았지만 공무원의 현실은 워라밸과 거리가 멀답니다. 특히 업무가 익숙치 않은 신입 시절에는 야근도 많이 하고요, 근무 시간 중에는 끊임없이 민원 전화를 받고 찾아오는 민원인을 응대해야 하며, 악성민원에도 자주 시달립니다. 경력이 쌓이고 직급이 올라가면 일이 좀 익숙해지긴 하지만, 워라밸 추구가 가능한 자리는 국세청 내에서 없는 것 같아요.
아마도 그 선배언니가 말한 웰빙은 승진에 목매달지 않고 가정생활 혹은 여가생활에 충실한 삶을 의미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저는 웰빙 대신 '이직'이라는 선택지가 있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의류학을 전공하고 여성복 디자이너를 하다가 팔자에도 없는 국세공무원이 되었으면서도 정작 저는 '이직'이라는 가능성을 단 1%도 생각하지 않고 지냈던 것 같습니다. 이직을 염두에 두었더라면 커리어를 이런 식으로 쌓지는 않았겠지요.
7급으로 초임 발령받고 세무서에서 2-3년 보낸 후 인사이동을 할 때 상당수가 본,지방청으로 이동을 합니다. 그래야 남들보다 승진을 빨리 할 수 있기 때문이죠. 저는 그 당시 세정홍보과와의 인연때문에 세정홍보과에 전입했습니다. 그때 선배 언니가 '(세무) 커리어와 전혀 관련이 없는 부서에 왜 가냐'며 말렸었는데, 그 이야기를 귀담아 들었어야만 했습니다. '한 3년만 고생하면 6급으로 승진해서 세무 본연의 업무를 할 수 있겠지' 했는데, 3년이 5년이 되어버릴 줄은 몰랐습니다.
15년차가 되어 생각해보니 본청 3년이나 5년이나 큰 차이가 없는 것 같지만, 남들이 다들 본청 4년차에 승진하던 시절에 혼자 5년을 견디려니 너무 억울하고 화가 났었습니다. 세무 본연의 업무였다면 덜 억울했을텐데, 나중에 세무사로 일할 때 홍보과에서 보낸 5년이란 시간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아 속상했었습니다.
본청에 가서 빨리 승진은 하고 싶고, 그러면서도 세무사 커리어는 챙기고 싶은데 뜻대로 되지 않아 속상했던 거지요. 욕심이 많았던 거 같습니다.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는 없어요. 커리어를 포기하고 승진을 추구하든지, 커리어를 관리하고 승진 욕심은 좀 내려놓아야지요.
그러니, 새내기 시절부터 퇴직 후의 진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보셨으면 합니다.
나는 정년퇴직파인가?
아니면 중도이직파인가?
정년퇴직파가 되기로 마음 먹었다면 일단 7급으로 출발하셔야 합니다.
9급과 7급은 호봉 차이가 24만원 정도 나는데요, 호봉 기준으로 각종 수당들이 계산되기 때문에 연봉 차이가 제법 납니다.
7급으로 세무서에서 2,3년 일한 후 본,지방청에 전입해서 6급 승진을 하시고요.
세무서에서 2년 일한 후 다시 본,지방청에 전입해서 5급 승진을 하시기 바랍니다.
7급 세무서 3년+7급 본청 3년+6급 세무서 2년+6급 본청 4년=12년. 빠르면 12년만에 사무관 내정자로 승진하실 수 있을 겁니다.
사무관 정도 되면 연봉이 중견기업 수준은 되는 것 같아요. 풍족하진 않아도 그런대로 부족하지 않은 삶을 살 수 있구요. 가장 좋은 점은 월급 주는 이에게 비굴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과 해고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입니다.
연봉 높은 회계법인으로 이직한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클라이언트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애를 써야 한다는군요. 나의 월급이 그들로부터 나오니까요.
나의 쓸모가 다하면 연봉이 깎이는 수모를 견디든지, 알아서 사표를 쓰든지 해야한다는데 쓸모를 입증해야 하는 중압감이 큰 것 같았습니다.
세무서에서는 직급이 올라갈수록 민원과 격무로부터 오는 스트레스가 줄어듭니다. 7급 초임때 받았던 스트레스와 중간관리자인 지금 받는 스트레스를 비교한다면 초임 때 스트레스가 훨씬 컸습니다.
9급으로 출발하신 분이나 외벌이인 분이시라면 이직을 권해드리고 싶습니다. 세무사 자격증 없이 입사했다면 틈틈히 세무사 자격증 공부를 하세요. 국세공무원 경력자에 대한 시험 면제 혜택이 자꾸 도마 위에 오르고 있으니 하루라도 빨리 따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회계법인에서는 10년 이상 경력의 30대 남자 세무사를 찾는 편입니다. 회계법인이 주로 상대하는 클라이언트가 대기업이나 외국계 기업이다보니 서울청 조사1,4국, 국조국 경력자를 선호합니다.
회계법인 세무사 역시 연봉만 높지, 결국 월급쟁이인건 공무원과 별 차이가 없다 싶으면 개업을 준비하시는 것도 좋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무서에서 법인, 소득, 부가, 조사, 재산세과를 두루 경험하도록 노력해야겠지요.
15년 후 썰양의 선택은?
15년 전의 저는 국세청장은 못되더라도 지방청장은 되어보자는 원대한 꿈을 꾸었던 것 같습니다. 그게 저의 욕망인지, 꿈을 못다이룬 선배들이 새내기인 저에게 투영한 꿈인지는 모르겠지만 빨리 본청에 전입해서 승진해야겠다고 생각했었습니다. 7급 공채 출신 과장님이 겨우 5급인 것도, 9급 공채 출신 계장님이 겨우 6급인 것도 그들의 능력이 부족한 탓이라는 치기어린 생각을 했었죠.
이 조직에 15년을 몸담고 보니, 그게 순리였고 공채 출신의 한계였음을 깨닫게 됩니다. 저 또한 앞으로 15년 후엔 그 과장님처럼 만년 과장으로 정년퇴직을 하겠지요. 부족한 능력 탓이라기보다는 무리하지 않고 안분지족하는 삶을 선택하셨던 것임을 이제서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정년이 연장되지 않는다는 가정하에, 앞으로 정년까지 국세청에서 지낼 수 있는 시간이 15년쯤 남았으니 절반 가량 온 셈이네요.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인생이지만, 지금으로서는 정년퇴직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보다 정확히는 "정년퇴직하는 레저형 직장인"이라고 표현할 수 있겠네요.
인생에 있어서 무엇이 가장 중요할까 고민해보니, 경제적으로 부족함 없고 소소한 성취감을 느끼며 사람들과 교류하는 것이 저에겐 중요한 것 같습니다. 돈을 많이 벌어서 경제적 자유를 얻어 조기은퇴를 한다한들 딱히 할 일이 없고요. 매일 출근할 곳이 있고, 만날 동료들이 있고, 소소한 성취감을 느낄 수 있는 일상이 주는 안정감이 좋았습니다. 이런 생활을 다람쥐 쳇바퀴 돌 듯 갑갑하다고 느끼시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개취니까요.
제가 매달 받는 월급은 대기업 다니는 친구들에 비해 너무 작고 귀엽지만, 60세까지 꾸준히 들어오는 현금의 위력은 보기보다 큽니다. 월 300만원을 2% 이자율의 예금 이자로 받으려면 원금이 18억이구요, 투자를 잘 해서 연 12% 수익률을 올리는 경우 투자금 3억에 해당하는 수익이니까요.
(연 12% 수익률이면 버핏옹 뺨칠 기세 아닌가요?)
생활을 미니멀하게 꾸려가면서 매달 현금채굴해서 꾸준히 투자하고, 정년까지 일해서 연금액을 살찌우면 미래가 마냥 두렵지만은 않겠구나 싶습니다.
혹자는 '노예의 삶'이라고 폄하하겠지요. 틀린 말은 아닙니만, 현재 제 성향에는 "정년퇴직을 꿈꾸는 레저형 직장인"이 약간 모자란듯 적당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