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매일이 정신없고 충분히 분주했다.
매일 야근, 하지만 출근은 늘 9시 정각까지 해야 했고, 제시간에 출석 체크를 하기 위해 늘 빠른 걸음으로 서둘러야 했다.
매 시즌마다 늘 바쁜 디자인실이지만 그나마 여유분으로 조금 남아있는 영혼까지 탈탈 털어 정신을 쏙 나가게 하는 기간이 일 년에 2번 있었다.
컬렉션을 준비하는 기간인데 이 때는 정말 다른 대책은 세상에 없을 정도로 일만 해야 하는, 바닥난 창작의 '영끌'까지 모아야 되는 그런 시간이었다.
쇼와 동시에 매장에서 판매를 할 메인 제품까지 시즌에 맞게 따로 디자인해야 하고 그 많은 샘플들의 가봉과 수정까지 모두 손봐야 하기에 디자인실뿐만 아니라 패턴실, 샘플실까지 온통 다 정신없는 상태로 거의 2~3달을 보내게 된다.
거기에다가 쇼 피스(Show Piece)는 일반 판매용 옷보다 디자인적 요소가 보다 더 극적으로 추가되는 경우가 많아 후가공(옷을 만든 후에 or 만드는 과정 중에 그 위에 다시 디자인을 더하는 작업으로 비즈 장식, 아플리케 같은 핸드메이드 or 프린트 등)이 더해져서 시간이 많이 드는 핸드메이드 요소라도 추가되면 디자이너들의 일은 그야말로 두세 배는 더 많아졌다.
디자인실이 이원화가 되어 메인팀과 쇼팀, 이렇게 두 팀으로 나누어지면서 일이 세분화되어 진행되긴 하지만 말처럼 깨끗하게 "이건 니 일, 저건 내 일"이 되지는 않는 것이 현실이었다. 결국 쇼를 3주 정도 남기게 되면 브랜드의 디자이너가 모두 쇼 피스에 올 인 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회사에서 준비하는 컬렉션은 그 당시 꽤 큰 규모의 쇼였다. 브랜드 자체로 진행하는 단독 쇼로 티켓을 구하고 싶어 하는 패션 관계자들이 상당히 많기도 했다.
전체 70~80 룩 정도로 옷의 피스를 하나하나 세면 어마어마하게 그 양도 많았고, 봉제도 쉽지 않은 최고 난이도의 작품 같은 옷들이 대부분이어서 솜씨 좋은 샘플 전문 선생님들이 한 피스를 만드는데 이틀 정도는 꼬박 작업을 해야 나오는 수준의 옷들이 대부분이었다.
물론 브랜드의 네임으로 하는 쇼이고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컬렉션 룩의 많은 옷을 디자인했지만 디자인실은 늘 원팀으로 움직였고, 컬렉션을 진행할 때에도 막내부터 제일 선임이었던 나까지 쇼 피스를 디자인할 기회는 누구에게나 언제나 열려 있었다. 쇼를 하는 것은 늘 상당한 에너지와 긴장감을 원했지만 디자이너로서 쇼에 서는 나의 옷을 보는 일은 너무나도 특별한 경험이었기 때문에 모든 디자이너가 자신의 열정을 다했다.
쇼 준비를 하면서 우리들이 가장 긴장하고 예민한 순간은 컬렉션 자체 품평회(Presentation) 시간이었다.
컬렉션이 옷들이 2/3 이상 완성되면 품평회를 진행하는데 디자이너들은 그 시간을 제일 힘들어했다.
대부분의 디자이너들이 품평회가 시작되는 몇 시간 정도는 그래도 하이힐을 신고 나름 멋지게 품평을 진행하다가 시간이 지나가면서 몸의 이상 신호가 감지되면 저절로 슬리퍼로 바꿔서 신게 되는, 그런 긴 회의 시간이기도 했다.
수십 개의 머슬린 가봉 바디를 앞에 세워놓고 쇼에 올라가는 모든 옷들을 순서대로 입히면 브랜드 디렉터가 컬렉션의 흐름을 점검하고, 디자인 수정을 하면서 피팅까지 겸해서 보는 아주 중요한 시간인데, 보통 오후 2시 정도에 시작을 하면 그 날은 밤을 꼴딱 새우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밀려드는 수정사항에 급하게 새로 투입되는 쇼 피스들의 작지에...
디렉터의 오더는 많아지고 우리에게는 점차 멘붕이 오는...
하지만, 이런 순간들을 지혜롭게 잘 견디면 컬렉션의 파이널은 늘 근사했고 매혹적이었으며 마음속에 자부심까지 느끼게 해 줄만큼 런웨이는 드라마틱했다.
무대는 멋졌으며, top 모델들은 멋진 워킹을 하고...
옷들은 무대 위에서 그렇게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었다.
쇼가 성공적으로 끝나고 매스컴과 매거진의 촬영 스케줄이 잡히면 서서히 찬란하고 분주한 시즌은 마무리가 되어간다.
이제 그다음 일은 컬렉션에서 선보인 옷들 중 소비자에게 판매를 할 옷들을 다시 점검하는 다소 길고 지루한 여정이 시작된다. 그렇게 메인 디자인까지 모두 재점검되어 옷은 생산되고, 그리고 남은 일은 매장에서 좋은 반응이 오기를 기다리는 것뿐...
30분 남짓한 쇼를 위한 기나긴 시즌 내내 그렇게 치열하게 보내고 나면 그 뒤에 오는 허탈감도 어쩔 수 없이 생겼다. 사실 그런 허탈감이야 디렉터의 거대한 그것보다는 훨씬 덜 하겠지만, 디자이너들도 작던 크던 비슷한 후유증을 갖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면서 또 몇 달을 지내고 나면 그다음 시즌의 컬렉션 스케줄이 기다렸다는 듯이 다가왔다. 그렇게 일 년의 스케줄이 되풀이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지나가 보면 이렇게 다 추억이고 미련이고...
요즘에 코로나로 인해 많이 바뀌어진 언택트 컬렉션을 보면서 바쁘고 치열했던 한 페이지가 머릿속을 바쁘게 지나가 주었다.
온라인에서 유명한 브랜드의 쇼들을 얼마든지 볼 수 있고, 굳이 아날로그 방식의 쇼를 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에 우리는 이미 살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그때의 치열함 속 정신없이 바빴던 날들이 생각나면서 런웨이 뒤의 복작거림이야말로 진짜라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인 것 같다.
오래된 사진첩 속의 몇 장의 사진에서 쇼를 준비하던 우리들의 모습이 보였다.
피곤하고 상기된 얼굴 속에서도 그녀들의 눈은 충분히 반짝거렸다.
그것만으로도 다시 올 수 없는 그 시절은 그렇게 빛나고 있었던 것 같다.
_magazine
나를 닮은 디자이너 // D.EDITTO.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