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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에디토 Nov 20. 2020

시작의 기억들_#02

시작, 생각, 방황, 그리고 버티기  


그날도 출근길의 버스에서 제대로 내리지 못했다.

벌써 3번째 그러고 있었다.

바쁜 출근길, 헐레벌떡 뛰게까지 만들고 있으니 그런 내 꼴이 마냥 한심하게 느껴졌다.







나의 첫 번째 브랜드, 그리고 첫 번째 디자인실.

젊은 디자이너가 만든 디자이너 브랜드로 인기가 있던 나의 첫 직장의 디자인실은 아주 트렌디한 여성복을 만드는 브랜드였다. 당시 인기가 있어서 백화점에 신상품이 나오면 늘 반응이 빨리 올 만큼 판매가 좋았다.

늘 일이 넘치게 많았고, 그래서 빨리빨리 모든 일을 해내야 하는 그런 분위기였다.


이런 브랜드의 디자이너가 된 것이 좋았다.

늦게 시작한 만큼 디자인을 많이 할 수 있고 또 많은 경험이 내게 주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입사 첫날부터 하고 있었다.




나의 첫 번째 디자인실 실장님.

나보다 고작 6살이 많은 그녀는 30대 중반의 젊은 디자이너 겸 브랜드의 대표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33살밖에 안된 그 젊은 나이에서 나오는 포스가 상당했고 카리스마가 장난이 아니었다. 

그 당시에 이미 전체 직원이 20명 정도가 되는 브랜드를 직접 운영하고 있었으니, 지금 생각해도 대단한 능력자임이 틀림없다. 늘 매서운 눈으로 어떤 옷을 만들어야 잘 팔리는 지를 알고 있는, 그리고 꼼꼼하고 빈틈없는 성격을 지닌 아주 잘 나가는 여성복 브랜드의 디자인 실장이었다.




나의 첫 번째 디자인실 식구들.

나와 나이가 비슷한 3~4년 차 디자이너 3명은 이미 디자인실의 최고참 디자이너였으며 늘 실장의 서브 역할을 하며 가봉을 보고, 디자인을 하고 있었다.


나보다 나이가 적었던 디자이너 두 명은 경력 2년 차의 선배 디자이너들이었다.

나이는 내가 2살 정도 많았으나 경력이 없는 초짜였으니 아마 처음에는 그들도 내가 굉장히 불편했을 것이다.

그중 한 명은 늘 시장에 다니느라고 얼굴을 볼 수가 없을 정도로 바빴고, 다른 한 명은 디자인실과 패턴실의 보조업무를 주로 맡고 있었다.


디자인실 인원은 나를 포함해서 총 7명, 론칭한 지 3년 차 브랜드에서의 나의 첫 시작이었다. 







나이 많은 막내 디자이너의 위치는 생각보다 스스로를 안절부절못하게 만들어줬다.


나의 주된 일은 지금 생각해보면 아주 작은 브랜드의 디자인실 업무 보조쯤 되는 것 같다. 

지금의 디자인실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타 부서의 일들까지 옷과 관련된 것이라면  빨리, 그리고 실수 없이 처리하는 것이 나의 주된 일과였다. 생산이 시작된 옷들의 원단과 부자재를 챙겨서 생산공장에 내보내고 체크하는 일이나 주로 옷에 부착할 핸드메이드 코르사주 브로치 같은 액세서리를 직접 만드는 일등 디자인과는 상관없는 이런저런 모든 일들을 주어지는 데로 하고 있었다.

인원은 적고 매일매일 해야 할 일은 너무 많은 브랜드였다. 



그렇게 하루 종일 비슷한 일을 하다가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디자인에 관련된 업무를 시작할 수 있었다.

거의 매일 야근을 했고 집에 오면 거의 밤 11시~12시였다.

처음 입사한 회사에서 주어진 업무의 퀄리티가 부자재나 챙기고 잡일이나 하는 거라니..

두 달 정도 이를 악물면서 참고해도 적응이 되질 않았다.

이러려고 2년을 밤새우며 다시 공부한 게 아니라는 생각만 끝도 없이 했던 긴 날들이었다.


"언제 그만둔다고 얘기하지.. 이번 주까지만 한다고 얘기할까..."


매일 버스에서 이렇게 생각하고 저렇게 생각하고.

사실 그 회사를 그만둬도 뭐 별다른 뾰족한 방법이 없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다른 디자인실에 운 좋게 빨리 취업이 된다 해도 여전히 나는 어디를 가도 나이가 너무 많고 사람들에게는 편하게 대하기는 어려운 막내 디자이너일 테고, 하는 일도 또 몇 달간 비슷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런 답이 없는 현실이 답답하고 속상하기만 했다.

매일을 이런 생각으로 출근 때마다 내릴 정류장을 놓친 것이 한두 번이 아닐 만큼 나의 심리상태는 몇 달 동안 좋지 않았다.







그런 내 모습을 다 안다는 듯, 입사 6개월이 지나가는 시점쯤에 새로운 업무를 하라는 실장님의 오더가 드디어 떨어졌다.


동대문 시장 업무, 그리고 디자인실 가봉 보조라는 두 가지 일을 해보라는 것이었다. 이것도 사실은 시장 업무가 주된 일이 될 것이 뻔했기 때문에 내색은 안 했지만 나의 마음은 또 괜히 서운하고 속상했다.


패션 디자이너에게 동대문 원단 시장은 그때나 지금이나 너무나도 중요한 필수코스이다. 지금 돌이켜 생각을 해보면 그때, 그 일을 시킨 것은 다 그녀의 치밀한 계획, 그런 것이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 당시의 나이만 많은 철없는 초짜 디자이너의 마음은 괜히 급하기만 했었다.


"디자인하고 가봉 보는 거 하고 싶은데.."

나의 속 마음은 이미 인기상품을 몇십 개는 만들어낸 디자이너가 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리 그리 어찌어찌 시장을 다니면서 또다시 6개월이 흐르고 있었다.

일이 너무 많아서 한 번 시장에 갔다가 회사에 들어와서 엉덩이를 잠깐 붙이며 진한 커피믹스를 한잔 마실까 싶으면 디자인실 선배들은 오늘 한 번 더 시장에 가야 한다는 눈치를 자주 주곤 했다.



다행히도 디자인실에 나의 밑으로 대학을 졸업한 막내 디자이너가 들어왔고, 나는 드디어 시장 업무를 갓 졸업하고 디자인 업무를 주로 하는 1년 차 디자이너가 되어 가고 있었다.





_magazine 

나를 닮은 디자이너 //  D.EDITTO.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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