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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우 Sep 17. 2022

오늘 뭐했어?

미래에 대한 고민과 방황, 그 중심에서


검은색 슬랙스에 검은색 반팔 면티를 입고 뮬을 질질 끌고선 오늘도 30분 지하철을 타고 여기에 왔다.

여기라 함은 작업실이라고 불리는 원룸형 오피스 건물의 503호,

뭘 하려고 온 건 아니다. 그냥 왔다.

뭘 할지 몰라서 노트북을 켜고 몇 글자 끄적여본다.


뭐든 다 녹여버릴 것 같은 무더운 여름이던, 다 멈춰 버릴 것 같은 꽁꽁 얼어붙는 겨울이던, 

느긋하게 아무것도 안 하고 있던, 정신없이 분주히 돌아다니던 모두 상관없이

시간은 늘 흐른다.


오늘은 퇴사한 지 6개월 하고 5일째 되는 날,

첫 달은 보험, 연금 등 퇴사하면서 바꿔야 할 서류들을 처리하면서 백수의 삶을 느긋하게 계획해보았다.

방향을 굳히기에 앞서 한 달 단위로 한 개씩 해보면 가고 싶은 길이 명확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두 번째 한 달은 프로그래밍 언어를 공부해보았다. 한 달 만에 뭔가를 만들어내기에는 내 열정과 실력이 아주 쬬끔(?) 모자랐다. 

세 번째 한 달은 운전연수받고 제주도 반달 살기 여행을 다녀왔다. 프리다이빙 자격증도 도전해보았다. 연수를 받고 갔으나 타인과 나의 안전을 생각해 결국 렌트는 하지 않았다. 제주도는 늘 좋다 언제나 좋다.

네 번째 한 달은 코인을 파보았다. 핫하니까! 재미는 있었으나 결국 손실로 마무리지었다...

다섯 번째 한 달은 주문한 아이패드가 도착해서 그동안 해보고 싶었던 그림 그리기와 책만 읽었다.

여섯 번째 한 달은 집안일 처리하느라 바빴고 집이 아닌 나만의 공간이 필요함을 절실하게 느끼면서 사무실을 구했다.

그 뒤로는 작업실에서 매일매일을 보내고 있다. 집은 잠자기 위해 잠깐 머무는 곳.


어찌 보면 아무것도 한 게 없다. 

응 아니야, 대놓고 한건 없다.

그러니까 세상에 보여지는 또는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그런 가치를 창출해낸 건 없었다.


그래도 괜찮다고 하고 싶다. 왜냐면 내가 원한 건 내 삶에 변화를 일으키는 일이었으니까.


내 직장인으로서의 하루는 이랬다. 눈뜨면 출근 준비, 출근해서는 퇴근까지 일, 퇴근해서는 폰과 일체가 되어 침대로 쏙 빠져들어가고 또 눈뜨면 똑같은 하루. 주말이라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었다. 밀린 잠 보충하고 약속 있는 날은 약속, 아닌 날은 뭘 하지도 않았음에도 어느새 정신 차리고 보면 일밤이다. 주말은 늘 짧지. 

내 영혼은 도저히 몸과 함께였다고 할 수 없다. 난 돈 버는 시체에 불과했다. 생각 없이 몇 년을 그렇게 보내고 나니 정신이 바짝 들었다. 이렇게 살고 싶은 게 아닌데. 변화가 필요하다고 절실하게 느꼈다. 무엇보다 어떤 길로 갈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이 길이 아닌 것만은 점점 더 확실해 지니까 시간이 너무 아까웠다. 그래서 때려치웠다. 

강제로 날 울타리 밖으로 내던졌다.


내가 원하는 삶에 대한 그림은 어렴풋이 머릿속에 있다. 하지만 어떻게 그 그림을 완성해 나갈 수 있을지 퍼즐 조각은 터무니없이 부족한 상황이다. 그래서 먼저 퍼즐 조각을 줍고 있다.


5일 더 지나면 작업실을 구한지도 한 달이 되어 간다.

맘 가는 대로 한 개씩 해보기로 한다. 



이 상 내용은 작년 어느 햇살 좋았던 가을날,

시간의 흔적을 기록하고자 몇 글자 끄적이다가 결국 퍼플리싱 하지 않고 방치했는데 

오늘 다시 열어보니 이 공간에 고이 잠들어있었다 내 생각과 감정들이.


그 뒤로도 시간은 나랑 상관없이 흘렀고 어느덧 22년 9월이다. 

사이에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기록을 하지 않으니 시간만 훅 지나가버리고 난 또 아무것도 안 한 느낌이다.

분명 나 자신과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음에도 말이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기록이란 걸 시작하려고 한다.


그동안 이것저것 해보고 싶은 것들을 시도해보면서 내가 원했던 것이 맞는지 검증하는 시간을 가졌다.  

세상에 도움 안 되는 경험 따윈 없다. 아무리 작은 것일지라도.

드라마틱하게 내 인생에 90도 변화를 주는 한 해는 아니었지만 생각 없이 살았던 이전 몇 년보다 오히려 생각하는 대로 산 이번 한 해가 더 많은 성장이 있었음을 느낀다. 적어도 난 내가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에 대한 그림이 뚜렷해졌으니까.


따져보면 여기 오기까지의 기회비용은 꽤나 컸다.

1년 반이라는 시간비용과 직장을 계속 다녔다면 벌었을 약 ?? 정도의 돈을 생각하면 정말, 큰 비용이다.

누군가는 이 시간 동안 벌써 새로운 뭔가를 시작해서 나름의 성과를 이루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그 사람이다. 느리지만 분명 나도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나만의 방식대로.

목표가 없어 방황만 했던 인생고민을 지금 하지 않았다면 분명 나중에 언젠가 또 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비용은 충분히 값어치를 했다고 생각한다. (아.. 그래도 ??은 큰돈인데 수치로 환산해서 생각하니 살짝 속 쓰리긴 하다;;; 그래도 절대 후회는 없다.)


이제부터 내가 이루고 싶은 것에 대한 그림이 뚜렷해졌으니, 

여기에 그 그림을 완성하기 위해 이미 찾은 퍼즐 조각들과 앞으로 찾게 될 조각들을 하나씩 기록하려고 한다.

 

무언가에 집중하는 순간은 늘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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