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보는 눈
군자는 원래 궁한 법이라네.
신영복은 예전에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으로 알게 된 작가이다. 20년의 수형생활 동안 겪은 경험과 생각을 엮은 내용이었는데, 명쾌한 통찰력이 돋보였던 게 기억이 난다. 그래서 그가 다시 세상에 나와서 교수로 재직할 당시의 강의록을 엮은 『담론』을 언젠가는 한 번 읽어봐야겠다고 몇 년간 생각하다가, 이런저런 생각이 많아지면서 최근 읽게 되었다. 역시나 그의 통찰력의 깊이는 남달랐다. 이상적, 관념적인 개념이 나와서 이해하는 데 시간이 좀 필요하긴 했지만, 경험담과 여러 사례들을 같이 곁들여 풀어내는 그의 화법 덕분에 완독을 할 수 있었다.
책 첫 장을 펼치면 제자백가의 사상을 통해서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제시되어 있다. 공자, 맹자, 노자 등 지금껏 나와는 거리가 먼 인물들이라고 생각을 해왔었는데, 현대 사회에도 충분히 적용이 될 수 있는 부분들이 많이 있어서 세상살이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다 똑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자백가가 춘추전국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이라면, 우리도 몸과 마음이 혼란한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따라서 그들이 생각했던 사회문제의 해결방법 또한 우리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작가가 술회하는 제자백가의 이야기와 본인의 이야기 중에서 마음에 와닿은 인상적인 9가지 부분을 발췌하였다.
공자 일행이 진, 채 사이에서 며칠을 굶주려 일어날 기력도 없을 때였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조용히 금을 켜고 있는 공자에게 자로가 다가가 화난 듯 이야기합니다. "군자도 궁할 때가 있습니까?" 자로의 노여운 질문에 대한 공자의 답변은 의외로 조용하고 간단합니다. "군자는 원래 궁한 법이라네." "소인은 궁하면 흐트러지는 법이지." 바로 이것이 공자의 모든 것을 한마디로 압축한 답변입니다.
어려운 상황이 반복될 때마다 억울한 마음이 많이 들었는데, 이 또한 나의 한계를 시험해보는 것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비슷한 말로 '사람은 저마다 감당할 수 있는 무게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살아간다'는 말이 있는데, 어려움이 클수록 내가 그만큼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라는 말로 해석하면 그나마 위안이 된다. 위기에 처했을 때 그 상황에 휘둘리지 않고 차분히 문제를 직시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군자인 것이다. 삶을 대하는 태도의 작은 차이가 습관이 되면 큰 차이로 나타난다.
기계라는 것은 노동 절약적인 기술을 구현하는 체계입니다. 기계는 수고를 덜어 주고 시간을 단축시키는 역할 즉 장자의 표현에 의하면 '기사'가 반드시 있습니다. 자공이 노인에게 이야기했던 기계의 장점이 바로 이 기사였습니다. 그러나 장자가 전개하는 반기계론은 그 기사 때문에 '기심'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좀 더 쉽게 하려는 마음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마음속에 이러한 기심이 생기면 순수한 마음이 없어집니다. 일을 쉽게 하려고 하고, 힘 들이지 않고 그리고 빨리 하려고 하는 이런 기심이 생기면 순수하지 못하게 됩니다.
나날이 발전하는 기계문명은 우리의 일상을 자동화 시스템으로 바꾸고 있다. 결국 사람의 손이 가는 작업들을 모두 기계화로 대체하여 사람은 편안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목표이다. 그러나 과연 모든 것을 기계가 대신해주는 삶이 인간에게 이로운 삶일지는 다시 고민해 보아야 한다. A.I 기능의 발전은 인간을 수동적인 소비자로 전락하게 만들고, 힘들이는 과정에서 얻는 성취감을 제거하여 삶의 의욕을 꺾게 만드는 것일지도 모른다. '스마트'한 어떤 것으로 상통하는 것들이 결국 인간의 생각과 행동을 제약하고 기계에 의지하게 만드는 것이다. 예를 들어 여행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오늘날 여행객들은 여행지의 데이터를 미리 탐색하고, 핸드폰 지도로 위치를 찾고, 다른 사람들이 등록한 평점을 검색해서 나의 선택을 결정하고, 걷기보다는 자동차를 이용함으로써 여행의 수고를 덜고 시간을 단축시킨다. 하지만 여행이라는 것이 이렇듯 미리 짜인 일정을 수행하고, 몸이 편하기 위해 떠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여행을 통해서 낯선 지역에서 길도 물어물어 찾아보고, 특이한 음식도 먹어보고, 나와 다른 사람들도 우연히 만나보고 하면서 새로움을 얻고 돌아왔을 때 그 여행이 소중하고 특별한 기억으로 남는다. 순수한 도전을 통해 과정을 극복해냈을 때 비로소 여행이 단순한 소비가 아닌 진정한 깨달음의 시간이 되는 것이다.
화장, 성형, 의상으로 실현할 수 없는 것이 자기 정체성입니다. 그것은 노동과 삶, 고뇌와 방황에 의해서 경작되는 것이라고 해야 합니다. 장자의 반기계론은 우리의 삶에 대한 반성입니다. 속도와 효율, 더 많은 소유와 소비라는 우리 시대의 집단적 허위의식에 대한 고발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장자의 가치관이 나의 가치관과 일치하는 부분들이 많이 있었는데, 특히 반기계론에 공감이 많이 갔다. 갈수록 편리해지고 단순해지는 삶이지만, 그 이면에는 다른 것들의 희생이 따른다. 기계의 최신화의 주기는 점점 짧아지고, 얼마 전 가장 최신이었던 것들은 하루아침에 쓸모없는 낡은 것들이 되어버린다. 새로운 것들을 더 빨리, 더 많이 아는 자가 대우받는 시대이다. 그렇지만 그러한 사람들에게서 그들이 소유한 것과 소비한 것들을 제거했을 때 어느 정도의 자기 정체성을 갖고 있을까? 30만 평의 대지에 손수 정원을 일군 자연주의자인 영국의 타샤 튜더, 현대문명과 단절한 채 자신들만의 전통을 유지하며 생활하고 있는 미국의 아미시 공동체의 삶의 방식은 바쁘게 돌아가는 현대 사회와 더욱 대비된다. 남들에게 겉으로 보이는 이미지보다 남들이 보지 않을 때 나의 모습을 가꾸는 사람이 진정한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게 아닐까?
...이것이 톨레랑스의 실상입니다. 차이를 존중하고 다양성을 승인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근대사회의 최고 수준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차이와 다양성은 그것을 존중하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새로운 시작이어야 합니다. ...차이는 자기 변화로 이어지는 또 하나의 출발이어야 합니다. 차이는 공존의 대상이 아니라 감사의 대상이어야 하고, 학습의 교본이어야 하고, 변화의 시작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유목주의입니다.
지금까지는 톨레랑스가 굉장히 바람직한 개념이라고만 생각을 했는데, 단순히 차이를 존중하는 것보다는 그것을 인지한 이후의 태도가 더욱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차이를 통해 세계를 이해하고, 나의 기준으로 새롭게 정립해 나간다면, 이전과는 달라진 나 자신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변화는 결코 개인을 단위로, 완성된 형태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모든 변화는 잠재적 가능성으로서 그 사람 속에 담지되는 것이다. 그러한 가능성은 다만 가능성으로서 잠재되어 있다가 당면의 상황 속에서, 영위하는 일 속에서, 그리고 함께하는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발현되는 것이다. 자기 개조와 변화의 양태는 잠재적 가능성일 뿐이다. 그러한 변화와 개조를 개인의 것으로, 또 완성된 형태로 사고하는 것 자체가 근대적 사고의 잔재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변화라는 것은 나 혼자 만들어낼 수 없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만들어가야 한다. 독서도 마찬가지이다. 책을 한 번 읽었다고 해서 그 즉시 어떤 변화가 일어나지는 않는다. 다만 멀리 내다봤을 때, 변화의 가능성을 내 안에 쌓아놓는 것이다. 그리고 선택을 내려야 하는 결정적인 상황 속에서 그 가능성이 발현되고, 주변의 사람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게 만든다. 마음속에 잠자는 변화의 씨앗을 소중하게 돌보아야겠다.
미는 아름다움입니다. 그리고 '아름다움'은 글자 그대로 '앎'입니다. 미가 아름다움이라는 사실은 미가 바로 각성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에 대하여 사회에 대하여 삶에 대하여 각성하게 하는 것이 아름다움이고 미입니다. 그래서 나는 아름다움의 반대말은 '모름다움'이라고 술회합니다. 비극이 미가 된다는 것은 비극이야말로 우리를 통절하게 깨닫게 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든 알아야 이해하고, 공감하고, 아끼고 사랑하게 된다. 모르는 사람을 무조건적으로 아끼고 사랑할 수는 없다. 현대 사회는 익명성이 특징이다. 옆 집에 누가 사는지, 지하철 좌석의 옆자리에 앉은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 관심이 없다. 그만큼 오해가 빨리, 많이 쌓이기도 한다. 알지 못하면 경계하게 되고, 경계가 심해지면 비난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아는 것이 중요하다. 나 자신을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주변을 알아야 하는 것도 중요하다. 서로가 서로를 잘 알고 존중해줄 수 있을 때 아름다운 사회가 만들어진다.
중요한 것은 현대 미국을 미국의 역사와 함께 읽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현대 유럽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와 함께 읽는 일입니다. 대상을 올바르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반대의 것과 대비해야 합니다. 문제는 당시의 식민주의적 세계 경영이 오늘날도 청산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서양 선진국들의 자신감이 부러웠던 적이 많았다. 그들이 이룩해 놓은 업적이나 문화도 부러웠다. 그러나 그것이 다가 아닌 것을 깨달았다. 그들과 관계가 있었던 수많은 다른 나라들이 있었다. 그들은 다른 나라와 사람들을 희생시킨 결과였을 뿐이었다. 과거의 상처가 아물지 않았고, 지금도 고통받고 있었다. 미국은 이라크와 전쟁을 벌였고,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와 전쟁을 벌이고 있다. 손해보는 게임은 하지 않는다. 역사는 계속되고, 패권주의는 현재 진행형이다. 그러나 우리는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들으려고 한다. 이기는 편을 응원한다. 누구나 약자가 될 수 있지만, 누구도 약자의 편에 서려고 하지 않는다. 저자는 어떤 것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반대의 것을 대비해 보는 사고가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명품을 손에 넣었을 때 그 순간 열반에 든다고 합니다. 물론 소비를 통하여 행복감을 느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소비를 통하여 자기 정체성을 만들어 낼 수는 없습니다. 자신의 인간적 정체성은 소비보다는 생산을 통하여 형성됩니다. 의상으로 인간적 정체성을 만들어 내지는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포장된 것과 정체성을 구별하지 못합니다. 우리들의 정서 자체가 포획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무실 직원 중에도 명품백에 목숨 거는(?) 직원이 있다. 외적인 면을 통해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직원을 떠올려 보았을 때는 그런 외적인 이미지보다는 말을 함부로 던지는 성품이 먼저 떠오른다. 아무리 외면을 꾸민다고 하더라도, 내면까지 포장할 수는 없는 것이다. 오히려 명품의 가치와 비교되어서 내면의 부족함이 더욱 부각되어 보인다. 소비는 가치를 높여 보이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는 가장 쉬운 방법이다. 모든 것을 돈으로 해결하려는 생각은 근본을 해결하지는 못하며, 외면과 내면의 괴리감과 초라해진 내면을 발견하게 된다. 따라서 소유에 투자하기보다, 사고와 능력에 투자하는 편이 더 나을 것 같다.
노동의 소외는 그뿐만이 아닙니다. 자기가 생산한 '생산물로부터의 소외'에서 완성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기가 만든 생산물을 자기가 소비할 수 있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나와 함께 수형 생활을 했던 친구는 서울역에 내리면 역전에 있는 대우빌딩을 마주 보고 한동안 감회에 젖습니다. 그 건물을 지을 때 현장에서 노동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로서는 그저 서울역 광장에 서서 길 건너에 버티고 있는 대우빌딩을 바라보는 것이 고작입니다. 그 건물 안으로 들어간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생산물로부터의 소외입니다.
새로 이사했을 때 일이 떠오른다. 새로 이사하고 조금 지났을 때, 쓰레기를 버리려고 1층 분리수거장으로 내려갔다. 그런데 거기에 어떤 중년 이상의 아저씨가 말을 걸어왔다. 본인이 이 건물을 지을 때 참여했던 사람이라면서, 본인 손으로 만든 건물이라는 것이었다. 경계심이 가득했던 나는 낯선 사람의 뜬금없는 소리에 대충 그러냐며 대꾸하고 올라와버렸다. 그런데 이 책에서 비슷한 내용이 나왔다. 생산자와 소비자가 달라서 생겨나는 불평등에 관한 내용이었다. 나 또한 노동으로 지어진 건물에서 살면서도 노동에 대해서는 생각해보지 못했다. 자신이 노동으로 생산한 것들을 누리지 못하는 경우가 너무나 흔했다. 노동의 가치가 높아져서 모든 생산자들이 생산물로부터 소외받지 않고, 생산하는 것에 대해 자부심을 가질 수 있도록 점점 개선되어야 할 것이다. 노력한 만큼 보상을 받을 수 있는 사회, 생산자들에게 고마움을 표현할 줄 아는 사회가 되기를 바라본다.
오랜만에 깊이 있는 독서를 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미루다 미루다 읽은 책인 만큼, 하루라도 일찍 읽은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앞으로도 살아갈 인생이 막막하긴 하지만, 이 책이 나침반이 되어 줄 수 있을 것 같다. 제자백가의 사상들에 대해서도 조금 더 공부해보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 나와 주변을 이롭게 만들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수양이 바탕이 되어야 할 것이다. 머리에서 가슴으로 이해하고, 가슴에서 발로 행동할 수 있는 '사람'을 키워 내는 것이 우리 사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며, 인문학이 그 바탕이 되어야 한다. 내가 하는 독서도 나를 키우는 거름이 되어 세상을 이롭게 만드는 힘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