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독서 흔적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성냥 Aug 30. 2022

슬로다운/ 대니 돌링

제자리를 찾기 위한 속도


우리는 무한 성장이 끝나는 지점에 와 있다.



  Slow down. 천천히 감소하는 것. 제목을 보고 '슬로다운'이 도대체 어떤 개념인지 궁금해졌다. 과연 우리 사회가 속도를 줄이고 있는 게 맞는지 의문이 들었다. 통계전문가의 사회 분석학적인 글을 읽는 것은 처음이라서 한 줄 한 줄 짚어가며 책을 읽어나갔다. 작년에 통계업무를 맡아서 나름 통계를 이용하여 일상생활과 관련된 짧은 글을 써보기도 했었기에, 저자는 어떤 통계를 가지고 우리 사회를 어떻게 분석했는가에 관심이 갔다.

 이 책은 부채, 데이터, 기후, 기온, 인구, 출산율, 경제, 진보에서 나타나는 슬로다운의 모습을 포착하고, 이후의 삶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지 알려준다. 그중에서 한국에서 현재를 살고 있는 나에게 인상적이었던 8가지 대목을 적어본다.



빚은 부의 반대 개념이다. 부가 어느 한쪽으로 더 집중되면 빚이 늘어난다. 대부분의 부를 쥐고 있는 이들은 그럴 만한 자격이 있고, 일하지 않고도 소득을 얻을 권리가 있다는 믿음이 있다. 그래야 부가 지금과 같은 속도로 계속 커질 수 있다. 일하지 않고 얻는 소득은 주로 누군가에게 빚을 내주고서 받은 이자 수익을 말한다. 부가 커질수록 우리 같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균적으로 더 가난해진다. 저장 수단이 발달하면서 저장할 수 있는 정보의 양도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거의 그 양에 압도될 정도가 됐지만, 그렇다고 해서 꼭 우리가 더 똑똑해지거나 정보를 잘 습득하게 되지는 않은 것과 마찬가지 상황이다.


먼저, 빚에 대해 정의하고 있다. 오늘날 일반적으로 빚이라고 하면 투자의 개념으로 많이 생각하기도 하는데, 실질적으로 빚은 부와 반대로 작용한다. 일한 만큼 정당한 보상을 받지 못하는 구조는 언젠가는 무너질 위험을 항상 지닌다. 이 세상에 있는 자원의 양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부자가 가진 부의 크기가 커질수록 가난한 사람의 가난은 더욱 심해질 수밖에 없다. 이런 구조 속에서도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이 부자가 되기를 꿈꾼다. 모두가 적당히 누리는 것보다는 자기 자신이 더 많이 갖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식의 사고방식은 결국 모두가 불행해지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빚 이야기를 하면서 몇 가지 사례를 들게 될 것이다. 슬로다운이 아니라 오히려 가속도가 붙어 증가하고 있다고 믿게 만들 그런 사례들이다. 세계에서 학생 부채 규모가 가장 큰 나라는 미국이다. 그다음이 영국이고, 아마도 캐나다, 칠레 그리고 한국 순일 것이다. 학생들이 빚을 지기 시작하고 불어나게 된 것은 거의 대부분 경제 둔화나 부패의 산물이다. 정치적으로 악의를 가진 무능한 정권이 경제적 불평등을 심화시킨 결과이기도 하다. 불평등이 심한 국가나 더 심해지고 있는 국가에선 학생들이 큰 빚을 지는 것을 용인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부채는 결코 지속 가능하지 않다.


특히 학생들은 공부를 담보로 빚을 지게 되는데, 이러한 마이너스 출발선으로 시작하게 된다면 취업을 하고 나서도 불어나는 빚에 허덕일지도 모른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청년들에게 나라에 빚을 지원해주는 제도가 많은데, 한 나라의 교육에서만큼은 어느 정도 무상으로 제공해주는 기회가 많아져야 할 것이다. 이러한 기회는 단순히 정치적인 실적 수단으로 이용되어서는 안 되며, 진정성 있는 모습이어야 한다. 청년들이 부담 없이 원하는 공부를 하고 다시 후배들에게 나눌 수 있는 사회의 일원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시스템이 바로 국력이다.



1913년부터 1920년 사이 글로벌 이산화탄소 배출량은 1% 떨어졌다. 가장 크게 떨어진 해는 1919년이다. 세계가 겪었던 가장 치명적인 인플루엔자가 창궐한 뒤 그 후유증을 겪고 있을 때였다. 산업에 종사할 젊은 성인의 수가 심각하게 줄어든 상황이었다. 사망으로 줄어든 숫자보다 질병으로 준 숫자가 더 많았다. 사람들이 건강하고 잘 벌 때보다 덜 샀기 때문에 수요도 줄었다. 독감의 세계적인 대유행(pandemic)으로 특히 젊은 층이 큰 타격을 입었다. 1918년과 1919년 사이 글로벌 탄소 배출량이 14%나 줄어든 이유도 이것으로 설명이 된다. 그러다 아팠던 이들 대부분이 회복을 한 바로 다음 해에 배출량은 16%가 늘어난다. 인플루엔자는 산업과 생산, 소비 면에서 제1차 세계대전보다 훨씬 더 큰 영향을 미쳤다.


이 부분은 코로나19의 발생을 떠올리게 한다. 어쩌면 먼 훗날에는 그저 역사의 일부가 될지도 모르는 이 시기에, 사람들은 두려움과 위험 속에서 지내게 되면서 소비와 산업은 위축되었지만 지구의 환경은 오히려 좋아졌다는 뉴스를 많이 볼 수 있었다. 무엇보다 그동안 날마다 괴롭혔던 미세먼지 문제는 한순간 쏙 들어가 버렸으며, 관광지에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지면서 자연은 숨 쉴 수 있었다. 인류에게는 팬데믹이 자연환경에는 아닐 수도 있음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인도의 독립(1947년)과 중국의 공산혁명(1949년)이 일어날 당시 어마어마한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그때 평소보다 더 많은 아기들이 태어났다. 사람들은 뭔가가 잘못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거나 재앙이 닥쳤을 때 아기를 더 많이 낳기 마련이다. 모든 것이 잘 돌아갈 때는 오히려 아기를 적게 낳는다. 정말로 안전하다고 느낄 때 그 숫자는 더 줄어든다. 사회가 나를 돌봐 줄 거라는 신뢰가 있을 때 아기를 낳지 않거나 하나만 낳는 쪽으로 선택하게 된다. 보험 삼아 나중에 자신을 돌봐 줄 아이를 가질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또 아이가 태어난 뒤 살아남을 가능성이 희박할 때에도 아이를 더 많이 낳게 된다. 여성이 아이를 낳을지 말지, 낳는다면 몇 명을 가질지 스스로 선택할 수 있게 되면, 그때에는 많은 것이 바뀌게 된다.


내가 다니던 직장에서만도 코로나 베이비가 여러 번 탄생했다. 코로나19 발병 이후 사람들이 집에서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가족들과 보내는 경우가 많아졌으며, 불안하다고 느끼는 상황 속에서 이전보다 가정적이 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주변 환경이 안정적이라면 안정적인 가정보다는 개인의 가치를 위한 선택을 주로 하게 된다. 나 또한 내가 처한 상황이 불안정하면 나를 지켜줄 수 있는 울타리를 찾지만, 그 반대라면 자유로운 모험에 몸을 맡기곤 한다.



우리는 아주 흥미로울 정도로 예외적인 시대에 살고 있다. 이제 너무나 많은 것들이 더 이상 빠르게 변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가끔은 슬로다운이 어떤 저주인 것처럼 언급되지만 그럴 이유가 없다. 오히려 우리 자신을 되돌아볼 기회가 될 수 있다. 슬로다운은 임금 상승이나 혁신, 소비 등 모든 면에서 일어나고 있다. 무엇보다도 사람들 사이에서 슬로다운이 가장 두드러진 것은 출산이다. 지금 직면하고 있는 슬로다운은 우리가 행복하게 살아남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다. 어쩌면 자본주의의 종말이 시작되는 시점에 살고 있다는 사실은 행운일 수 있다. 아니면 적어도 최근까지 자본주의가 작동하던 방식이 끝나는 시점일 수도 있겠다. 우리는 무한 성장이 끝나는 지점에 와 있다. 그런데도 슬로다운을 반갑게 맞이하기는커녕, 그게 어떤 의미인지조차 알아채지 못하고 있다.


슬로다운을 통해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지속 가능한 방향을 짐작해볼 수 있었다. 느려진다고 불안해하기보다는 느린 변화에서 여유를 가지고 내 옆에서 일어나고 있는 문제들을 차분히 직시해야만 한다. 그동안 바쁨과 적응을 핑계로 소홀히 했던 문제들을 제자리로 돌려놓는 과정이 필요한 것이다. 그동안은 매년 변화들이 무쌍하다고 생각했는데, 자본주의적 변화는 한계가 있음을 깨닫고 있다. 지금껏 우리가 누려왔던 모든 것들을 앞으로도 조금이나마 유지하려는 사람들에게 슬로다운은 천천히 그러나 올바르게 다시 고쳐나갈 수 있는 시간을 벌어준 셈이다.



1960년 이후부터 한국의 출산율 변화를 보여 준다. 급감하는 추세를 보면 놀라울 정도다. 우리는 한때 '선진 경제', '개발된 국가'라는 잘못된 용어를 쓴 적이 있었는데, 한국에서의 급격한 출산율 감소는 그런 것과는 상관이 없다.... 대한민국에서 X세대로 태어난 아이들(1956~1981년)은 어른이 됐을 때 아이를 세 명 이상 낳지 않으려 했다. 나중에 태어난 이들일수록 자식을 두 명이나 한 명을 낳거나, 아니면 아예 낳지 않으려고 했다. Y세대로 태어난 한국의 아이들(1982~2011년)은 자녀를 한 명만 낳는 게 일반적이 됐다. 두 명을 갖는 것보다도 아예 낳지 않는 경우가 더 많았다.
출생자 수가 순감하고 있지 않는 곳이 있다면, 대개는 최근 들어온 이민자들이 낳은 아이들 덕분일 것이다. 물론 이들이 고향에 남아 있었다면 훨씬 더 낳았을 것이다. 지구상에 이민자가 많아진다면, 미래의 출산율은 더 빠르게 떨어질 수밖에 없다. 결국 이런 방법으로도 더 많은 아이를 얻지는 못했다. 그렇다면 이 과정에서 얻어 낸 것은 무엇일까? 바로 여성의 자유다. 선택의 자유다. 대감속을 이끌어 낸 것은 남성이 아니라 여성이었다. 앞으로도 이런 감속을 지지할 것 같은 이들도 여성이다. 녹색 정치인들 중 대다수가 여성인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기후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나섰던 스웨덴의 학생도 여성이었다. 우리는 아주 가까운 미래에 여성들이 정치에 엄청나게 참여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여성들은 정치권에서 더 많은 요직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아마도 슬로다운하지 않은 몇 가지 중 하나가 될 수 있다.


우리나라의 출산율은 세계 꼴찌를 달리고 있는데, 이 책에서도 우리나라 출산율을 예시로 들었다. 출산율에 대해 분석한 자료 중, 출산한 년도에 따라 한 세대를 구분한 점이 인상적이었다. 전쟁 이후부터 위생과 환경이 좋아짐에 따라 출산율이 매우 높았다가, 세대가 지나면서 점점 출산율이 낮아지는 경향을 보였다. 사회의 복지가 좋아지면서 여성이 가정을 구성하는 것에 큰 미련을 두지 않게 된 것도 큰 원인일 것이다. 또한 남녀를 구분하지 않더라도, 자손을 번성하는 것보다 개인의 삶의 만족에 더 큰 가치를 두는 '비혼'과 '딩크'를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다.



글로벌 LPI(지구생명지수)는 1970년에서 2014년 사이 60%가 감소했다. 이는 평균적으로 동물 개체수가 1970년에 비해 절반 정도가 됐다는 것이다. LPI 감소 추세가 더 이상 가속화되지 않은다고 해도, 급격한 멸종이 지속되고 있다는 점은 짐작할 수 있다. 정확하게 수치화할 수는 없더라도 잠재적으로 엄청난 위협과 재앙과 같은 손실을 초래할 것이다. 현재 추세가 가속화된다면, 몇십 년 안에 지구상 모든 생명체는 멸종을 맞을 것이다.


모든 분야에서 슬로다운이 일어나고 있지만, '기후'라는 한 가지 분야에서만큼은 예외이다. 기후 변화는 현재 점점 가속화되는 상태로 나타나고 있고, 생태계의 파괴 속도 또한 점점 빨라지고 있다. 최근 100년 정도의 기간에 인류가 만들어낸 환경오염으로 인한 결과가 최근 눈에 띄게 나타나는 것이다. 다행히 모든 것들이 슬로다운하게 된다면, 그로 인해 현재 변화하고 있는 지구의 환경 변화 속도도 늦출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 아직 있다. 지구의 생명을 지켜낼 수 있는 방법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이 책을 정독한 이후,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변화들이 자연적으로 일어나는 감속의 현상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퇴보하는 것이 아닌, 제자리를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개개인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소비적인 행위들은 한계를 보이기 시작했고, 인류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생산적인 생각과 행동이 무엇보다 중요해졌다. 이제 누구도 이런 변화에 예외가 되어서는 안 되며, 스스로 선택에 대한 책임을 분명히 질 수 있어야 한다. 당연하게 해왔던 사소한 모든 것들이 꼭 필요한 것인지 다시 한번 진지하게 고민해 봐야 할 때다.


  

매거진의 이전글 소규모 유기농을 위한 안내서/ 장-마르탱 포르티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